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시대상 (5)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갑자기 졸하자 초상치르는 예를 대군의 예로써 하려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옳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광해군은,
 “어린아이로서 제가 철이 없었으니 이미 죽은 후에는 후한 예로써 대우함이 무엇이 해로우랴. 그러나 아뢰는 바가 실상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로 따르겠다.”
라고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윤8월에는 대북파 소명국(蘇鳴國)의 무고로 신경희(申景禧)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있었는데, 그가 양시우 · 소문진 ·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여 능창군(綾昌君)을 추대하려 하였다고 소명국이 말함에 따라 옥사가 일어났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이자 능양군(인조)의 동생으로 일찍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 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전부터 정원군의 집이 있는 새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당시 17세였던 능창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소명국은 능창군이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무고함에 따라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 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정원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정원군은 이후 병을 얻어 얼마 안있어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축년의 옥사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잃었고, 신경희의 옥사로 능창군이 희생되는 일련의 일을 겪게 되자 인목대비는 궁중의 어른이지만 젊은 나이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는 궁중에 있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불평의 말을 늘어놓기가 일쑤였다.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인목대비의 행동거지는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도 있겠다. 이에 권신들 은 인목대비의 일을 물고 늘어졌으나 광해군은 이 문제만큼은 쉽사리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5년 이상을 끌다가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정월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제기된 것은 전은론(全恩論)이었다. 부모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정인홍의 주장이었다. 이이첨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인목대비에 대한 조처에 여러모로 반대의 여론이 드세었지만, 마지막까지도 죽음의 형벌은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효를 인간의 기본덕목으로 삼는 유교이념의 사회에서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폐모의 조치를 내린 것은 광해군의 큰 실수였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내정과 외교에 있어 그의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폈다. 즉위한 해인 1608년에는 선혜청(宣惠廳)을 두고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조세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조세 부담을 덜어주었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국가의 재원(財源)을 확보하였다. 또 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처지였으므로 궁궐 중건에도 힘써 선조말에 착공한 창덕궁을 그 원년(1609)에 준공하고, 광해군 11년에는 경덕궁(慶德宮 : 慶熙宮) 을, 광해군 13년에는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광해군 - 시대상 (6)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이밖에도 광해군은 왜란 뒤의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호패(號牌)의 실시 등 그 치적에 볼 만한 것이 많았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 · <용비어천가> ·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 <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때 나왔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광해군 8)에 유구(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한편 밖으로는 여진의 후금(後金)이 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처하여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피하였다. 여진이 1616년 후금을 건국하자 그 강성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성지(城池)와 병기를 수리하였으며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 광해군 은 그 요청에 못이겨 강홍립(姜弘立)으로 하여금 1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조케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으므로 명이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하여 광해군에게 후금의 동정 을 담은 밀서를 보낸 덕분에 조선은 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였다.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광해군 원년에는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 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여 그 관계를 회복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적 정치관은 도성을 옮기는 계획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민간에는 리씨 왕조의 기운이 다해 정씨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민심을 동요시키는 주된 요인이었다. 또한 서울이 전란으로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복구 사업에 엄청난 재원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새 도읍을 파주의 교하로 옮겨 민심의 안정과 국가의 새출발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교하는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 사정에 어려움이 없고 대평야로 둘러싸여 있어 식량을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해상 교통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도 적당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서울보다 북쪽에 있어 일본의 위협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고,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어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천도 계획은 광해군의 실리주의 외교노선과 강력한 왕권에 의한 부국강병이 라는 맥락에서 추진된 계획이었지만, 명에 원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에 밀려 연기되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광해군 - 시대상 (7)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한편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과단성 있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내정에 있어 다소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것이 실세(失勢)한 서인세력에게 반정의 근거를 주었다. 그의 재위 15년간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 · 이귀(李貴) · 김자점(金自點) 등이 1623년 3월 13일 반정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임금에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광해군은 조카인 인조에게 쫓겨났다. 반정이 있을 적에 부인 류씨는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 숨어 있다가 수비대장에게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오?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오?”
라고 물었다고 한다. 광해군과 폐비 류씨, 폐세자 지와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을 먼 외딴섬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서울 가까이에 두고 늘 감시하면서 후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강화부의 동문(광해군과 류씨)과 서문(폐세자와 세자빈)에 각각 안치되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기어코 죽이려고 새 임금과 대신들을 졸랐지만 리원익 등이 간곡히 만류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이들이 위리안치된 후 두 달쯤 되어 폐세자가 담 밑에 구멍을 파고 도망쳐 나오다가 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손에는 은과 쌀밥 그리고 황해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폐세자가 구멍을 통해 도망할 적에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이를 바라보다가 폐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고 땅에 떨어졌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이어 폐세자에게도 인목대비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죽음을 내리니, 폐세자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렇게 광해군은 쫓겨난 지 불과 두 달만에 외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폐비 류씨도 세상을 떠났다. 이제 광해군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의 혈육이라고는 박씨에게 시집간 외동딸만 바깥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뿐 이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적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추대할까 의심하여 광해군을 배에 실어 충청도 태안에 옮겨두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로 데리고 왔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에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다. 이때 서인계열의 신경진 등은 경기수사(京畿水使)에게 “선처하시오.”라고 하면서 죽이라는 암시를 주었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보호하였다.

 다음 해(1637, 인조 15) 2월에는 광해군을 서울 근방에 놓아두는 것이 더욱 불안했던 탓으로 제주도로 옮겨놓았다. 휘장을 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내린 광해군은 외딴섬으로 온 자신을 보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들이 상방을 차지하고 그를 아래채에서 재워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멸시를 해도 고개를 숙이고 한마디 말도 안했다 한다.
광해군 - 시대상 (8)
제 15대조   이름(한글):광해군   이름(한자):光海君

광해군은 강화에서 태안으로, 다시 강화로 옮겨졌다가 교동을 거쳐 제주도로 와서 귀양살이한 지 19년째 되던 해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의 유배지 울타리 안에서 예순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저자 미상인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에 의하면 상례와 절차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로 의론이 빈번하였다. 예조에서는 의리를 보아 다른 종친들과 비교해서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품달하고, 승정원에서는 죄인에게 너무 후하게 하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인조는 중사(中使 : 내시로 보내는 어사)와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멀리 바다 건너에 가서 상구(喪柩)를 맞아오게 하고, 3도의 감사에게 경상(境上)에서 받들어 모시라고 전교를 내렸다. 또 정성스럽게 제사를 갖추고 상거가 올라오자 새로 만든 몇 벌의 화려한 옷을 내려 염을 다시 하였으며, 대궐에서 사용하는 관재(棺材)를 내려 관을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 전택(田宅)과 노비를 내려 광해군의 딸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바람대로 양주 적성동(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곧 그의 어머니 공빈 김씨 무덤 아래에 묻혔다.

 인조는 반정(反正)에 의해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였기에 당시로서는 중흥(中興)의 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전대의 정치는 성리학적 명분론과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그 담당자였던 전 임금 광해군은 나라를 어지럽힌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다. 인조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왕정체제 동안 이러한 광해군 시대의 인식은 정당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그 호칭도 왕호(王號)가 아닌 왕자 때 받았 던 왕자호(王子號)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앞에서 그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지금까지 광해군 시대의 인식은 어느 한 측면에 경도된 것으로서 정당한 평가가 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정체제를 유지하던 전근대사회에서 왕의 존재와 역할은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왕은 정치의 권력체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의 의식과 관념에서도 가장 정점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였다. 왕은 각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막론하고 왕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 왕조의 왕, 특히 대내외적으로 변화를 맞고 있던 17세기 초에 제 15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조선 후기를 열어간 광해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 15년 42일 동안 조선을 다스리면서 보여준 그의 정치와 업적은 비록 인조반정에 의해 좌절되었다 하더라도,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면서 부국강병을 지향한 태도로 말미암아 전 · 후대와 비교하여 강렬한 광해군 시대의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인조대왕 - 생애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생애

 인조대왕(이하 인조라 함)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1추존왕후와 1후궁을 거느리고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추존왕후 인헌왕후 능성구씨는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난 재상 문의공(文懿公) 좌찬성 구사맹의 다섯째 딸로 1578년(선조 11) 3월 17일에 원종보다 2년 앞서 출생하였다. 구씨는 처음 선조의 5남 정원군 부에게 출가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고 1595년(선조 28) 11월 7일에 18세로 장자 능양군 종을 낳았다. 그 뒤 차남 능원군 보와 능창군 전을 낳았다. 그런데 1615년(광해군 7) 11월 17일에 그 3자 능창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이를 역모로 몰아 17세의 능창군을 목매 자살케 했다. 이 심화(心禍)로 부군 정원군도 4년 뒤에 40세로 별세했는데 1623년(광해군 15) 3월 장자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임금으로 즉위하니 부군 정원군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추봉되고 구씨는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어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으로 이름했다. 1626년(인조 4) 정월 14일에 별세하니 수가 49세였는데 그 6년 뒤인 1632년(인조 10)에 이조판서 이귀 등의 주청으로 정원대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구씨도 왕후로 추존되어 인헌(仁獻)의 시호가 올려졌다. 그 뒤 경의 정정(敬懿貞靖)의 휘호가 더해졌다. 신위는 종묘의 영녕전 동협 제12실에 배향되고 능은 경기도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에 있는 장릉(章陵)에 원종과 합장되어 있다.

 원종의 제1후궁 김씨(金氏)는 원종의 4남 능풍군(綾豊君) 명()을 낳았는데 능풍군은 미취(未娶)로 조졸하였다.
 인조는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 사이의 맏아들로, 임진왜란이 계속되던 1595년(선조 28) 11월 7일에 난을 피하여 왕실이 잠시 머물고 있던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저녁에 외할머니인 평산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가 곁에 있다가 붉은 용(龍)이 구씨 곁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두 줄로 여덟 자를 쓰는 것을 꿈꾸었는데, 두 자는 흐릿하여 잘 보지 못하였으나
“귀자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
이라는 글자를 보고 기뻐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몸이 궁궐이 아닌 피난지의 어수선한 관사에서(해주부의 어느 민가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시련의 일생을 예고하는 듯하기도 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태어난 인조의 이름은 종(倧)이고 자는 화백(和伯)이며, 왕위에 오르기 전의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천윤(天胤)이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 국왕이었던 선조가 종이라는 이름과 함께 지어준 것이었다. 나중에 광해군이 이 얘기를 듣고,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언짢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인조의 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버지 원종은 선조와 인빈 김씨사이의 셋째 아들이고 이름은 부(?)라 하였다. 원종은 생전에 왕위에 있지는 않았지만 왕의 묘호를 받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 맏아들인 인조가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8세 때인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지고, 1604년 임진왜란 중에 국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1619년(광해군 11)에 그가 죽은 후 아들 인조가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다시 논란 끝에 1627년(인조 5)에 원종으로 추존되었던 것이다. 원종은 인빈 김씨 슬하 4남 5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지만, 이복형제를 합하면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원종의 친형제로는 선조의 사랑을 받아 세자의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던 친형인 신성군을 포함하여 모두 9형제였다.

인조대왕 - 생애 (2)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본관이 능성(綾城)인 어머니 구씨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었다. 1590년(선조 23)에 정원군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으로 봉하여졌다가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이조판서 이귀의 주청으로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구씨는 인조를 비롯하여, 능원대군(綾原大君) · 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첫째 아우 능원대군 보(?)는 문화류씨 효립(孝立)의 딸과 혼인하였다. 1626년(인조 4)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상(主喪) 일을 맡아 했고, 1632년(인조 10)에 대군으로 진호(進號)하였다. 능원대군의 청아 근실한 생활은 종실의 모범이 되었고, 1656년(효종 7)에 그가 사망하 자 국왕이 친히 조상하였다.
 둘째 아우 능창대군의 이름은 전(佺)이다. 그는 1615년(광해군 7)에 신경희(申景禧) 등이 역모하여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이른바 `신경희 옥사\'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대군의 일은 뒤에 다시 서술하기로 한다.

 한편, 인조는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
고 하였다. 2, 3세가 지나서는 곧 궁중에서 자랐는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어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다른 왕자들이 비교되 지 못하였고, 특히 할머니 의인대비(懿仁大妃)가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다고 한다.

 5, 6세가 되어서는 선조가 직접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문의(文義)가 날로 트이니 선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지속적인 공부를 위하여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에게 배우게 하였는데,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었다. 6세 때인 1600년(선조 33)에 평소 자신을 사랑해 주던 의인왕후 박씨가 병으로 승하하였다. 10세 때인 1604년(선조 37)에는 외조부 구사맹이 사망하였고, 이 해에는 아버지 정원군이 임진왜란 중 국왕 선조를 호종하였다는 공으로 호종공신 2등에 봉해지는 경사가 있었다.

 13세 때인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綾陽都正)으로 진계(進階)하고, 이윽고 능양군(綾陽君)으로 봉해졌다. 14세 되던 해인 선조 41년에 국왕이 정릉동 행궁의 정침에서 승하하자 세자인 광해군이 제 15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국왕 광해군은 즉위하자 왕권의 확립을 위해 왕권에 위협이 되는 불안 요소 즉 아직까지 존재하는 왕위계승 후보자를 제거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국왕의 출신에서 비롯하였던 것인데, 광해군 자신은 아버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더욱이 그에게는 친형인 임해군이 있었다. 때문에 생전의 선조는 후계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황급한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광해군을 후사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그 전에는 선조가 인조의 할머니가 되는 인빈 김씨를 사랑하여 그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신성군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광해군은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는 형식으로 세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친형인 임해군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불안의 요소로 작용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은 그를 유배보내고 1609년 그는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후 영창대군과, 신성군의 양자로 들어간 인조의 아우 능창군의 존재는 국왕인 광해군에게 있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후에 서술하겠지만, 이들의 처리방식의 결과는 국왕 자신의 장래와 직결되는 것이 되었다.
인조대왕 - 생애 (3)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선조가 승하한 지 2년 후 16세 때인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문익공 한준겸(韓浚謙)의 딸과 가례(嘉禮)를 올렸다. 부인 한씨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原州)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다. 인조보다 한 살 위인 한씨는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王子夫人)으로 뽑았다가 그대로 다시 인조를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왕자가 혼인을 하면 대궐에서 나와 살아야 하는 예에 따라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 새 살림을 차렸다.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다. 19세 때인 1613년에 드디어 국왕 광해군은 계축옥사를 계기로 선조의 장인 김제남을 사사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하였다가 이듬해에 살해하였다. 이어 영창대군의 생모이자 국왕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되는 인목대비를 폐모 조치하는 일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인조반정의 주요 빌미가 되었다.

 인조가 21세가 되던 1615년(광해군 7)에 `신경희 옥사\'가 일어나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할아버지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큰아버지 신성군이 일찍 죽자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었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지로 보내져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정원군은 얼마 후에 몸져 눕게 되었고 홧병으로 4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25세 때인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태어났다. 이 해에 홧병으로 몸져 누운 아버지 정원군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인조는 손가락을 찔러 피를 바치기도 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무인 이서(李曙) · 신경진 · 구굉(具宏) · 구인후 · 김류(金?)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綾陽君)이었던 인조를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반정을 감행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622년 가을에는 평산부사 이귀(李貴) · 신경진 등의 거사 계획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는 이귀 · 김자점(金自點) 등이 서궁(西宮 : 인목대비를 말함)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29세 때인 1623년에 드디어 반정을 단행하였다. 3월 13일 당시 국왕이었던 광해군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이를 주도한 신하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역사에서는 `인조반정\'이라 부른다.

 이렇게 반정으로 경운궁(慶運宮) 별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광해군 때의 폐희(嬖姬) 김상궁(金尙宮),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 등을 죽이고, 학정(虐政)을 도운 박엽(朴燁)과 정준(鄭遵)을 효시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이 후 억지로 꾸민 옥사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풀어주고, 거짓 훈록과 권세가의 전장(田庄)에 대한 감세(減稅), 복호(復戶)하는 따위 일 을 모두 곧 혁파하였으며, 내수사(內需司) · 대군가(大君家)에 빼앗긴 전민(田民)을 죄다 돌려주었다. 폐단을 지은 내노(內奴) 두 사람을 참형하여 돌려 보이고, 가난한 백성의 해묵은 포흠(逋欠)을 모두 면제하게 하였다.
인조대왕 - 생애 (4)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친히 정사에 임하여서는 맨 먼저 리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아 조정에 들어오게 하고, 신흠(申欽) 등 선조(宣祖) 때의 기구(耆舊)인 신하와 그밖에 말 때문에 죄받은 자를 차례로 등용하니, 현능(賢能)한 자와 뛰어난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었다. 그리고 이경전(李慶全)을 중국에 보내어 봉전(封典)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 · 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조칙을 가져와서 왕과 왕비의 고명(誥命) · 면복(冕服)을 내리니, 왕이 곧 박정현(朴鼎賢)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진사(陳謝)하였다.

 인조는 대비와 모비를 섬기는 데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용모를 유순하게 하고 낯빛을 유쾌하게 하여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1624년(인조 2)에 대비를 높여 명렬 대왕대비(明烈大王大妃)라 하고 경덕궁(慶德宮)에서 진하(陳賀)하고 풍정(豊呈)을 올리고 아울러 모비를 받들어 상수(上壽)하였다. 인조 4년 봄 모비가 앓아 누웠을 때에 왕이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치고 금중(禁中)에서 목욕하고 친히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행하려 하 였는데 예관 · 대간이 대통(大統)의 의리로 힘껏 다투었으므로 장기(杖朞)를 행하였으나 실은 심상(心喪)의 제도를 지켰다.

 1631년(인조 9) 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하자 왕이 산천에 기도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였는데, 회복된 뒤에 대비가 대신과 재신들에게 분부하기를
“주상이 밤낮으로 잘 구완해주신 덕분에 중병이 나을 수 있었다.”
하였다. 1632년 여름에 대비의 병이 다시 위독하자 왕이 병구완하느라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정성을 다하여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았으며 묘사와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다. 1632년(인조 10) 대비께서 승하한 뒤에 그 딸인 정명공주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은 총애를 입는 것이 오히려 두터웠다.

 양주(楊州)로부터 김포(金浦)의 오향(午向)인 언덕으로 옮겨 모시고 모비를 부장(附葬)하니, 곧 장릉(章陵)이다. 1632년 여름에 부왕을 추존하여 원종대왕(元宗大王)이라 하고 모비를 인헌왕후(仁獻王后)라 하였다.
 왕이 일찍이 <서경>을 읽다가,
“밝게 보고 밝게 듣기는 어렵더라도,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효도를 잘할 수 있어야 온갖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총명한 임금이 없지는 않았으나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스리는 것도 융성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대개 왕의 효성은 타고난 것이었고 그 학문을 강구하고 사리를 밝히는 깊이도 이러하였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나서도 그 대우는 끝내 바꾸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광해군 때에 거짓으로 꾸민 옥사에 죽고 모부인(母夫人)이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어린 왕자 영창대군을 품안에서 빼앗아 죽여서 동기 세 사람이 다 혹독한 화를 입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비가 광해군은 종사의 죄인이고 국가의 원 수라 하여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혀 처형해야 한다고 엄한 분부를 여러 번 내렸으나, 매우 무도하기는 하나 군림(君臨)하였던 사람을 처치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왕이 부드러운 말로 간절히 간하고 반복 비유하여 밝히니, 대비의 뜻이 조금 풀렸다.
인조대왕 - 생애 (5)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광해군이 서울에 있을 때에는 별당 하나를 가려서 있게 하고 지공이 정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옹원을 시켜 특별히 지공하되 때에 따라 계속 바치게 하고, 또 승지에게 경계하기를 “오늘날의 조정은 다 그를 섬기던 사람이니 마음을 다하도록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그가 나가서 안치되었을 때에는 왕이 폐비(廢妃)와 행희(幸姬)를 따라가게 하였으나 대비가 윤허하지 않았는데, 왕이 마음에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또 힘껏 청하여 같이 갈 수 있게 하였으며, 주선(廚膳) · 일용(日用)을 특별히 명하여 넉넉히 갖추게 하고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옷을 계절에 따라 계속 보내고 중사(中使)를 자주 보내어 빠진 것을 물어 계속 보내주었다. 광해군과 폐비가 마침내 천수를 다하니 모두 예장을 해주었고 폐동궁(廢東宮)과 폐빈(廢嬪)을 대우할 때도 모두 은례(恩禮)가 있었다. 광해군과 폐동궁에게 다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먹고 살수 있게 돈과 음식 등을 주어 기르고 자라서는 출가시켰는데 그 재물을 갖추어 주고 노비와 전지를 많이 주었다.

 서숙부 인성군(仁城君) 홍(珙)은 광해군대에 수의(收議)할 때에 말한 것이 매우 도리에 어긋났고, 이괄(李适)이 반역하였을 때에 역적들이 끌어댄 말이 매우 흉악하였으므로 대간의 논핵이 준열하게 일어났으나, 왕이 폐조 때의 일에 깊이 징계되어 매우 자책하여 물리쳤다. 삼사와 2품 이상이 합사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한 해가 지나도 그치지 않았는데, 그 후 한참이 지나 비로소 윤허하여 간성(杆城)에 내보내어 안치하였다. 왕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으므로 그 아들 이길(李佶)을 불러 공론에 몰린 사정을 갖춰 말하고 눈물을 흘리니, 궁인들이 모두 느껴 울었다. 얼마 후에 서울로 돌아오라고 명하였는데, 1628년 류효립(柳孝立) 등의 역옥(逆獄) 때에 역적들이 또 인성군을 우두머리로 끌어대어 인성군이 광해군과 교통했고 자전의 분부라 사칭하여 흉악한 자들을 꾀었다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니, 모든 관원 과 모든 종실이 다 나아가 죽이기를 청하였다. 인목왕후가 분부를 사칭하였다는 말을 듣고 또 매우 진노하여 엄한 분부를 잇따라 내려 반드시 처형하려 하니, 왕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여러 아들에게도 아울러 벼슬을 주어 특별히 돌보았다.

 인성군의 친동생인 인흥군(仁興君) 영(瑛)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 왕이 국가가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는 외신(外臣)과 같게 할 수 없다 하여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렸고, 1642년 봄에 기근이 심하였는데 임해군(臨海君) · 순화군(順和君) · 인성군(仁城君) 세 왕자부인에게 모두 급료를 주라고 명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1637년 난리를 겪은 뒤에 잡혀갔던 부마와 종실의 자녀를 모두 공가(公價)로 속(贖)하였다. 친척의 부고를 들으면 편찮은 중이라도 반드시 여러 날 동안 행소(行素)하였다. 인헌왕후의 아우인 종모(從母)가 있었는데 왕이 정성으로 섬겼다. 아우 능창대군(綾昌大君)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여 지사(地師)를 시켜 묘지를 잡게 하여 이장하고 문사에 능한 조신(朝臣)에게 명하여 만장(輓章)을 짓게 하여 애도하였다. 능원대군이 난리를 겪고 집이 없었는데 이현궁(梨峴宮)을 내려서 살게 하였 다.
인조대왕 - 생애 (6)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인조는 잠저(潛邸) 때부터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쓰되 경전(經傳)에 가장 뜻을 기울였다. 즉위한 이래로 날마다 경연을 열어 유신(儒臣)을 가까이하고 토론하면 권태를 잊고 깊고 자세한 뜻을 철저히 살피므로 평소에 노숙한 사유(師儒)라는 자도 모두 탄복하였다. 밤에도 자주 사대(賜對)하여 고금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고락을 검토하지 않는 것이 없고 강독이 끝나면 술을 내리고 한밤에 파하니, 조야에서 전해 말하기를 “태평한 옛일을 오늘날에 다시 본다.” 하였다. 복더위가 한창 심할 때에 약방(藥房)이 경연을 잠시 멈추기를 청하면, 왕이 이르기를 “학문의 도리는 촌음(寸陰)을 아껴야 하는 것이니 덥다 하여 문득 멈출 수 없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유신(儒臣)을 시켜 <성학도(聖學圖)> · <황극도(皇極圖)>및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신을 우대하는 것이 또한 이러하였다.

 문학의 재능이 있는 유신을 뽑아 사가독서(賜暇讀書)시켜 특별히 도탑게 총애하고 젊은 문신도 각각 전경(專經)하게 하여 전강(殿講)하였다. 때때로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재(文才) · 무재(武才)를 시취(試取)하고 대사성(大司成)에게 경계하여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면하게 하였다.

 드디어 <삼경(三經)> 및 그 언해(諺解)와 <심경(心經)> ·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양계(兩界)에 나누어 보내고 문관인 수령도 많이 차출하여 보냈으니 양계의 문교가 쇠퇴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양계는 이 때문에 문과(文科)에 오르는 자가 잇따랐다. 오륜가(五倫歌)를 번역하여 인쇄해서 중외에 펴게 하고 <삼강행실(三綱行實)>도 아울러 간행하게 하였 다. 또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변하게 하는 데에는 <소학(小學)>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쇄하여 바치게 하여 뭇 신하들에게 나누어 내리고 예조에 권면하여 동몽(童蒙)을 가르치고 잘 읽는 자를 뽑아서 생원시 · 진사시의 초시를 보게 하고 팔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두루 권장하게 하니, 궁벽한 시골에도 글을 읽는 풍습이 조금 있게 되었다. 또 나라를 유지하는 방법은 명분에 있으므로 무릇 아버지의 일에 대하여 아들에게, 주인의 일에 대하여 종에게, 지아비의 일에 대하여 아내에게, 형의 일에 대하여 아우에게 물을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증인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경외에 널리 고하여 묻지 말게 하였 다.

 어진이를 높이는 뜻이 그 생사에 관계 없이 차이가 없었다. 즉위한 처음에 장현광(張顯光) · 김장생(金長生) · 박지계(朴知誡) 등을 모두 곧 역마로 불러서 쌍가마를 타고 오게 하여 혹 따로 사업(司業) 벼슬을 두어 제수하기도 하고 발탁하여 헌부(憲府)의 벼슬에 두기도 하고 또 강학청(講學廳)을 열어 세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그들이 이르렀을 때에는 공경을 다하여 맞이하고 녹봉(祿俸) 이외에 늠인이 곡식을 대어 주었고, 그들이 물러갔을 때에는 장리 (長吏)를 시켜 세시(歲時)에 안부를 묻게 하였다. 초야에 있는 인사에 대해서 조금도 버려져 있게 하지 않으니, 김집(金集) · 송준길(宋浚吉) · 송시열(宋時烈) · 최온(崔蘊) 등이 다 뽑혀 쓰였고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경재(卿宰)까지 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죽으면 조문(弔問)하고 그 부물(賻物)을 보낼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그 장구(葬具)를 마련해 주고 그 자 손과 문생(門生)을 찾아서 임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