선조대왕 - 시대상 (8)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는 1600년 세끼가하라[關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승리함으로써 정권이 바뀌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로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안정을 필요로 하였고, 그 일환으로 조선과의 수교를 꾀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게 있어 일본은 원수의 나라였다. 침략을 당해 전 국토가 유린되고, 선왕의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일본은 잊을 수 없는 원수의 나라였다. 이는 선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응은 일본은 원수의 나라이므로 절대 수교할 수 없다는 측과, 비록 일본이 원수의 나라일지라도 다시 이같은 전란을 막기 위해서는 수호를 해야한다는 측으로 의견이 양분되었다. 따라서 결정은 선조가 하여야만 하였다. 선조는 전쟁을 통해 일본인들을 겪었고, 또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사정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일본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가고 있었다. 선조는 일본과는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머지않아 교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또 일본인의 일에 대한 집념과 용기를 들어 일본인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조선은 북쪽의 여진족에 대한 대비 때문에 일본과의 화평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송환도 급박한 문제였다. 이에 선조는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국가안전의 방책으로 일본과의 수호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1607년(선조 40) 정월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명목 하에 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하게 되며, 그 해 9월에는 부산에 왜관이 신축된다.
선조는 그리 행복한 삶을 영위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역대 왕들 중 가장 수난을 겪은 왕이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에서는 여진족이 국경을 침범해 왔고, 남으로는 왜침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 재위기간 중 당쟁이 시작되어 조정이 어지러웠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도 선조는 그리 행복하지는 못하였다. 전쟁 중 아들인 신성군이 병으로 죽었고, 임해군과 순화군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특히 임해군과 순화군은 포로가 된 이 후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다. 또 중전인 의인왕후 등 여러 종친들의 계속적인 죽음을 맞아야만 하였으며, 아들과 종친들은 행실이 좋지 않아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여러 차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줄 것을 명에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선조는 광해군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후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지만, 이는 영창대군의 목숨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또 자신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형제들을 죽이고 결국은 반정으로 물러나게 되니, 살아서는 자신이, 죽어서는 자식들의 불행을 맞아야만 하였다.
사실 선조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항상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했고, 모든 일을 공정히 처리하려 하였다. 특히 종친에 관해서는 그 관심이 컸었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하였으며,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항상 관대히 처리하려 하였다. 전쟁을 겪은 후 재정적으로 힘든 종친들을 돕기 위해 궁방전(宮房田) 등을 지급한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궁방전이 이 후 많은 문제를 가져오긴 했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 종친들의 생 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조치였었다.
선조대왕 - 시대상 (9)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선조조에 당쟁이 시작되었던 것은 당시 이황 · 이이 · 기대승 · 류성룡 · 정철 등 뛰어난 학자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워낙 대학자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의 의견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당쟁은 극성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하여 그것을 선조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당시 일본은 통일의 기운이 조성되어 갔고, 그 힘을 해외로 분출하여야 했다. 대륙으로 방향을 설정하였을 때 조선이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선조 개인에게 책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쟁 중 선조는 불교계와 지방 사림들을 격려하여 국가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명과의 외교도 성공적으로 하여 원군을 청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또 각종 병기를 새로이 만들거나, 개량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는 등 국방에 최선을 다하였다. 또 <기효신서(紀效新書)> 등 각종 병서를 간행하여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사실 선조는 국가의 존립을 위해 온 국민 이 힘을 합쳐야만 할 때, 그 힘을 합칠 수 있도록 한 힘의 중심점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쟁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일본과 다시 수호를 맺었다. 선조뿐 아니라 조선의 백성 모두에게 있어 일본은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선왕의 능이 파헤쳐지고 전 국토가 유린되었는데 어찌 다시 그들과 화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선조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의 왕이었다. 그가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에 선조는 일본과 다시 국교를 재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선조의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조의 전후복구사업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은 바로 일본과 다시 국교를 재개하여 200여 년간 양국간에 그 유례가 없는 평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광해군 - 생애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생애
조선 왕조 스물 일곱 분의 임금들 가운데 광해군은 특별한 왕이다. 우선 다른 왕들은 묘호(廟號)가 태조나 선조 혹은 세종이나 숙종처럼 조(祖) 또는 종(宗)으로 끝나는데 비해 광해군은 그냥 군(君)으로 불리면서 다른 역대 제왕과는 달리 국왕에게 붙여지는 묘호나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였다. 제 15대 국왕으로서 엄연히 15년 42일 동안 조선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였지만, 광해군은 후세에 왕의 묘호로 불리지 못하고 왕자의 작호(爵號)인 군으로 기록되어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 역사상 군으로 불리는 왕은 광해군 외에도 제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이 있었다. 이들은 물론 역대 제왕의 신위가 모셔지는 왕실 사당인 종묘에도 부묘되지 못하였다.
광해군이 왕의 묘호로 불리지 못한 것은 그가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어 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그의 조카인 능양군(인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한 세력은 광해군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단행하여 성공하였다.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연산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폐위되었다. 반정(反正)이란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뜻인데, 역사적으로는 조선 왕조에서 신하가 왕위계승에 직접 간여하여 신하 주도로 자의적인 왕권 교체를 하였던 것을 일컫는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신하들은 왕을 폐하고 어진 이를 새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이것을 반정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 하였다.
나라를 새로 만들거나 새로이 집권한 정치집단이 전대의 왕조나 왕대를 일정하게 비판함으로써 그 존립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관례화된 정치 행위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조가 그러하였고, 고려 왕조를 이은 조선 왕조가 전대의 왕조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고 표방하는 사례가 그러하다. 같은 왕조 내에서도 특히 반정을 통해 즉위한 국왕은 반드시 전왕 대의 역사를 비판하고 부정해야만이 자신이 존립하는 명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경우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뒤이은 국왕에 의해 그들의 정치가 폄하되었으며, 혈통과 정통의 단절에 의해 그 이후에까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없어졌던 것이다. 즉 연산군은 중종에 의해, 광해군은 인조와 그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왕정 체제(王政體制)가 지속됨으로써 폐위된 군왕은 정상적인 왕이 아니었다 하여 그들이 왕자 때에 받았던 작호로 지금까지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어 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렇지만 연산군의 경우는 포악한 학정(虐政)으로 말미암아 반정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는 데 반해 광해군의 경우는 임진왜란 이 후 조선후기 정치사의 전개에서 부각되어 온 이른바 당쟁(黨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 반정의 배경이나 성격이 각기 다른 것에 유념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광해군 - 생애 (2)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지금까지 우리는 광해군을 연산군과 같이 조선 왕조의 대표적 폭군으로 알아왔다. 왕조 개창 이래 왕도(王道)와 덕치(德治)를 최고의 정치 덕목으로 인식하고 그 실천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국왕의 당연한 임무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추대한 반정세력은 광해군이 그 상식의 바탕을 이루는 효(孝)를 정면으로 거슬러 패륜을 자행하였다는 것으로 몰아붙여 이를 빌미로 정권을 쟁취한 후에는 반정의 명분을 기정사실화하고 광해군 시대의 정치를 깎아내렸다. 그렇지만 반정세력과 집권 서인(西人)의 시각에서 벗어나 광해군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이 후 역사 전개를 살펴볼 때 그들이 행한 광해군의 평가가 반드시 정당하였다고는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시대에 집권한 북인세력(北人勢力)과 당시 소외되어 있던 서인 정파간의 갈등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는 만큼 어느 한 쪽에 중심을 두고 역사를 보려는 시각은 옳지 못하다. 광해군 시대의 정치가 새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광해군은 15년 동안의 세자시절을 통해 예비 군왕 수업을 충실히 쌓았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는 장성한 18세의 청년 세자로서 국왕 선조를 대신하여 국정을 수행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6년의 국왕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전란으로 피폐한 경제의 부흥과 사회의 안정에 온 힘을 쏟았다. 조선 왕조 사상 최대의 국난으로 꼽히는 임진왜란을 적극적으로 수습하여 사회 안정을 꾀하고, 대외적으로는 무게 중심이 변화하는 국 제 정세, 즉 중국 대륙에서의 명(明) · 청(淸) 교체를 냉철한 안목으로 읽어 국정 운영에 반영하는 슬기를 지녔다. 광해군이 마침내는 반정을 초래하여 국가적으로나 국왕 자신으로서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과정에는 당시 역사 전개의 생생한 단면과 아울러 왕조사회의 구심점으로서 왕의 위상변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 15대 국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4월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광해군은 제 14대 임금 선조와 공빈 김씨(恭嬪金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혼(琿)이라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한 달 후인 1592년(선조 25) 4월에 평양에서 1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보다 먼저 광해군은 자신보다 2살 연상인 태릉참봉(泰陵參奉) 류자신(柳自新)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광해군의 제2남) 폐세자 지(?)는 무술년(1598, 선조 31)에 나서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관례를 거행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하였다. 즉 광해군이 24세 때에 2남인 폐세자를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34세 때인 1608년(선조 41) 2월에 부왕 선조가 승하하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 16년째 되던 해인 1623년 3월 13일 그의 나이 49세 때 김류 · 이귀 등 서인(西人)이 정치혁명을 감행하여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한 사건(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음날 폐위되어, 부인과 폐세자 · 빈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후 광해군은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18년을 떠돌아 다니며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강화도에 유배된 지 얼마 안있어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부인 류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태안(泰安)으로 거처가 옮겨졌으며, 난이 평정된 다음 강화로 돌아왔다. 그후 62세 때인 1636년(인조 14) 겨울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왕실이 강화도로 피난오게 되자 그는 인근의 교동도(喬桐島)에 옮겨졌다가 이듬해 2월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졌다. 제주도에서의 유배 생활 5년째 되던 해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광해군은 유배지의 울타리 안에서 67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일생을 쓸쓸히 마감하였다.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 :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동) 서북향 산등성이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의 생모 인 공빈 김씨의 무덤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광해군 - 생애 (3)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광해군에게는 어머니가 모두 세 분이 있었다. 생모인 공빈김씨, 생모가 세상을 떠난 다음 그를 보살펴 준 부왕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 그리고 왕후 박씨 사후 부왕이 새로 맞아들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가 그분들이다. 부왕 선조는 일생 동안 두 왕후와 6후궁을 거느리고 모두 14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는 1551년(명종 6) 선조보다 한 해 먼저 출생하였으며,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1577년(선조 10) 5월 21일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으로는 선조의 장남 임해군 진(臨海君 콫)과 차남인 광해군을 낳아 길렀다. 그외 다른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고 그 묘소는 성묘(成墓)라 불리는데,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眞乾面) 사릉리(思陵里)에 있다.
생모를 일찍 잃은 광해군과 그의 형 임해군을 정성스럽게 보살펴 준 또다른 어머니 의인왕후 박씨는 청렴검소하기로 이름난 영돈녕부사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서, 1555년(명종 10) 4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선조보다 세 살 아래이다. 왕후 박씨가 입 궐 하기 전 그 아버지 박응순은 용인현감(龍仁縣監)이었다. 1569년(선조 2)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들어와 중궁에 임하여 1600년(선조 33) 6월 28일 46세로 승하하는 동안 임진왜란의 참화와 몽진의 각고를 겪었다. 병약하였던 왕후 박씨는 끝내 자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생전인 1590년(선조 23)에 장성(章聖)의 존호를 받고, 사후 에는 의인(懿仁)의 시호 외에 1604년(선조 37)에 휘열(徽烈)의 존호를, 1610년(광해군 2)에는 정헌(貞憲)의 존호를 가상받았다. 뒤에 또 경목(敬穆)에 추상되었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7실에 배향되었고, 능소는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東九洞) 동구릉의 목릉(穆陵)에 선조와는 언덕을 달리하여 안장되어 있다.
광해군에게는 생모나 다름없던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한 뒤 부왕 선조는 1602년(선조 35)에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다. 바로 이 사람이 광해군에게는 불행의 씨앗을 가져다 주고, 자신조차 조선 왕조 역대 왕후 가운데 가장 기구한 운명을 겪은 왕비로 알려진 인목왕후 연안김씨이다. 광해군과 인목왕후 김씨와의 갈등 관계에서 우리는 조선 왕실의 왕위 계승과 이를 둘러싼 정치 세력의 변동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인목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제남은 국왕의 장인[國舅]이 되기 전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이었다. 왕후 김씨는 1602년(선조 35) 19세 때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왕비에 책봉되어서는 소성 정의 명렬(昭聖貞懿明烈)의 존호를 받았다. 가례를 치른 이듬해 1603년(선 조 36)에 딸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고 다시 3년 뒤인 1606년(선조 39) 3월 6일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의를 낳았다.
광해군과 부왕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와의 불행한 인연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왕후 김씨는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이 겨루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아들 영창대군을 잃었고, 그 아버지 김제남은 사사(賜死)된 뒤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며 오빠와 동생 등 셋도 살해되는 슬픔을 겪었다. 다만 어린 동생 천석(天錫)만이 숨어 살아 목숨을 보전했고 친정 어머니 부부인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유리걸식하며 모주(母酒)를 걸러 팔아 연명했다.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는 왕후 자신이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왕후에서 폐위되는 폐모(廢母)의 변을 당했다. 이보다 앞선 1612년(광해군 4)에는 정인홍 일파의 사주를 받은 자객 윤인 등에 의해 시해될 뻔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기도 했다.
광해군 - 생애 (4)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1623년(인조 1) 3월에 그 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일파가 일으킨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출되고 대북의 정인홍 · 이이첨(李爾瞻) 일파가 제거됨에 따라 복호(復號)되고 대왕대비로서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기거하였다. 인목왕후 김씨는 글씨도 잘 쓰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였으며, 만년에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고 금강산(金剛山)의 유점사(楡岾寺)에는 왕후의 친필인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있다. 인목왕후 김씨는 1632년(인조 10) 6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49세였다. 시호 인목(仁穆)과 앞서 받은 존호 외에 정숙 광숙 장정(正肅光淑莊定)의 휘호를 더 받았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7실에 배향되어 있고 능소는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의 목릉(穆陵)에 선조와 의인왕후와 각각 3위가 모두 다른 언덕으로 안장되어 있다. 소생 정명공주는 무사히 생장하여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하였다.
광해군의 형제로는 친형인 임해군이 있으며, 이복 형제로는 영창대군을 포함하여 12명의 남동생과 1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 류자신(柳自新)의 딸과 가례를 행하였다. 그후 국왕 재위 기간 동안 14후궁을 더 거느렸는데, 자식으로는 부인 류씨 소생의 세 아들과 폐숙의 윤씨에게서 옹주 하나를 얻었을 뿐 다른 후궁들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부인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수릉관(守陵官) 류잠(柳潛)의 손녀이고 태릉참봉(泰陵參奉) 류자신의 딸로서 광해군보다 2년 먼저인 1573년(선조 6)에 출생하였다. 류자신은 딸이 광해군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른 뒤에 벼슬이 올라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광해군이 책봉례와 고명(誥命) 없이 세자로 되자 동지중추부사로서 세자를 수행했다. 그리고 뒤에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에 이르렀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이 되었다. 류씨는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세자빈으로 되고 동궁에서 16년을 지낸 뒤 1608년(선조 41) 2월 2일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류씨의 형제로는 오빠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과 동생 예조참판 류희량(柳希亮)이 있다.
부인 류씨는 먼저 1남을 낳았으나 일찍이 홍역으로 잃고 다음 1598년(선조 31)에 폐세자 지를 낳았다. 한편 <연려실기술>에는 폐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폐세자(廢世子) 지(?)는 무술년(1598, 선조 31)에 나서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13세)가 계해년(1623, 광해군 15 : 인조 원년)에 폐위되었다. 뒤에 강화에 보냈더니 7월에 땅길(地道)을 파고 몰래 나왔으므로 사헌부에서 논계(論啓)하여 사 사(賜死)하였는데 나이는 26세였다. 양주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에 장사지냈다.그리고 1601년(선조 34)에 셋째 아들을 낳았으나 봉군(封君)되기 전 세 살 때 요절하였다. 류씨는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함께 폐하여져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 친정 아버지 류자신은 관작이 추탈되고 오빠 류희분은 참수되었으며 동생 류희량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아들 류효립(柳孝立)의 역모에 연좌되어 5년 뒤 교살(絞殺)되었다. 류씨의 소생 세자 지와 세자빈 박씨도 폐세자와 폐세자빈이 되어 강화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폐세자 지는 그 해(1623) 7월 25일 유배지 집의 가시울타리 밑으로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다 발각되어 31세로 사사(賜死)되었다. 그러자 폐세자빈 박씨도 부군이 사사되매 이를 뒤따라 바닷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폐세자 빈(嬪) 박씨는 무술년에 났고 계해년 5월에 스스로 목 매어 죽었다\'고 되어 있다.
류씨는 이 소식을 듣고 10월 8일 목을 매 자결하니 이 때 나이 51세였다. 그 묘소는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에 광해군의 무덤과 같은 언덕에 있으나 봉분은 달리하여 있다.
광해군 - 시대상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시대상
광해군이 태어나던 해는 1575년(선조 8) 심의겸(沈義謙) · 김효원(金孝元)의 파당(派黨)이 서로 논쟁 · 배척한 동서(東西) 당론 곧 을해당론(乙亥黨論)이 일어난 때이다. 훈구세력을 대신하여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사림(士林)은 그들 사이에서 강경 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생겨 드디어는 붕당(朋黨)을 낳았다.
붕당의 당론싸움 즉 당쟁(黨爭)은 정치 발전에 긍정적 역할도 하였지만, 당론이 국가의 공의를 위하지 않고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사론(私論)에 빠질 때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다. 우리는 19세기의 세도정치(勢道政治)에서 그러한 파행의 극단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전개되는 조선후기 역사 변화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때로는 왕조사회의 구심인 국왕의 존립마저 흔들었던 당쟁이 발생하던 해에 태어남으로써 그의 파란과 영욕의 일생을 예고한다.
어릴 때의 광해군은 무척 영민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 성품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정무록(丁戊錄)>에 의하면, 선조가 세자를 고르지 못하여 여러 왕자의 기상을 보려고 앞에다 보물을 많이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취하게 하였더니 여러 왕자가 서로 다투어 보물을 취하는데 유독 광해군만이 붓과 먹을 가져 이를 가상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또 <공사견문(公私見聞)>에는 선조가 시험삼아 여러 왕자에게 묻기를 “반찬감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 냐?” 하니 광해군이 대답하기를 “소금입니다.”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소금이 아니면 백 가지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선조가 또 묻기를 “너희들이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냐?” 하니 광해군이 말하기를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부왕 선조는 광해군이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을 기특하게 여겼고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이 말에 힘입었다고 <공사견문>에는 적혀 있다.
1592년(선조 25) 5월에 선조는 국무의 중대한 일들을 광해군에게 보살피도록 하고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평양의 행재소에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전국에 반포하였다. 그 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고) 위험이 닥쳐올 일 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 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 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나,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 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 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폈음은 실로 조 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 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하얗게) 되어 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이 마침 국내가 이 어지 러운 틈을 타고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지자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왔다. 칠묘(七廟)의 의관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 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은 타고난 기질이 영특 명철하고 학문이 정밀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백 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하기를 생각하 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함직한지라.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 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 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지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에는 소해(小海)의 윤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 : 태자 를 가리킴)의 광휘가 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 쪽 구석 땅을 가지고 만족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 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곽 곽청(廓淸)되어 간다. 용루에 문 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學禁 : 태자가 거처하는 곳)은 구도(舊都)의 위 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 와서 들어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 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광해군 - 시대상 (2)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비록 임진왜란 중이라는 급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18세의 광해군이 세자로서 보여준 위기 관리 능력은 예비군왕으로서 현군(賢君)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 · 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에 합류하였다. 또한 이듬해 1593년에 서울이 수복되고 명(明)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왕을 대신하여 난국을 수습하는 소임을 다하자 조야의 명망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23세 때인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는 전라도에서 모병 ·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난리의 평정에 힘썼는데, 무군(撫軍)할 당시에 신료와 백성이 모두 잘 따르므로 난리를 평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와 같이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 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왕위 계승은 확고부동한 것처럼 되었으며 그 자신 또한 현군의 자질을 키우고 있었다.
1593년(선조 26)에 서울을 수복하여 환도한 후 윤근수(尹根壽)를 명(明)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명의 예부(禮部)는 형인 임해군을 두고 동생인 광해군을 세운 것은 `월차(越次)\'라 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명나라에서 월차 즉 차례를 뛰어넘었다는 것으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거절한 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그 내면에 있어서는 당시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둘째 아들 복왕(復王) 상(商)을 사랑하여 태창제(泰昌帝)를 세울 뜻이 없었는데, 명의 예부에서는 태창을 위해 조선의 세자 책봉을 불허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황실의 내부 문제와도 겹쳐지는 바람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평소 광해군을 따뜻히 보살펴주던 의인왕후 박씨가 잦은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1602년(선조 35)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광해군이 32세 되던 해인 1606년(선조 39)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영창대군 의를 낳자 세자로서의 광해군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적자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였던 선조는 그토록 염원하던 적자 영창이 태어나자 그를 무척 총애하고 나아가 영창대군으로 승통코자 하는 의도를 보이기도 하였는 데, 어느 때는 영창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나무 그림을 그려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 대나무 그림은 곁가지가 굵게 뻗어 있었고 줄기는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었다. 선조의 영창대군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 신료들에게까지 지극하여지자 조정 내에서는 세자 광해군이 별자(別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결함을 들추어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정하자는 류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小北派)와 이미 세운 세자를 번복할 수 없다는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大北派)로 갈라져 의논이 빈번하였다.
광해군 - 시대상 (3)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조정에서의 논의가 소 · 대북으로 갈라져 계속되던 가운데 34세 되던 해인 1608년, 선조의 병이 갑자기 위독하여지자 신하들 대부분의 주장에 따라 선조는 광해군에게 선위의 교서를 내렸다. 이 무렵 선조는 “영창대군의 일을 잘 부탁한다.”는 이른바 유교(遺敎)를 내렸는데, 당시 광해군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던 영의정 류영경은 선조의 대나무 그림의 곁가지는 광해군을, 줄기는 영창대군을 암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유교의 뜻을 헤아리면서 선위 교서의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이 일이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던 정인홍 · 이이첨 등에 의해 누설되면서, 정인홍은 선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해 류영경의 처사를 엄히 다스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선조는 이 음모를 막으려 하다가 결말을 완전히 짓지 못하고 그 해 2월 1일에 정릉동 행궁의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선조가 승하함에 따라 인목왕후가 언문 교지를 내려 세자 광해군을 새 임금에 즉위하게 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조정의 기풍을 일신하려 했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남인의 리원익(李元翼)을 영의정에 등용하고 이항복(李恒福) · 이덕형(李德馨) 등 현신을 정승에 기용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써서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다. 광해군의 이러한 의도는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그러나 집권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과 맞물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정(失政)으로 나타났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파탄이 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또 난 중에 불타버린 궁궐을 창건 · 중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조세를 고르게 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한 때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한 누르하치가 세력을 날로 키우고 있고 명나라는 늙은 호랑이로 쇠약해가 는 국제질서를 예의 주시하였다.
이런 어려운 판국인데도 그의 형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낱낱이 비방하고 다녔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 또한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 했다. 이들은 당인(黨人)들과 결탁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언제나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일부 신료들은 임해군을 추대하려다가 실패하자 장자 계승권을 주장, 명에 이 사실을 알려 압력을 넣으려 했고, 임해군 자신은 난행을 거듭하면서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분한 마음을 늘 먹고 있었는데 대북파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넘기려 하지 않았다. 곧 임해군 진을 죽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때 광해군은 이항복과 리원익이 `형제의 도리\'를 들어 살려주기를 청한 상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일찍 자모(慈母)를 잃고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자라나서 마음 속으로 당나라의 송왕(宋王 : 현종의 동복형)과 아조(我朝)의 월산(月山 : 성종의 동복형)에 비겼던 것이다. 동기간에 변고가 있게 되어서는 비록 조정 신하들의 청을 좇아 부득이 외방에 귀양보냈으나, 내 마음의 망극함은 어떠하겠는가. 비록 임해가 흉악한 소문은 있으나 이것은 타고난 성품이 광기(狂氣)가 있고 망령되어서 흉적(兇賊)의 꾀임에 빠진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선왕의 유언이 정녕하게 귀에 남았는데 어찌 차마 우애를 끊겠는가.”
라고 하면서 대북파의 청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대북의 정인홍은 임해군 제거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이 통하지 않으니 사직하고 돌아가면서 임금의 마음을 흔들었고, 종실의 군(君) 35명이 소를 올려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청하니 광해군의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임해군에게 교동(喬桐) 유배의 조치가 있었다가 마침내는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할은론(割恩論)이다. 곧 형제 사이에서도 왕법(王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형벌을 가해도 윤기(倫氣)를 그르치지 않는다는 이론인 것이다. 이것은 정인홍 등 대북파가 제기한 왕권확립의 이론이었다.
광해군 - 시대상 (4)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추숭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정하고 고명과 면복(冕服)을 내리도록 명나라에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신위를 태묘에 부하고 존호를 융봉 현보 무정 중희(隆奉顯保懋定重熙)로 올렸다.
광해군 시대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였다. 관례화되어 가던 적장자 왕위계승에서 벗어나 있고, 민간에서는 임진왜란으로 리씨의 시대가 끝나고 정씨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로부터의 고명을 받지 못하고, 대내적으로는 류영경의 모략으로 부왕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이어받았다. 더구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여 왕권은 한층 불안한 상태였으므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이러한 제 요인을 제거해야 하였다. 이러한 것은 광해군이 해결해야 할 개인적, 시대적인 문제였다.
1611년(광해군 3) 3월에 좌찬성 정인홍이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이 그의 스승인 조식(曹植)의 단점을 지적한 일로 앙심을 품고 이언적 · 이황의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논박하는 차자를 올렸다. 이 일로 해서 관학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정인홍을 논박하는 상소를 올리고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 :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는 사건까지 이르렀는데도 광해군은 끝내 정인홍을 보호하였다. 정적(政敵) 제거와 왕권 안정에 앞장 선 정인홍에 대한 광해군의 이러한 태도는 명분론과 대명 사대주의를 강조하던 유생들과 즉위 초기부터 등지는 것이었고, 또 강력한 왕권을 바라는 광해군의 바람은 대북의 독주를 막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많은 정적을 양산하여 이로 인해 훗날 반정을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1612년(광해군 4) 2월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晋陵君) 태경(泰慶)을 세우려 김직재와 그의 아들 김백함 · 황혁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어 이에 관련된 소북파 인사 1백 여 명이 숙청당하였다.
한편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 인목대비와 그 아비 김제남 등의 일파가 있었는데 이들 또한 앙앙불락(怏怏不樂)하고 있었다. 이런 속에 1613년(광해군 5) 서양갑(徐洋甲)을 중심으로 한 서자(庶子)들의 옥사[七庶의 獄]가 있었다. 이들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면서 반역을 도모해 `참 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거짓여우가 먼저 울어댄다\'라는 주장을 내걸었다.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 황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때에 제기된 것 또한 할은론이었는데, 일곱 살의 어린아이므로 할은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정인홍이 주장하여 처음에는 처형의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강화부사 정항이 자기 마음대로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하고 말았다. 계축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이 사건을 `계축옥사\'라고도 하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