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대왕 - 시대상 (3)
제 16대조   이름(한글):인조대왕   이름(한자):仁祖大王

또한, 1634년 삼남(三南)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켜 세원(稅源)을 확보하고,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여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주지(主旨)로 하는 영정법(永定法)과 군역(軍役)의 납세화(稅納化)를 실시하였다.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북관(北關)의 회령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하여졌는데, 개시에 있어서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유왕일수(留往日數), 매매총수(買賣總數) 등을 미리 결정하였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하여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孼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하였다. 1628년 벨테브레(Weltevree)가 표착하여 왔는데, 그는 이름을 박연(朴淵 혹은 朴燕)으로 고치고 병자호란 때 훈련대장 구인후(具仁텋) 의 휘하에서 대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지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정두원(鄭斗源)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화포 · 천리경 · 과학서적 · 천주교서적 등을 가지고 왔으며, 특히 소현세자는 샬(Shall,A., 湯若望)과 사귀기도 하였다. 서양의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송인룡(宋仁龍) · 김상범(金尙範) 등이 청나라에서 수입하여, 그 뒤 1653년(효종 4)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학문에도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동사보편(東史補編)>·<서연비람(書筵備覽)> 등 서적을 간행하였고,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김육(金堉) · 김집(金集) 등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재위 5년과 14년에 다시 정묘 · 병자호란을 겪었으니 국왕의 생애로 보면 전쟁과는 불행 한 인연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 후 불과 수십 년만에 다시 전란(戰亂)에 휩쓸리고 급기야는 오랑캐라 부르던 후금(淸나라)에 치욕의 수모를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조를 뒤흔들었던 실로 엄청난 전란에도 불구하고 국난 수습과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새로 태어 나는 조선왕조를 있게 한 분이 바로 인조대왕이었다.
효종대왕 - 생애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생애

 효종대왕(이하 효종이라 함)이 태어나 청 · 장년기에 조선을 다스렸던 17세기는 멀리는 임진왜란, 가깝게는 정묘 ·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전란을 겪은 후 이에 대한 수습으로 왕조적 지배질서의 변화 내지 수정이 요청되어 그러한 노력이 본격화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조선왕조적인 지배 질서의 변화 및 수정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보면 그것은 결국 조선왕조적 지배 질서의 붕괴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 조선왕조적인 지배 질서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적인 지배 질서의 무너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시기는 조선왕조적 지배 질서가 안고 있던 역사적 모순이 본격적으로 또 전면적으로 드러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전쟁 피해의 복 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와 사상은 조선왕조적, 중세적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정안이었다. 따라서 17세기는 좁게는 조선왕조적, 넓게는 중세적 지배 질서가 무너져가던 시기, 그것이 가진 역사 모순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던 시기이며 또 그것을 유지하고 얼버무리려는 제도적, 사상적 노력 등이 나타나고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적, 중세적 지배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신하는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라 볼 수도 있다. 우리 역사상 근대적 사회 내지 근대적 사상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를 대체로 18세기 경이라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이 18세기에 와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하였다고 할 때 17세기가 바로 그런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격심한 전쟁 피해 속에서 종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흔히 근대 지향적이라 하는 실학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 경제적 변화는 아직 미약하기는 하지만 중세적 사회 경제체제를 벗어나는 조짐으로 이해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17세기는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시작되는 세기라 할 수 있다.

 한편, 효종의 치세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에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다. 8년여 동안의 볼모 생활로 말미암아 그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였는데,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뒤 세자로 책봉되어 17대 왕으로 등극하면서 청을 목표에 둔 북벌정책은 효종 치세의 최대 과 제로 연결되어 이에 대한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대민시책에도 주의를 기울여 대동법의 시행 등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였다. 그의 치세동안 계속된 군비 증강은 선왕인 인조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참담한 볼모 생활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더욱 굳건하여진 결심의 소산이었다. 때로는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하여 그의 정책이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고 대외적으로 청나라가 강국으로 부상하는 정세의 변화로 북벌은 끝내 실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의 평화를 준비하는 밑거름을 이루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효종대왕 - 생애 (2)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우리는 양란을 겪은 후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었던 조선 사회를 중세 사회 내에서의 변동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근대를 지향하면서 끊임 없이 변화 발전하는 모습을 세기별로 단층적인 이해 시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왕조사회의 핵심인 국왕과 왕실의 시대 변화에 대한 대응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사회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649년 5월 인조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향년 55세로 승하하자 5일 뒤에 세자가 즉위하였다. 국왕의 이름은 호(淏)이고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바로 제 17대 왕으로서 1649년부터 1659년까지 1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린 효종이다.

 효종은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밤 10시 무렵에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부왕인 인조가 반정을 하기 전에 능양군 시절부터 살던 집이었다. 효종의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라 하였다. 8세 때인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에 봉하여졌다.
 어머니 인열왕후 한씨는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서 인조와 17세에 혼인하여 둘째 아들인 효종을 비롯하여 장자인 소현세자, 3남 인평대군, 4남 용성대군 등 4남을 낳았다. 한씨는 1623년(인조 원년) 30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35년(인조 13) 12월 9일에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하였는데, 이 때 나이는 42세였다. 그 후 1651년(효종 2)에 명덕 정순(明德貞順)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장릉(長陵)이다. 장릉은 인조의 능과 같은 둔덕에 있다. 처음에는 1636년 4월 11일 파주 북쪽 운천리에 장사지냈다가 1731년(영조 7) 8월 30일에 이장하였다.

 효종의 형 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12년(광해군 4)에 태어났으며, 1625년(인조 3) 1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1627년(인조 5)에 16세의 나이로 민회빈(愍懷嬪) 금천강씨(衿川姜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강씨는 우의정 문정공(文靖公) 석기(碩基)의 딸이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아우 인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가서 9년여를 지내다가 1645년(인조 23) 귀국 후 두 달 뒤인 4월 23일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은 복천오씨(福川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오씨는 감사(監司) 증 우의정 단(端)의 딸이다. 인평대군의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이다. 그는 막내 삼촌인 능창대군(綾昌大君)의 양자로 가서 그 뒤를 이었다. 4남 용성대군(龍城大君) 곤(滾)은 어려서 일찍 죽었다.

 효종에게는 이밖에도 이복형제들이 있었는데, 귀인조씨 소생의 2남 1녀가 그들이다. 1남 숭선군(崇善君) 징(?)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참판 증 영의정 익전(翊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숭선군의 시호는 효경공(孝敬公)이다. 2남 낙선군(樂善君) 숙(潚)은 강릉김씨(江陵金氏) 봉사(奉事) 증 영의정 득원(得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낙선군의 시호는 정헌공(靖憲公)인 데 인조의 삼촌인 의창군(義昌君)의 양자로 가서 그 뒤를 이었다. 1녀 효명옹주(孝明翁主)는 11세에 김세룡(金世龍 : 洛城尉)에게 하가(下嫁)했는데, 당쟁의 희생물로 남편이 1651년(효종 2)에 죄를 입어 죽게 되었다. 이에 연루되어 옹주까지도 작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생모인 귀인조씨까지도 폐출되었다.
효종대왕 - 생애 (3)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효종의 누이동생인 효명옹주는 아버지인 인조가 살아있을 때는 유일한 딸로서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그러나 그녀는 훗날 비극적인 생애를 마치게 되는데 이는 왕실에서의 지위와 관련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옹주가 혼례를 치르고 3일째 되는 날, 궁중에서 큰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종실, 외척, 벼슬아치들의 부인에서부터 궁녀들까지, 소위 내 · 외명부들이 다 참예하였다. 이 때 시누이인 효명옹주와 올케인 인평대군 부인이 자리다툼을 하게 된 것이다. 즉 대군부인은
“비록 옹주가 신분이 높다 하더라도 내가 적자의 부인이니 내가 옹주의 오른편에 앉음이 옳다.”
는 것이고, 한편 옹주는 옹주대로
“부왕이 위(位)에 앉아 계시니 왕녀가 위” 라는 주장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한치의 양보가 없이 팽팽하여 결정을 못 짓고 있었는데, 이 말이 대내(大內)에 알려져서 결국 “옹주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
는 판정이 내려왔다. 이 후 인평대군 부인의 친정과 옹주가가 원수지간이 되었으며 낙성위 김세룡이 효종 2년에 희생이 된데에는 이때의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효종은 일곱 딸(6공주에 1옹주)을 두었는데 옛 일을 거울로 삼아 반드시 오씨를 공주네들보다 윗자리에 앉혔다는 것이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기국과 도량이 활달하고 우뚝하게 거인(巨人)의 뜻이 있어 장난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행실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타고난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채소나 과일 같은 하찮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먼저 부모에게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항상 효자라고 칭찬하여 사랑과 기대가 특별히 높았다.
 5세가 되자 글을 배웠는데, 권면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였으며, 다른 아이들이 글읽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권면하여 부지런히 배우게 하였다. 지난 역사에서 제왕(帝王)들의 골육 사이의 변란을 볼 적마다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

 1623년(광해군 15)에 인조가 반정(反正)하였으므로 8세 때인 1626년에 봉작(封爵)을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되었다. 1645년(인조 23) 봄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얼마 안 있어 병을 앓다가 죽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을 지칭하여 이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은 사직(社稷)의 복이라 하면서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여 세자로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경하(慶賀)하였다.
 이 해 9월 27일이 길일이었으므로 유사가 궁의(宮儀)와 장위(仗衛)를 갖추어 잠저(潛邸)에서 맞이하여 인정전 뜰에서 책례(冊禮)를 거행하였으며, 빈궁(嬪宮)은 내정(內庭)에서 책보(冊寶)를 받았다. 다음 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였는데,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박사(博士)의 자리로 나아가 <대학(大學)>을 강하면서 한참 동안 토론하니, 빙 둘러서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효종은 본디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외부(外傅)에 나아가면서부터 학업이 더욱 증진되어 일찍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북행(北行)의 곤경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은 적이 없어 새벽녘까지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에서 글을 읽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 책은 곧 <서전(書傳)>이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흠탄(欽歎)해 마지않았다. 연경에 이르러서는 청나라가 자기들이 노획한 금옥(金玉)과 금수(錦繡)를 나누어 보내주었으 나 효종은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그 대신 우리 나라의 포로를 돌려달라.”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따랐다. 오직 경서와 사서에만 유념할 뿐 그 이외의 특이한 보배와 진기한 재화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효종대왕 - 생애 (4)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동궁에서 덕을 배양하면서 날마다 빈료(賓僚)들을 가까이하여 정사의 여가에는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였다. 그리하여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서전>의 무일편(無逸篇), <시전>의 칠월장(七月章), 옛 잠명(箴銘) 등의 글을 가져다가 병풍에 쓰게 하여 펼쳐 놓고 항상 음미하였다. 효종이 세자로 있은 4년 동안 양궁(兩宮) 사이에 화기가 넘쳤으며,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 토론하였는데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1649년(인조 27) 5월 초에 인조가 매우 위독하자 왕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서 올렸고, 승하함에 이르러서는 맨땅에 거처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에 관한 예절을 아뢰니 왕은 차마 못하겠다는 것으로 거절하였다. 대신과 근신이 다시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삼사가 잇따라 아뢰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한 뒤 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학문에 대해서는 이미 대요(大要)를 습득하였는데 도심(道心)을 지키라는 전교(傳敎)를 받드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근신(謹愼)을 가하여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 하루에 세 번 여는 경연을 부지런히 하여 추위나 더위를 이유로 폐한 적이 없었다. 효종이 즉위한 해인 1649년 10월에 처음 경연에 나아가 <중용(中庸)> 서문을 강하였는데 읽어 가다가 편말(篇末)에 이르러서는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면서 강관(講官)에게도 휘하게 하였 다. 이로부터 안자(顔子) · 증자(曾子) · 자사(子思) · 맹자(孟子) · 정자(程子) · 주자(周子)의 이름을 아울러 휘하였다.

 1650년(효종 원년) 이른 봄에 바야흐로 미령한 증후(症候)가 있어 연신(筵臣)이 우선 경연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효종은,
“경연을 열고 학문을 논란하는 데에서 들을 만한 것이 많다. 그리고 심한 통증이 없는데 어떻게 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며 듣지 않았다. 바로 6월을 당하여서도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임어하니 연신이 과로로 건강이 손상될까 우려하여 또 하루에 한 번씩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자,
“내가 본디 병을 많이 앓아서 겨울철 혹독한 추위에는 사세가 자주 경연을 열기가 어렵겠기에 이런 때에 자주 경연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듣지 않았다. 또 11월에 우선 경연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혹한기가 닥치면 내가 사세를 살펴 조처하겠다. 우선은 자주 품하지 말라.”
하였다.

 효종이 일찍이 <시전>을 강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전>을 정지하고 <서전>을 강하였으니, 택우(宅憂) 때문이었다. 아침과 낮에는 <서전>을 강하고 저녁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연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 대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군신이 서로 만남에 있어 어찌 정례(定例)가 있겠는가. 나는 대신(大臣)과 간신(諫臣)을 모두 경연에 입참하게 하고 싶다. 만나는 것이 드물면 정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하였다.
 <대학연의>을 진강하면서, `이단(異端)을 공부하면\'이라는 장(章)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때에는 석불(釋佛)의 해가 양주(楊朱) · 묵적(墨翟)보다 심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도교(道敎)는 행하지 않았는데 당(唐)나라의 임금은 연단(鍊丹)하다가 죽은 경우도 있다. 송 진종(宋眞宗)은 이미 그것이 그른 것인 줄 알았으면서도 미혹됨을 면치 못했으니, 이 점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왕이 이단(異端)을 싫어하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매월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를 쓰는 것을 시험하는 내용에 불가(佛家)의 용어를 쓰는 것은 정원에 명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효종대왕 - 생애 (5)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효종이 경연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학문을 하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학문의 공효가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걱정은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인주(人主)의 일신은 공격받는 데가 많은 법이어서 더욱 유념해야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우(大禹)의 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먼저 근면과 검소함을 일컬었으니, 순임금이 후세에 전한 교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난리를 겪은 뒤로 상하가 모두 걱정하면서 경황이 없는 중인데 사치를 일삼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우공장(禹貢章)을 강할 때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우임금의 근로(勤勞)가 몸소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창업(創業)한 임금과 견주어 볼 때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임금이 근로한 것만 못합니다.?br>? 하자 왕이 이르기를,
“몸소 수많은 전쟁을 겪은 임금 또한 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에는 그래도 자신을 위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임금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천하에 대해 사심(私心)을 품은 것이 없으니, 이 점이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대학연의>을 강할 때 왕이 이르기를,
“한 선제(漢宣帝)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임금인데도 어찌하여 환관(宦官)에게 추기(樞機)를 맡겼단 말인가. 원제(元帝)가 본디 소망지(蕭望之) 를 소원하게 대하여 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내 석현(石顯)에게 속고 말았다. 소망지의 죽음을 듣고 밥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석현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자 그들의 죄를 바루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일찍이 경연에 임어하여 개탄하기를,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으레 겁이 많다고 하였다. 1637년 토산(兎山)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군졸들이 정예롭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좋은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이광(李廣)은 군중(軍中)에서 밤에 조두(?斗)를 치지 않고 척후병을 멀리 보내어 적정(敵情)을 탐지했다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 장수가 된 자들이 이 점을 전혀 몰랐던 탓으로 신경원(申景瑗)은 이미 잘 싸우지도 못하면서 잘 피하지도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장수들은 진실로 이웃 나라에 견주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문관은 글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예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으로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문 관으로서 무변(武弁)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으레 경시당하기 일쑤이지만 무관으로서 서생(書生)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바야흐로 용납받고 있다. 따라서 무관으로서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광패(狂悖)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 양호(羊祜)나 두예(杜預)처럼 가벼운 갖옷에 느슨한 띠를 맨 사람을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지금 세상에 무관으로 서 서생처럼 생긴 자가 어떻게 전진(戰陣) 사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652년(효종 3) 11월 주강에 다사편(多士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오늘 주강에 임어해서야 더욱 재이(災異)의 경고를 크게 두려워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덕을 밝히고 제사를 삼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를 망치는 길이 하나뿐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에 진실로 이치가 있다. 명(明)나라가 망한 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숭정황제(崇禎皇帝)의 일을 중국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모두들 `밖으로는 유전과 안으로는 원유의 오락이 없었다\'고 했으니, 나라를 망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결국 복망(覆亡)하기에 이른 것 은 명찰(明察)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그 방법을 극진히 하지 못한 것에 연유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논하여 본다면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흥망이야 진실로 논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국사가 이러하니, 끝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몰라 나의 마음이 타는 것만 같다.”
하였다.
효종대왕 - 생애 (6)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1653년(효종 4) 주강에 군진편(君陳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군진(君陳)의 책임이 중대한데도 계고(戒告)한 내용은 단지 효우(孝友)만을 일컬었으니, 사람의 행실 가운데 어찌 이 두 글자에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하고, 고명편(顧命篇)을 강할 때는 명왕(明王)은 항상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고 언급된 대목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임금은 작은 한몸으로 억조 창생의 위에 처하여 있으니 무사(無事)할 때를 당하여서도 어찌 어렵게 여기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서전>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고 했는데, 어찌 옳은 말이 아닌가.”
하였다.
 1654년(효종 5) 봄 저녁에 <대학연의>을 강하였는데, 노기(盧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살해하고 이규(李揆)를 찬출(竄黜)시킨 일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매우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술수를 부린다. 노기가 덕종(德宗)을 어린 아이처럼 여겼는데도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가 혼암(昏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서(史書)를 읽는 것은 장차 이를 거울로 삼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의 군신은 극력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을 보기를 당나라 때 노기가 덕종을 보듯이 하는 일이 없게 해야 된다.”
하였다.

 여름에 <시전> 패풍의 `북문(北門)으로 나아갔다\'는 장(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숨는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수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다고 모두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에 있어 또한 불가한 일인 것 같다. 이는 모두 군신이 마땅히 살펴야 될 곳이다.”
하였다.
 1655년(효종 6) 봄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이 되자 왕이 이르기를,
“숭정황제가 망할 적에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는 사절(死節)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따라 죽은 사람은 내관(內官) 하나뿐이었으니,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명나라의 법제를 살펴보건대 사람으로 하여금 무기를 잡고 시위하게 하고서 신하들이 일을 아뢰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으 면 박살을 내었고, 또 동 · 서창(東西廠)을 설치하여 환관들에게 주관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 소위를 추적하여 보면 나라가 망한 것이 너무 늦었다.”
하였다.

 진풍(秦風)의 황조장(黃鳥章)을 강하는 데 이르러서 왕이 이르기를,
“이 편(篇)을 살펴보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은 자연히 가슴 속에서 발하여지는 것인데, 잔인하게 신하로 하여금 두려워하면서 광중(壙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인정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자기는 죽는 것을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은 기탄없이 죽이는 것이 수십 명이나 되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보화(寶貨)를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 유익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그 때문에 참화(慘禍)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후(呂后)의 무덤이 오욕을 당하고 진황(秦皇)의 무덤이 도 굴당한 것이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는 검약하게 했기 때문에 유독 이런 참화를 당하지 않았고 광무제(光武帝)의 수릉(壽陵) 제도는 겨우 빗물만 흐르게 했을 뿐이니, 어찌 후세에서 법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효종대왕 - 생애 (7)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여름에 칠월편(七月篇)을 강하면서 도교(道敎)의 성함에 대해 논급했는데, 연신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좌교(左敎 : 그릇된 종교, 유교 이외의 종교를 일컬는 말)가 없으니 진실로 흠탄(欽歎)할 만한 일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한 힘인 것이다. 내가 <송사(宋史)>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이항(李沆)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입대(入對)할 적마다 우려스러운 재이(災異)의 일을 극언(極言)하면서 황제가 듣기 싫어해도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자 이항이 말하기를, `황제의 춘추가 한창 왕성하여 지기(志氣)가 방자해지기 쉬운데 만일 걱정스럽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날마다 아뢰어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면 반드시 멋대로 방탕해지는 걱정이 있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했는데, 참으로 훌륭한 말이다. 예로부터 임금은 국가가 평안하고 부유하며 해내(海內)에 걱정이 없게 되면 교만하고 방자하고 음란하게 되어 혹 좌도(左道)에 빠지기도 하고 혹 전공(戰功)을 힘쓰기도 하고 혹 일예(逸豫)에 젖기도 하여 몸도 죽고 나라도 잃은 경우가 비일 비재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에 <시전>의 상체장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우애(友愛)의 정이 극진한 연후에야 군신 부자(君臣父子)가 모두 올바른 도리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붕우(朋友)의 의리에 대해서도 신의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이른바 `후하게 해야 될 데 에다 박하게 하는 사람치고 박하게 해야 될 데에다 후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다\'고 한 것이 또한 이런 뜻인 것이다. 형제 사이에 박하게 하면서 남에게 후하게 할 사람은 있지 않은 것이다. 형제 사이에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을 지성으로 계도(啓導)한다면 어찌 감동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무지하고 완악한 소민(小民)일지라도 본성을 인하여 계도한다면 절로 귀화(歸化)될 것이다. 형제 사이에 서로 쟁송(爭訟)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모두 국가의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까닭인 것이다. 이 어찌 심히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겨울 10월에 주강을 할 때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한 애제(漢哀帝)가 초년(初年)에 중형(重刑)을 행한 것은 선제(宣帝)가 한 것을 본받아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그런 경우 그와 똑같은 재능은 없으면서 그가 한 일을 본받아서 하면 애제의 꼴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하였다. 연신이 또 장량(張良)이 홍구(鴻溝)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논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론(士論)은 곧 만세에 변치 않는 경상(經常)의 도리인데, 유자(儒者)의 기상(氣象)에 의거하여 장량에게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추기를 책임지우려 하기 때문에 불의(不義)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장량의 뜻은 오직 원수를 갚는 데에만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상도(常道)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의리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줄 모른다.”
하였다.
효종대왕 - 생애 (8)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범증(范增)의 일을 논하는 데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항우(項羽)의 공을 도와 이루려 하였으니 의제(義帝)를 어떤 위치에 두려는 것인가? 마침내 강중(江中)의 추악한 이야기를 남김으로써 흰 옷을 입고 조문(吊問)하는 군대를 일으키게 했으니, 이는 한왕(漢王)이 천하를 낚을 수 있는 미끼를 만들어 준 것이다. 따라서 범증은 그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왕이 국을 나누어 달라고 한 이야기 같은 것은 차마 입으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천하에 군림(君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론이 송(宋)나라에 언급되자 왕이 이르기를,
“만고에 가장 애석한 것으론 송 고종(宋高宗) 같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악비(岳飛) 같은 장군이 있었는데도 기용하지 못했으니, 이것만도 이미 잘못이다. 그런데 또 어찌하여 기필코 살해하기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단 말인가.”
했는데, 임금의 말은 너무도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윤길보(尹吉甫)의 일을 논하자 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한 세상에 인재를 내는 것은 한 세상의 일에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후세에 또한 한 세상에 쓰일 길보 같은 이가 혹 있게 될 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내정(內政)이 잘 닦여진 뒤에야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니, 지금의 급선무는 인심을 얻는 데 요점이 있다.”
하였다.

 1656년(효종 7) 정월에 <시전>의 백구장(白駒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그 주어(註語)를 읽으면서 이르기를,
“이 주가 참으로 타당하다. 예로부터 군신(君臣) 사이는 뜻이 잘 맞기가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한신(韓信)이 초(楚)나라 사자(使者)의 유세에 대해서도 한 고조(漢高祖)가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세우면 따라준다는 등의 말로 거절하였다. 과연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세우면 따라준다면 어진이가 어찌 떠나고 싶어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학명장(鶴鳴章)의 주에 부드럽고 윤기 있는 옥(玉)과 거칠고 껄끄러운 돌이라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이 말이 가장 절실하다. 중인(中人)의 성품은 환란을 당한 뒤에야 마음을 감동시켜 하고 싶은 기욕을 참아 내면서 자신이 잘하지 못한 점을 증익(增益)시키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나면 또한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만일 재이를 만나 삼가 두려워하기만 하고 하나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른에게 꾸지람을 받고서 두려워 위축될 뿐인 것과 같으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은 뒤에라야 꾸지람에 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순서에 따라 점차로 행하여 가면서 유념하여 중지하지 않는다면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언자(言者)들은 혹 하루 아침에 갑자기 큰 사업을 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는 결코 성취될 리가 없다.”
하였다.

 조강 · 주강 · 석강 이외에 수시로 다시 야대(夜對)를 하였는데, 간혹 체후가 미령하여 정전(正殿)에 나아가지 못할 경우이거나 혹 입시한 관원이 고르지 못할 경우에는 또한 때때로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였다.
 3월에 소대하여 <대학연의>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소인(小人)은 혼암한 임금을 만나면 은폐와 기만을 멋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명(英明)한 임금의 경우에도 혹 참언(讒言)에 미혹되었으니, 참언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서서히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호소인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은 매사에 반드시 광명 정대하게 해야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참언이 들어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晋)나라의 제왕(齊王) 유(攸)는 바로 아우인데, 혜제(惠帝)의 혼암하고 용렬함이 만고에 견줄 데가 없을 정도였고 보면, 무제(武帝)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아우에게 물려주었어도 실로 종사(宗社)의 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언을 믿고 도리어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 끝내는 골육상 잔(骨肉相殘)의 비극을 연출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나라가 스스로 망하기를 재촉한 것이다”
하였다.
효종대왕 - 생애 (9)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1657년(효종 8) 10월 <심경(心經)>을 진강했는데, 왕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본원이 맑아져 인욕(人欲)이 다소곳해지면 도심(道心)이 자연히 배양될 것이다. 만일 이욕(利慾)에 얽매인다면 어떻게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재(主宰)이고 경(敬)은 또 일심(一心)의 주재인 것이다. 만약 함양하는 공부가 없다면 어떻게 만선(萬善)의 주재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敬義)를 내외(內外)로 늘 간직하면 이 마음을 잠시 놓아두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정일(精一)에 대한 이야기가 요순(堯舜)에게서 나왔지만 요순 이전에 이미 이런 의리가 있었던 것이고, 경(敬)의 의리에 대한 이야기가 공자(孔子)에게서 나왔으나 공자 이전에 이미 이런 도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1658년(효종 9) 봄 왕이 경연에 참여한 관리에게 이르기를,
“근래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영종(寧宗) · 광종(光宗) 두 임금의 일은 참으로 통분스러웠다. 부자(父子) 사이의 천륜을 멸절(滅絶)시킨 것이 저와 같았으니, 송나라가 망한 것은 여기에서 그 기초가 조성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당시의 국사는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는데 위학(僞學)이라는 두 글자가 선류(善類)들을 일망 타진하는 법문이 되었으니, 말하기도 참혹하다.”
하고 연신에게 이르기를,
“소인은 진실로 슬기로운 자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자신도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간사한 짓을 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결국 나라가 망함에 따라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인데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송(宋)나라의 가사도(賈似道) · 한탁주 같은 자들은 흉계를 멋대로 부리다가 악이 차게 되어 국사를 그르쳤는데 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친족이 먼저 주멸되었으니, 그들의 계교가 교묘한 것 같 지만 실은 매우 졸렬한 것이다. 송나라 때에 또 주자(朱子)를 참(斬)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예로부터 소인이 기필코 어진이를 해치려는 마음을 먹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아, 또한 참혹한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송나라에서 도학(道學)을 금한 것이 사죄율(死罪律)과 다름이 없었으니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원(元)나라는 비록 이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도학을 숭상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포로 들 가운데 유사(儒士)의 부류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석방하여 존대하였다. 그리하여 대성문선왕(大聖文宣王)이라는 호칭을 공성(孔聖)에게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성인을 존숭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이를 만하다. 송나라는 중국(中國)이면서도 도학을 금한 것이 저와 같았고 원나라는 이적(夷狄)이면서도 도학을 숭상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남송(南宋)의 일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고종(高宗)이 악비(岳飛) · 한세충(韓世忠)이 생존해 있을 적에 본토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그들이 죽은 뒤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효종(孝宗) 이후로는 일시적인 평안함만 추구한 지가 오래되어 상하가 태연스럽게 지냈으니 어떻게 분발하여 흥복(興復)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