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대왕 - 생애 (7)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대신을 공경하는 데에는 예모를 갖추었다. 접대하는 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였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였으며 좋은 말이 있으면 반드시 따랐다.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부물과 수의를 특별히 주었다. 영의정 리원익(李元翼)이 늙어서 걷지 못하게 되니 궤장을 내리고 술을 내려 잔치하게 하였으며 견여(肩輿)를 타게 하고 또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니, 리원익이 은사(恩私)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물러가 금천(衿川)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는 왕이 자주 근시를 보내어 안부를 묻게 하였다. 이귀(李貴)의 말이 대신을 범하였는데, 왕이 듣고 하교하기를
“임금을 가벼이 여기고 조정을 업신여긴 데에는 나라에 법이 있으니,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이 뜻을 양사에 말하여 공론에 따라 죄주게 하라.”
하니, 이귀가 이 때문에 파직되었다.
뭇 신하를 친근히 하는 데에는 병든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의관을 보내어 묻게 하고 내약(內藥)을 보내었다. 1635년(인조 13)에 왕이 목릉(穆陵)에 가서 제사할 때에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따라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뒤떨어졌는데 왕이 듣고 어의(御醫)를 머물러 두어 구완하게 하였으며 길에서 사자(使者) 몇 명을 보내어 병문하게 하고 또 일행 가운데에 있는 족속을 물어 곧 역마를 타고 달려가 보게 하였다.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진기 한 과일과 옷감을 내리고, 봉양하기 위하여 고을살이를 청하는 자는 다 바라는 대로 되게 하였다. 이경여(李敬輿)가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에 보임되기를 바랐는데 왕이 그가 경악(經幄)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므로 쌀과 콩을 주게 하고, 박장원(朴長遠)이 월과(月課) 때에 반포오시(反哺烏詩)를 지었는데, 왕이 보고 가엾게 여기면서 그에게 편모(偏母)가 있으나 봉양할 수 없음을 알고 먹을 것을 주었다. 성묘하는 자에게는 제수를 내리고 한겨울에는 때때로 추위를 막을 제구를 내리고, 경비가 부족할 때를 당하더라도 그 가난을 염려하여 봉록을 늘리고, 직분 안의 일이라도 조금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물건을 보내어 보답하였다.
훈신(勳臣)을 대우하는 데에는 은수(恩數)가 특별히 융숭하고 총애하여 내리는 물건이 문득 많았다. 1625년(인조 3)에 정사공신(靖社功臣) · 진무공신(振武功臣)을 거느리고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잔치를 내려 은수를 더하였는데, 진무는 장만(張晩) 등이 역적 이괄(李适)을 평정한 훈호(勳號)이다. 1646년(인조 24)에 또 영사(寧社) · 영국(寧國)의 신 구 공신 등과 회맹하였다. 정사 원훈과 그 아들을 때때로 금중(禁中)에 불러들여 술과 고기로 대접하여 집안 사람끼리 대하는 예처럼 서로 수작하였다. 세자에게 친후(親厚)를 길이 보전하라고 경계하기까지 하였으나 혹 법을 범하면 또한 훈귀(勳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왕이 붕당의 화가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여 번번이 연중(筵中)에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여
“병화나 홍수 · 가뭄의 재앙도 당론보다 더하지 않다.”
하였다. 일찍이 영의정 김류에게 이르기를,
“근일 백관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기강이 해이한 것은 참으로 사욕을 따르고 붕당을 감싸는 탓에서 말미암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를 바라려면 대신과 도헌(都憲)이 마땅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일은 상법(常法)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이 뒤로 붕당을 감싸는 일이 있으면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선왕께서 의주에 계실 때에 시 한 수를 지으셨는데 시의 뜻은 대개 조정의 붕당을 경계한 것이다. 신하로서 그 시를 보면 조금 징계될 것인데 폐습이 날로 심해지니, 참으로 슬프다.”
하였다. 왕이 이처럼 매우 억제하였으므로 반정 뒤에는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인조대왕 - 생애 (8)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깨끗한 몸가짐이 있는 신하에게는 문득 칭찬하고 숭장(崇奬)하였다. 이직언(李直彦)은 나이 많고 평소에 절조가 있다 하여 우찬성에 승배(陞拜)하고, 리원익(李元翼)은 벼슬이 재상에 올라도 초가에서 곤궁하게 산다 하여 경기에 명하여 기와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로 만든 이불과 흰 요를 내리고, 무신(武臣) 최진립(崔震立)은 간약(簡約)하다 하여 공조 참판에 탁배(擢拜)하고, 성하종(成夏宗)도 청렴하고 신중하여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다.
노인을 우대하는 법은 상례(常例)보다 훨씬 더하여 세수(歲首)에는 늙은 신하를 문안하고 또 옷감을 보내었다. 그래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고, 이 뒤에 나이 많아서 벼슬을 더한 자가 매우 많았다.
홍서봉(洪瑞鳳) 등 여러 재신이 회연(會宴)하여 그 늙은 어머니를 축수할 때에 왕이 한 사람 앞에 풀솜 두 근씩을 내리고, 또 하교하기를
“경들은 다 늙은 어버이가 있어서 영양(榮養)을 극진히 하니 내 마음이 감동된다.”
하였다. 선을 베푸는 인자함이 흔히 이러하였다.
충효를 포숭(褒崇)하되 찾아서 정표(旌表)하고, 나라의 일에 죽은 자는 부모 처자를 다 무양(撫養)하고 그 집에 다달이 늠료(쬎料 : 지방관원의 녹봉)를 주고 그 고아를 벼슬시켰다. 김응하(金應河)의 집에는 여러 번 은 3백 냥을 내리고, 또 김준(金浚)의 일가가 안주(安州)에서 죽어 삼강(三綱)이 구비하였다 하여 그 아들 김진성(金振聲)에게 6품 벼슬을 초수하였 다. 항오(行伍 : 군대를 편성한 대열) 중에서 전사한 자에게는 관직을 추증하고, 군정(軍丁)에게는 복호(復戶)하였다. 왕이 문무(文武)를 병용하는 것이 장구한 도리이므로 무사를 대우하는 것이 박해서는 안 된다 하여, 조종 때에 후하게 보살펴 준 규례로 깨우쳐서 재국(才局)과 원식(遠識)이 있는 통정(通政) 이상인 자는 육경(六卿)과 승지(承旨)에 주의(注擬)하고 통 훈(通訓) 이하인 자는 시정(寺正) · 낭료(郞僚)에 차의(差擬)하게 하였다. 또 한가한 때에는 친림하여 시열(試閱)하고 능한 자를 상주었다. 장수를 대우하는 도리는 흔히 고례(古禮)를 본떴다. 1623년(인조 원년)에 도원수 장만(張晩)이 출정할 때에 왕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친히 상방검(尙方劍)을 주어 명을 따르지 않는 제장(諸將)을 베게 하고, 그 뒤 김자점(金自點)이 원수(元帥)가 되었을 때에도 검을 내리었다.
날씨가 추우면 번번이 변방의 장사(將士)를 염려하여 그 괴로운 정상을 자세히 적어 조서를 내렸는데, 그 글의 대략에
“먼 곳 외로운 성에서 적개(敵愾)의 뜻이 절실하더라도 고향 집을 떠나 어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고 차등을 두어 명주를 내리기도 하고 방한구를 내리기도 하고 군졸에게는 옷과 가죽을 주었다. 1627년(인조 5) 호란 때에 철산(鐵山) 사람 정봉수(鄭鳳壽)가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지켜 적을 물리쳤는데, 왕이 소 견하여 상방금단(尙方錦段)과 내구마를 내리고 초천(超遷)하여 전라병사(全羅兵使)까지 삼으니, 사람들이 다 권려하는 것을 알았다.
인조대왕 - 생애 (9)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근로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재변을 당하면 반드시 이것은 내 죄라 하고 반드시 과실을 죄다 아뢰고 원옥을 심리하게 하였다. 왕은 재앙을 당한 임금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아울러 먹지 않는 것이라 하여 사옹원의 어전(漁箭)도 설치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으며,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감히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비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또한 감히 친히 빌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반드시 응답이 있었다. 일찍이 사직단에서 빌 때에 바야흐로 제사하려는데 비가 내리므로 유사(有司)가 장막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또 우산을 받쳤으나 물리쳐 어의(御衣)가 죄다 젖었다. 만년에는 병환이 나서 거행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답답히 여겨 큰 베옷을 입고 앉아 뭇 신하를 불러 각각 극진히 말하게 하고 자책이 매우 간절하였는데, 파하자 비가 크게 내렸다.
자기를 죄책하고 충직한 말을 구하는 하교가 전후에 누누이 있었고, 1636년(인조 14)에 가뭄과 홍수가 잇따르니, 하교하기를,
“슬픈 우리 백성에게 죽음이 닥쳤는데 이런 때에 임금은 먹는 것으로 백성을 괴롭힐 수 없고 또한 방책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각도의 물선(物膳)을 모두 연한을 정하여 바치지 말고 공상(供上)하는 종이도 마찬가지로 시행하고, 재해를 입은 곳은 진휼하는 정사를 각 별히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번번이 흉년이나 병란의 화를 당하면 반드시 밀린 조세를 감면하고 그 부역을 줄이고 모든 삭선(朔膳)과 절일(節日)에 바치는 것과 조석으로 바치는 것과 내외사(內外司)에서 향온을 빚는 일을 모두 절감하되 3년에서 4년에 이르는 것이 항상 많으므로 어주(御廚)에 여유의 찬선(饌膳)이 없었다. 태복(太僕)의 어마(御馬)까지도 말하는 것을 채택하여 그 수를 줄 여서 재변을 경계하는 뜻을 보였다. 1647년(인조 25)에 또 가뭄과 홍수의 재앙이 있었는데, 호조의 미곡 5만 석을 덜어서 백성의 공부(貢賦)를 갈음하게 하였다. 백성이 굶주리면 혹 창고의 곡식을 내거나 다른 곳의 곡식을 옮기고 또 진휼청을 설치하여 죽을 쑤어 먹이되 착한 재신(宰臣)과 낭서(郞署)를 가려서 그 일을 맡게 하고, 외방에도 경중과 마찬가지로 아울러 신칙하였으므로 길에 굶어 죽는 자가 없었다.
여역이 있으면 의국(醫局)을 시켜 약을 지어 구완하게 하고, 또 유사를 시켜 여사(廬舍)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관가에서 그 죽반 거리를 주게 하였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역(牛疫)이 매우 번져 거의 다 죽었는데, 여러 목장에서 기르던 것을 몰아서 여러 고을로 흩어 보냈으므로 소가 크게 번식하여 백성이 밭갈이에 괴롭지 않았다. 혹 대신과 비국의 신하를 부르거 나 근신(近臣)을 불러 과실을 듣기를 바랐다.
인조대왕 - 생애 (10)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인조는 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백성의 고통을 내 몸이 다친 듯이 여기고 백성을 때에 맞추어 부렸다.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의 수용(需用)일지라도 민간에서 장만하도록 요구하지 말게 하고 각사(各司)에 저축한 쌀과 베를 가져다가 쓰게 하고 또 내부(內府)의 물건으로 그 비용을 돕게 하였다. 전전(殿前)에 빈 땅을 개간하여 벼와 콩을 조금 심어서 풍흉(豊凶)을 점쳤는데, 중관(中官)이 물주려 하니, 그만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생성(生成)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하였다. 또 벽에 엎어진 배를 그려 두고 늘 보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붙이었다. 혹 이익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하교하기를
“이익을 중시하고 백성을 경시하는 것은 내가 숭상하는 바가 아니다. 이해로 말하더라도 백성이 보존되는 것이 곧 나라의 큰 이익이다.”
하였다. 또 백성의 고락은 수령에 달려 있고 수령의 출척은 감사에 달려 있으며 곤수 · 변장도 다 군졸의 고락에 관계된다 하여 양전(兩銓)에 엄히 신칙하여 반드시 신중히 간택하게 하였다.
관직에 새로 임명되어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릴 때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친히 보고 권면하고, 수령이 비면 혹 근신을 섞어 차출하기도 하고 혹 재신(宰臣)을 시켜 특별히 벼슬을 옮기게 하기도 하였다. 가장 잘 다스린 자는 차서를 뛰어넘어 발탁하고 탐오한 자는 엄중히 다스렸으며 피폐한 직무를 다시 잘 일으킨 감사는 혹 계속 맡게 하거나 다시 제수하기도 하고 곤수도 그렇게 하였으며 변장까지 다 상주고 벌주었다. 또 자주 암행 어사를 보내어 그 들의 재능을 살피게 하였다. 이 때문에 감사 · 수령과 곤수 · 변장 중에 청간(淸簡) · 선정(善政)으로 일컬어지는 자가 많았다.
간(諫)하는 자의 말이 곧으면 혹 술을 주거나 말을 내리거나 마장(馬裝)을 내리거나 표피(豹皮)를 내리고 이따금 발탁하여 써서 언로(言路)를 열고, 충직한 것을 알면 매우 기휘(忌諱)에 저촉되거나 견주어 말한 것이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죄주지 않았다. 정온(鄭蘊)을 대사간에 특제(特除)한 것은 그가 곧은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이었으 며, 이명준(李命俊)이 살아서는 간장(諫長)에 특배되고 죽어서는 장수(葬需)를 하사받았으니 또한 강직했기 때문이다. 최현(崔睍)이 역옥 때에 체포되었는데 국청이 형신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지난해 야대(夜對)에서 그 때 마침 처치가 미진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입시한 관원으로서 힘껏 다투어 마지않는 것을 내가 자못 괴로워하였으나 그 뒤에 생각하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 자였다. 지금 죄를 받았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최현은 이인거(李仁居)의 반역을 모르고 처사(處士)가 큰소리한 것이라고 망령되게 말한 일 때문에 죄받았다. 그 말이 충직하면 한 때에 취할 뿐이 아니라 또한 능히 오래 되어도 알아 주는 것이 이러하였다.
왕은 인명(仁明)하고 예지(睿智)한 것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났다. 팔도 · 백사(百司)의 문부(文簿)는 세밀히 분석하여 곡진하게 사리에 맞게 하였고 대소신민의 추감(推勘)은 매우 미세하더라도 어두워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형옥(刑獄)에 대해서는 더욱이 삼가고 돌보도록 힘써 사형수를 때에 친히 임하여 공평하게 판결한 것이 많고 한 추위와 한 더위에는 염려를 훨씬 더하였다. 역옥이 일어나면 문득 이르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반역한 정상이 뚜렷하더라도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았다. 왕이 스스로 심리하면 억울한 생각을 품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옥사를 국문하는 형장(刑杖)을 가볍게 하여 그 분수(分數)를 줄이고, 모든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애매하면 이미 승복한 자라도 문득 용서하고, 1624년의 억울한 자도 다 모두 죄를 씻어 주었다. 이 때문에 역변(逆變)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사람들이 뜻밖에 걸리는 것을 근심하지 않 았다.
인조대왕 - 생애 (11)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1633년(인조 11)에 한인급(韓仁及) 등을 명에 보내어 장자(長子)를 세자로 봉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추봉(追封)을 사례하게 하였는데, 1634년에 황제가 태감(太監) 노유령(盧維寧)을 보내어 세자의 고칙(誥勅)과 채단(綵段)을 가져왔다. 1635년(인조 13) 12월 9일에 왕비가 승하하였다. 왕비는 정정(貞靜)하고 인명(仁明)한 덕이 있고 왕을 모시되 풍간(諷諫)한 것이 많았다. 장릉(長陵)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파주(坡州) 북쪽에 있다.
1627년(인조 5)에 청나라 군대가 깊이 들어왔을 때에 왕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묘당의 계책을 써서 적이 화평을 청함에 따라 허락하였는데, 1633년에 이르러 우리에게 폐물을 늘리라고 협박하고 군사를 원조하라고 꾀었다. 큰 의리가 달려 있어서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으므로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어 절교를 알렸더니, 1636년(인조 14) 봄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왔다. 뭇 사람의 의논이 준열히 일어나 사자를 베어 죽이기를 앞다투어 청하였는데 사자가 몰래 듣고 놀라 달아났다. 사기(事機)가 이미 변하자 왕언(王言)이 여러 번 내려졌는데 뜻은 더욱 격렬하였다. 12월에 적병이 갑작스레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왕이 강도로 향하려다가 일이 급해져서 방향을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 갔는데 적이 군사를 더하여 에워싸니 왕이 친히 성을 순행하며 삼군(三軍)을 위로해 주었다.
하루는 날씨가 춥고 눈이 내리는데 왕이 행궁(行宮) 뜰에 나와 기도하였다. 향을 피우고 네 번 절한 다음 거적을 깔고 빌기를
“고립된 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도 못 되나 백관(百官) · 만민(萬民)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 개이게하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하고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저녁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빗물이 어의에 스미므로 근시가 일어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대신이 다시 청하여도 따르지 않다가 옷자락을 끌고 울며 청한지 한참 만에야 비로소 일어나 네 번 절하고 물러나는데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리니, 장사(將士)가 듣고 모두 느껴 울었다. 왕이 쓰던 의복을 내어 성 위의 군사들에 게 조각조각 나누어 주고 호종(扈從)한 신하들이 앞다투어 의금(衣衾)을 보내니, 군사들이 추위를 잊었다. 적이 화해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니, 밤을 타서 성을 세 번 쳐왔으나 세 번 모두 격퇴하였으므로 사기가 더욱 떨쳤다.
그러나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강도의 패전 소식이 또 이르렀으므로, 김류 · 최명길(崔鳴吉)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피폐(皮幣) ·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굳이 청하고 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니, 왕이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랐다. 1637년(인조 15) 정월 29일에 적의 진영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니, 묘모(廟貌)가 퇴폐하지 않고 유민(遺民)이 온전히 돌아왔다. 곧 강도에서 군율(軍律)을 어긴 장수를 주벌하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 등의 충성을 표창하고,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등의 죽음을 가엾이 여겨 그 집을 돌보았다. 또한 전사한 군졸의 유해을 묻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쌓아 제사하고, 이역(異域)에 잡혀간 사녀(士女)를 불쌍히 여겨 금을 내어 속(贖)하니, 민정(民情)이 크게 위안되었다.
인조대왕 - 생애 (12)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군 이름(한자):仁祖大王
인조는 반정한 뒤로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였다. 바닷길이 험난하여도 조빙(朝聘)이 정성스러웠으며, 희종 황제(熹宗皇帝)의 휘음(諱音 : 부음)을 듣고는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홍방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진향(進香)하게 하였으며 한여직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였다. 1627년에 기미한 뒤에 권첩 등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니, 예부(禮部)의 회자(回咨)에
“성지(聖旨)를 받드니 `왕이 병화를 입은 정상을 아뢴 것을 보고 짐의 마음이 매우 슬프다. 오랑캐와 통문(通門)하며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산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며 군신의 대의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은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 왕은 와신상담에 더욱 힘쓰고 엄히 방비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 가도에서 반역하여 흠차 총병(欽差摠兵) 진계성(陳繼盛)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에 왕이 이서(李曙) · 정충신(鄭忠信) 등을 보내어 그 죄를 성토하니 유흥치가 달아나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중국 장수들이 듣고 의롭게 여겼다.
교린(交隣)에는 반드시 믿음을 중요하게 여겼다. 유구국(琉球國)의 임자정(林子政) 등 8인이 표류하여 우리 변방에 이르렀는데 위무하여 보냈더니, 중산왕의 세자 상풍(尙豊)이 우리 부경 사행(赴京使行) 편에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전해 보내어 사례하였다. 일본 관백(關白) 수충(秀忠)이 가광(家光)에게 전위(傳位)하고 사자를 보내어 내빙(來聘)하여 세호(世好)를 닦기를 청하였으므로, 정립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140여 인을 쇄환하였다. 대마도추(對馬島酋)가 중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고, 또 평성 행(平成行) 등을 보내어 도중(島中)의 재물이 없음을 고하고 해마다 보내 주는 물건을 당겨 내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약조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물건을 내려주었다. 가광이 그 할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비느라 큰 절을 세워 일광사(日光寺)라 이름하고 신필(宸筆)을 얻어 나라 안에 뽐내려 하였다. 왕은 천품이 작은 기예에 능한 것이 많아 널리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법이 매우 기특하였으나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는데, 대신 이 먼 데 사람의 희망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종실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시켜 쓰게 하여 내려주셨다. 대개 작은 기예를 전해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638년(인조 16)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니,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1637년에 심양(瀋陽)에 가서 연경(燕京)으로 옮겨 들어갔다가 1645년 봄에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서거하고 그 맏아들도 병들었으므로 시사(時事)에 근심이 많았다. 왕에게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봉림대군은 인효(仁孝)하고 활달하며 나이도 위이었다. 왕이 나라에 연장한 대군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들과 경대부에게 물어 계책을 정하였는데, 그 때 봉림대군이 막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으니, 여정이 일치하였다.
인조대왕 - 생애 (13)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1646년(인조 24)에 폐빈(廢嬪) 강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죽었다. 강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부터 소행에 부도한 짓이 많고 몰래 역위(易位)를 꾀하였으며, 대궐에 돌아온 뒤에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흉한 것을 묻어 저주하고 요사를 부려 독을 두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가 반역의 정상이 드러나서 폐출(廢出)되어 사사(賜死)당했는데, 하교하기를,
“그 죄는 무겁더라도 은례(恩禮)를 전혀 없앨 수 없으니, 예장(禮葬)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제물도 적당히 주게 하라.”
하였다. 왕법을 시행하되 천의(天意)가 또한 애연하였다.
이 때 왕이 창경궁(昌慶宮)에 있었는데 어침(御寢) · 금정(禁庭)이 마르고 깨끗한 곳이 하나도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영안위(永安尉)의 집에 임시로 계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근방의 민가가 많이 침점(侵占)당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인경궁(仁慶宮)의 재목을 헐어서 창덕궁(昌德宮)의 옛터에 옮겨 짓기를 청하였는데, 공역에 드는 물건을 다 각사(各司)에 서 취하여 두어 달 만에 낙성하니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1647년에 창덕궁에 이어(移御)하였다. 1649년(인조 27)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즉 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왕세손은 자질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용(禮容)이 점잖고 우아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왕은 전신을 기울여 밤낮으로 정사에 힘썼다. 병환이 없을 때에는 문서를 출납하는 일을 밤이 되어도 쉬지 않으므로 은대(銀臺 : 승정원)의 숙직하는 신하가 감히 자지 못하였다. 왕의 병환은 1632년 상중에 있을 때에 시작되어 피로하고 염려하는 가운데에 손상이 쌓여 17년 동안 낫지 않고 더하다 덜하다 하였다. 1648년 겨울 이후 6∼7개월 동안 자못 좋아져 때때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천재(天災)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을 근심하고 시사 (時事)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의 과실을 듣기를 바라는 것이 처음에 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4월에 또 인견하여 민사(民事) · 병기(兵機)와 서환(西患) · 남우(南憂)에 대하여 묻지 않은 것이 없었을 때에 성지(城池)와 군사를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달려 있지 않고 장수에 달려 있으니, 내 소견으로는 장수를 논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겠다.”
하고, 강도(江都)의 목장을 백성이 경작하도록 허가하고 수륙(水陸)의 방비책에 대한 말씀이 매우 곡진하였다. 며칠 안 되어 조금 더 나아지 다 갑자기 위독해졌는데 내국(內局)이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폐단이 있으므로 설치하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이 해 5월 8일 병인에 창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는데, 임종 때에 대신과 근신이 모두 입시한 것은 마지막을 바르게 하는 예이다. 춘추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었다. 이 해 9월 20일에 왕비의 능 오른쪽에 장사하였는데, 왕의 명에 따른 것이다. 왕비의 장사 때에 모든 석역(石役)을 되도록 간략하게 힘쓰고 곡장(曲墻) · 상설(象設)과 정자각(丁字閣)을 다 가운데에 두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였는데, 뒷날에 백성의 힘이 거듭 괴로울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인조대왕 - 생애 (14)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왕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늘 사치를 경계하고 성색(聲色) · 진완(珍玩)을 즐기는 일을 마음이나 눈에 둔 적이 없었다. 신하들을 대하면 번번이 사치한 버릇의 해독을 말하고 궁중에서 입는 것은 오로지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입지 않고 여름철에는 베옷을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취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염(斂)에 쓰인 것은 명주옷이 많았는데, 다 평소에 지어 둔 것이다.
승하한 날에 대궐에 달려와 곡하는 서울 안의 인사가 길을 메웠는데 모두 부모를 잃은 듯하였고, 원근의 외방에서 와서 곡하는 사대부가 잇따랐고 먼 지방 벽촌의 어리석은 백성까지도 놀라 통곡하였다.
인조는 두 왕후와 세 후궁을 거느리고 6남 1녀를 두었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호조판서로서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전리방귀(田里放歸)됐다가 유배된 한준겸(韓浚謙)의 딸이 다. 1594년(선조 27) 7월 1일에 출생하였고1610년(광해군 2) 17세로 능양군이던 인조와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지고 1623년(광해군 15)에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임금으로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등으로 내외의 어려움을 겪다가 병 자호란 한 해 전인 1635년(인조 13) 12월 9일에 승하하니 수가 42세였다. 사후에 인열(仁烈)의 시호가 올려지고 뒤에 정유(正裕)의 휘호가 더해졌으며 1651년(효종 2)에 명덕 정순(明德貞順)의 휘호가 추상되었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의 제8실에 배향되어 있고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에 인조와 합장되어 있다. 소생은 4남을 두니 장남은 소현세자 조(?)이고 차남은 효종이며 3남은 인평대군 요(홏), 4남은 용성대군 곤(滾)이다. 다섯 번째로 아들을 출산하였으나 이는 2일만에 요절했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양주조씨(楊州趙氏)는 복제(服制)와 예송(禮訟)의 본의아닌 대상이 된 자의대비(慈懿大妃)로서 더 잘 알려진 왕후이다. 조씨는 간택 당시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있던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1624년(인조 2) 11월 7일 에 출생하였다. 1638년 15세에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의동(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가 되었다. 그로부터 11년 뒤에 인조가 승하하니 25세로 대비가 되고 1651년(효종 2)에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으니 이로부터 자의대비로 불리게 되었다. 1659년(효종 10)에 아들인 효종이 승하하자 자신의 복상문제로 서인의 기년설과 남인의 3년설이 대립하여 치열한 당쟁이 벌어진 끝에 결국 서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다시 1674년(현종 15)에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또다시 왕후는 자신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서인은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당쟁이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함으로써 서인이 실각했다. 왕후에게는 1661년(현종 2)에 공신의 존호가 더해지고 그 후 휘헌 강인 숙목 정숙 온혜의 존호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가상받았다. 1688년(숙종 14) 8월 26일에 승하하니 수가 65 세였다. 소생은 없고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8실에 배향되었으며 능소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에 있는 휘릉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인조의 제1후궁은 폐귀인 조씨로 참판 조익전의 딸이다. 조익전은 영국 보사공신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조씨는 출생년월을 알 수 없으나 1639년(인조 17) 10월 17일에 인조의 5남 숭선군(崇善君) 징(?)을 낳고 이어 6남 낙선군(樂善君) 숙(潚)을 낳았으며 인조의 유일한 딸인 효명옹주를 낳았다. 그런데 뒤에 그 아들 숭선군과 함께 역모를 하여 폐서 인으로 사사되고 아들 숭선군은 유배되었다.
다음 인조의 제2후궁은 소의 장씨인데 소생은 없고 그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제3후궁은 숙의 나씨인데 역시 소생이 없고 묘소는 소의 장씨의 묘와 같이 원당에 있다.
인조대왕 - 시대상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시대상
조선의 제 16대 국왕인 인조는 1623년에 등극한 이래 1649년까지 27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치세 동안에는 다 아는 바와 같이 두 차례의 전란(정묘 · 병자호란)을 겪는 등 이전의 어느 국왕보다 혹독한 시련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또 다시 국가적 전란에 휩싸이고, 마침내 북방의 외적에게 치욕스런 항복까지 하게 되었지만, 인조는 곧 호란의 수습에 진력하였다. 인조의 시대는 이러한 역경을 딛고 왕조의 중흥을 모색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에 앞서 인조는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반정(反正)\'을 단행하여 성공함으로써 제 15대 국왕이었던 광해군을 인륜을 저버린 패륜의 군왕으로 몰아 폐위시키고, 반정에 참여한 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전왕의 실정을 비판하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화하는 분위기에서 정국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하에서 명과 후금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등거리 외교로써 관계를 유지하였던 광해군 때의 외교정책 수행과는 달리 인조조에는 명분론에 입각한 친명배금 정책의 수행으로 급기야는 호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던 것이다.
전쟁의 참담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인조시대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피해 복구와 사회 안정에 노력하는 기운이 활발하였다. 오랑캐에게 당한 굴욕을 설욕하고, 나아가 이제는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의식으로 단결하여 국난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국왕 인조는 조선 왕조를 다시 일으키는 구심점으로서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처하여 민심의 안정에 노력하는 등 존망의 기로에 서 있던 나라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국가 재조(再造)의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 문제를 푸는 데도 일정한 도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이를 당시 국왕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623년 3월 12일 서인 일파가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반정을 성공시켰다. 그리하여 광해군을 축출하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추대하였으며 가담자 가운데 53명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녹훈하였다. 반정의 주도자를 살펴보면, 1620년(광해군 12)부터 이서(李曙) · 신경진이 입안하고 구굉(具宏) · 구인후(具仁텋) 등과 김류(金?) · 이귀(李貴) · 최명길(崔鳴吉)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능양군 종과 정사공신들 대부분은 광해군 때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주변인들로서 대개 하위관인이거나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반정세력의 군사력은 몹시 미약한 상황이었다.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의 군대 약 700여 명이 주력을 이루었던 까닭에 언제 친광해군 군대의 역습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향배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정세력은 거사 직후부터 정인홍 · 이이첨 등 대북세력을 복주(伏誅)하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 재위 15년간 6품 이상의 관직에 있던 약 321명 가운데 127명을 처벌하여 전체의 약 40%에 달하였고 그밖의 인물들은 정계에서 축출되거나 좌천 · 강등되어 이 후 정계에서 대북파는 거의 전멸하였다.
인조대왕 - 시대상 (2)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인조반정의 발생 동기는 대개 광해군 때 대북 일파의 정치운영이 사림세력이 중앙정계를 장악한 이 후 관행적으로 성립되어 왔던 질서를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곧 광해군 때 대북 일파의 독주가 당시 사림 전체의 제반 이해관계에 배치되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애초 대북 일파가 서인이나 남인처럼 대부분이 우계와 율곡, 퇴계(退溪)의 문하(門下)라는 학연적(學緣的) 공통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잡다한 존재기반과 입신(立身) 계기를 지닌 다양한 인물들의 집합체(정인홍계 · 이이첨계 · 기타)였다는 점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이들은 선조 말년의 왕위계승 갈등에서 광해군 편에 서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왕권강화를 내세워 무리한 정책들을 남발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반정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은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 `토목공사(土木工事)\' `뇌물성행(賂物盛行)\' `재조지은(再造之恩) 배신\' 등이었다.
즉위 후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 · 임해군 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관시켰다. 또한,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있어서는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을 내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임명한 데 비하여, 이괄은 2등에 녹공하여 한성판윤, 이어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하자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난을 일으켰다. 이괄의 군세가 자못 강하여 서울이 점령되자, 인조는 공주까지 남천(南遷)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격파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명나라 · 금나라와의 관계를 병존시키는 중립정책을 써왔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 금나라에 대한 태도가 일변하여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으로 바꾸었다.
이에 1627년 후금이 군사 3만여 명으로 침략하여 의주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최명길(崔鳴吉)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을 맺었다. 1636년 12월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청나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10만여 군으로 다시 침입하였다. 혹한속에 질풍같이 쳐들어 온 청군(淸軍)을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 · 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하였다. 그 때 척화파 · 주화파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 : 지금의 松坡)에서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 ·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 자는 청나라측의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청나라 태종은 두 왕자와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를 데리고 철병하고 조정은 환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 이 후 다소 수습된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어, 당시의 사회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낙당(洛黨)의 영수 김자점(金自點)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가 자심하였다. 1645년 오랜 볼모의 생활에서 벗어난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의문의 변사를 당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하지 않고 2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 숙종 때 예론(禮論)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소현세자의 빈(嬪) 강씨(姜氏) 를 사사시켰다. 1624년 총융청(摠戎廳) · 수어청(守禦廳) 등 새로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北防)과 해방(海防)에 유의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던 역(役)과 공물의 미납화(米納化), 즉 대동법을 1623년에 이르러 강원도에 확대, 실시하였으며 점차 지역을 넓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