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대왕 - 생애 (6)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한번은 능침(陵寢)을 참배하는데 벼를 수확하기 전의 절기였다. 현종은 영을 내려 이르기를,
“나를 수행하는 신하들과 상장(廂將)이 경유하는 곳에 만일 풀 한 포기라도 손상하였을 경우 금령을 범한 견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행차가 지날 적에 또 점검해 보게 하였다.
 온천에 거둥할 때에도 이르기를,
“도로를 정비하되 가마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정비하고 혹시라도 도로를 넓게 확장하여 백성의 전지에 손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이 집을 비워 수행한 관원을 거처하게 하고 스스로는 한데에 거처한 것을 보고는 매우 불쌍히 여겨, 쌀과 콩을 주어 호구(糊口)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온천에서 돌아오는 측근의 신하가 있었다. 그에게
“벼가 손상된 곳이 있던가?”
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의장(儀仗)을 설치하였던 근처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습니다.”
하자, 댓가를 넉넉하게 보상하라고 명하였다. 그 불쌍하게 여기고 근심하고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팔도의 군안(軍案)을 조사하여 어린아이 및 죽은 사람 2만 명이 납부해야 할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베를 내리고, 또 상평창(常平倉)의 은 · 베와 감영 · 병영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내외(內外)의 비용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본디 호구의 부세(賦稅)가 없고 다만 군졸이 납부한 베로 경상의 비용으 로 써 왔는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현종은 폐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고 갑인년에 대간의 말을 채용하여 바야흐로 크게 변통해 영원한 제도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 일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가 다른데 비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왔다. 현종이 특별히 내수사의 공부(貢賦)를 감하되 아울러 고루 감해주게 하였다. 내수사의 재물 용도가 이로 인하여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나 현종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조(先朝)에서 호남 · 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부세를 고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호남의 산간 고을에서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그 공적의 뒤를 이어서 더욱 구별 획정(劃定)하여 두루 시행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왕가(王家)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궁중이 엄숙하였고 안팎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재신(宰臣)과 간신(諫臣)이 일찍이 왕가의 일가붙이와 궁중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실과 틀린 것이 있었다. 현종은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사람들의 말 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한 말이 사실과 틀렸다 하더라도 들은 바를 다 아뢰었을 뿐이니, 혐의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장번내관(長番內官)이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갈 때에 외방에 폐해를 끼쳤는데, 내관을 꾸짖어 파면하고, 이를 알고서 아뢰지 않았다 하여 그 도의 감사를 특별히 추고하였다.
 현종의 성품은 독실함을 좋아하고 명예에 가까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좋은 일을 행하였을 때 혹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면 매우 싫어하므로 시종의 신하가 그 뜻을 알고 감히 외부에 퍼뜨리지 않았다. 검소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한번은 병이 들어 신료를 대내(大內)에서 접견하였는데 방안에 깔아놓은 자리 가 매우 낡았으나 바꾸지 않았다. 신료들이 물러나와서 감탄하였다.
현종대왕 - 생애 (7)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현종은 정대한 학문에 마음을 두고 이단(異端)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미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고 사찰에 있는 모든 선왕의 어판(御板)도 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일찍이 이르기를, “음사(淫祀)가 도움은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어리석은 여염의 지아비와 아낙네는 본디 책망할 것조차 없지만 사대부의 집안도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어판이란 승가(僧家)에서 부처에게 물건 · 음식 등을 공양할 때에 어좌(御坐)를 죽 써 놓은 것인데 이것은 부처를 모시고 같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전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또한 현종은 학교를 매우 중시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경서(經書)를 찍어 중외에 반포하였으며, 또 성균관(成均館)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의 잘못된 자획(字劃)과 음의(音義)를 일체 모두 바로잡아 사방의 학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뜻하지 않은 일에 경계심을 가져 군정(軍政)을 닦게 하고 장신(將臣)을 접견하여 이야기할 적에 피곤함을 잊었다. 혹은 원유(苑츉)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기도 하고, 혹은 거둥을 인하여 군사를 사열하기도 하였는데, 행진(行陣)하는 법과 병갑(兵甲)의 제도를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및 <연병실기(練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즉시 반포하여 연습하게 하였다.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새로 설치하고 또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여 병조 판서가 대장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예롭고 용맹한 군사를 양성하고 양식과 기계를 비축하여 위급할 때에 대비토록 하려 는 것이었다. 또 어사를 파견하여 호남 · 호서 · 영남 3도 및 제주를 순무(巡撫)하고, 해안의 방비를 자세히 살피고 수군(水軍)을 정돈하려 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평상시에 군사(軍事)를 수치(修治)하는 데에 뜻을 두고 무비(武備)를 잊지 않았는데 이는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려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신기(神機)를 묵묵 히 운용하여 천하의 변천을 조용히 살펴보면서 선왕의 뜻을 소술(紹述)하려는 것이었다.

 대신(臺臣)이 일찍이 필요치 않은 군사를 혁파하지 않는다고 간하자, 현종은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내 뜻이 국가를 위망(危亡)의 형세에 두고 다만 군사를 일삼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측근의 신하들과 같이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고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사세가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이 어리고 덕은 없지만 조종(祖宗)과 부형의 백대 원수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북쪽 변방의 수령들은 무관이었으므로 탐욕하고 방종하였다. 다시 병마평사(兵馬評事)의 제도를 설치하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郞官)과 옥당의 관원을 임명해 보내어 그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작고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북방에서 공로가 있었는데, 관찰사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품계를 올려 좌찬성을 추증하게 하고 같은 시대 남 · 북도(南北道)의 의사(義士) 20명에게 모두 포상하라고 명하니, 함경도 한 지방이 격려되었다.
현종대왕 - 생애 (8)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왜국 사신이 올 적에도 반드시 측근의 신하를 엄선하여 국경에서 맞아 위로하게 하되 그들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였다. 왜국 사신이 웅천(熊川)에다 왜관(倭館)을 옮기겠다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내지(內地)에 옮김으로써 후일의 근심을 끼칠까 염려한 것이었다.
 현종은 옥사를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처결하였다. 매양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는 곧 승지로 하여금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일찍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긴급한 죄수를 곧바로 처결하게 하되, 비 록 하루에 재차 복심(覆審)하게 되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일찍이 이르기를,
“사형수를 세 차례 복심하게 하는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이려 하고 마땅히 죽지 않아야 할 자는 반드시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곧 그 본의이다.”
하였다. 또 추운 철에 오래 갇혀 있는 것을 염려하여 양식과 동옷(남자가 입는 저고리)을 주라고 명하였다.

 현종은 평소 병환이 있었으나 정사의 처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병이 조금 나으면 항상 승지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내직과 외직에 결원이 생기면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차임하여 충원하게 하고 며칠을 지체한 적이 없었는데, 대개 직무가 중지되어 백성에게 폐단이 미칠까 염려한 것이다.
 1674년(현종 15)에 대비(大妃)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였다. 왕이 항상 부왕(父王)을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다가 또 모비(母妃)를 오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거친 밥을 들고 맹물을 마시며 슬퍼함이 예절에 지나쳤다. 신하들의 굳이 간하며 권도를 따르시라는 청을 억지로 부응하기는 하였으나, 음식을 대할 적마다 울먹이며 스스로 감내하지 못 하였다. 무릇 장사나 제사에 드는 물품과 예로 섬기는 절차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는데, 이때 와서 창경궁(昌慶宮)에 반우(返虞)하고 현종도 옛 거처로 돌아갔다. 사물이 눈에 부딪힐 적마다 감회가 복받쳐 슬픔 이 더욱 간절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잠시도 슬픔을 잊지 못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되어 슬퍼하였다.

 혼전(魂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일체 평소처럼 하였고 철따라 나는 음식물을 올리는 것이 산릉(山陵)에 잇따랐는데, 전(奠)을 드릴 적에는 반드시 친히 점검하고 감독하여 올렸다. 기일 하루 전에 친히 살펴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정결 여부에 대해 물어보고 이튿날 아침에 또 연달아 물어 보았다. 현종은 병이 위독할 적에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곡식을 해치는 바람이 아닌가. 내가 어찌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임종 전까지 이처럼 열렬하였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숙성함을 타고나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효도를 다하여 증자(曾子) · 민자(閔子)의 덕행이 있었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쓰고 조상의 사업과 뜻을 잇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대비인 인선왕후 장씨 및 대왕대비 장렬왕후 조씨에게 효성을 다해 섬겨 비평하는 말이 없었고, 기쁘고 화락한 얼굴빛과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양전(兩殿)이 기뻐하고 궁중 에 화기가 넘쳐 흘렀다.
현종대왕 - 생애 (9)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대왕대비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슬퍼하다가 병이 위급하자, 현종은 뜨락의 한데에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을 묻고, 손수 약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올리니, 이 말을 듣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 통명전(通明殿)에서 거처하였는데, 현종의 거처와 조금 떨어져 있자 왕대비를 위해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 모시려 하였다. 집상전이 완성되기 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옮겨 거처하기를 청하고 자신은 부근의 별실(別室)에 거처하여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비가 묵은 병이 있었는데 현종은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그 마음을 위로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매양 곁에 있으니 병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 같다.” 하였 다.

 일찍이 대왕대비를 모시고 남군(南郡)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이 때 현종은 도내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었다. 환궁하여 또 조정과 종친에게 은전을 베풀고 제도(諸道)에까지 똑같이 행하였다. 이는 대개 내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노인을 존경하는 은혜[老老之恩]를 미루어 시행한 것이다.
 세시(歲時)에 항상 부로(父老)들을 위문하고 혹은 달마다 늠료(쬎料)를 주기도 하였으며 재신에게는 달마다 쌀과 고기를 계속 보내 주었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그가 먼저 죽자, 특별히 명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늠료를 주게 하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중에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면 왕은 윤허하지 않고 쌀 · 고기 · 옷감들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주군(州郡)의 수령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곧 허락해 주고, 혹 그 사람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 아까우면 특별히 쌀과 베를 주었는데, 그 효도로 다스림이 이와 같았다.

 8월 7일에 다시 재신(宰臣)을 불러 빈청에 모이게 하고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8일에 좌의정 김수항을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애써 유시하였고 이날 저녁에 창덕궁(昌德宮)의 재려(齎廬)에서 승하하니 춘추 겨우 34세였고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공덕을 논의한 끝에 시호를 `순문 숙무 경인 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라 올리고, 묘호는 `현종(顯宗)\'이라 하였으며 그 해 12월 13일 임인에 숭릉(崇陵)에다 장례를 모셨다.

 중궁(中宮)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1634년(인조 12) 5월 17일에 장통방 사제에서 태어났고, 1651년(효종 2)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어의동 본궁에서 행하였으며 1659년(현종 즉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2년에 존호를 현렬(顯烈) 이라 올렸다. 숙종 9년 12월 5일에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에서 승하하였다. 나이 42세였다. 다음 해 4월 숭릉에 합장하였다.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왕(嗣王) 숙종(肅宗)이다. 큰 따님은 명선공주(明善公主)이고, 다음 따님은 명혜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 따님은 명안공주(明安公主)인데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했다.
현종대왕 - 생애 (10)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현종에게는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사랑하였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좋은 음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근심하여 문병으로 보내는 사람과 약을 가지고 가게 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 죽었을 경우에는 비통해 마지않았다. 신하들의 상소에 죄없이 복창군(福昌君) 정(楨)의 형제를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였다.

 소현세자의 딸이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출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사랑이 여러 부마(駙馬)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여 선왕께서 시종 한결같이 하신 뜻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족과 매우 화목하여 곡진한 은혜의 뜻이 있었고, 친분을 헤아려 돌보아 주어 끊임이 없었다. 현종은 귀척(貴戚)에게 대우를 융숭히 하였으나 사정에 흔들려 공사를 해친 적이 없었다.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한 번이라도 법을 범하여 방종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법 으로 통렬히 다스렸다.
현종대왕 - 시대상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시대상

 효종에 이어 현종의 치세는 두가지 면에서 주목된다. 하나는 소위 예송(禮訟)으로 불리는 복제를 둘러싼 당쟁이 일어났고 또다른 것은 소위 소빙기적 특징이 있어 기근과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정치권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왕조의 노력과 왕의 덕치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선조조부터 일기 시작한 붕당의 활동은 효종의 상에 효종의 모비인 조대비 즉 장렬왕후 조씨의 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새로운 명분의 단초를 열고 있었다. 이 때 대왕대비가 효종을 위해 입는 복을 결정하는 논의가 일게 되었다. 그것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 · 송준길 · 유계 등이 복제를 의논해 정하면서 `대왕대비가 효종을 위해 입는 복은 서자(庶子)를 위해 입는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외부의 의논이 자못 시끄러웠는데 그 의논에,
“대왕대비가 대행대왕(大行大王)에게는 왕통을 계승한 지존(至尊)의 복을 입어 주어야지 최복(衰服)으로만 제정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의논을 수렴하게 되자, 송시열이 또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국제(國制)의 설을 빌어다가 논설을 세웠으므로 기년의 복제가 드디어 행해졌다. 그러나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제도는 <대명률(大明律)>과 국조의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실로 사서인에 대한 제도의 법이고 왕조에 대한 전례(典禮)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뭇 의논이 더욱 불평하였다.

 효종 상이 기년이 되자, 전 장령 허목(許穆)이 소를 올려 `기년복은 옳은 복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 중 `둘째 아들을 장자로 세운 경우 삼년복을 입는다\'는 조문을 인용하여 송시열의 설을 깨뜨렸다. 이 때 조정에서 허목의 말을 옳게 여긴 이가 많이 있었다.
현종대왕 - 시대상 (2)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사건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자세히 전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 등이 실로 상례를 주관하였는데, 대왕대비에게 대행대왕을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였다. 이는 대개 <의례(儀禮)> 주소(注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더라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 다[雖承重不得爲三年者有四種]\'는 설을 채용한 것이다. 성복(成服)하기 전에 송시열이 이에 대해 포의(布衣)인 윤휴에게 물으니, 윤휴가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 · 외종(外宗)이 모두 참최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는 문구가 있으며, 또 제왕가(帝王家)는 종통을 중시하고 있으니, 네 가지 설[四種說]은 아마도 쓸 수가 없 을 듯하다”
라고 하였으나, 송시열이 따르지 않았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삼년의 설을 옳게 여겨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보고하고 그 설을 따르려 하였으나, 송시열이 이미 사종 설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말하기를,
“국제(國制)에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장자나 서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의 의논도 모두 송시열의 뜻과 같으므로 마침내 기년의 복제가 행해졌다.

 이듬해 4월 효종의 소상에 전 장령 허목이 상소하여, 대왕대비가 효종에게 기년복을 입어 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하고, <의례> 가공언의 소(疏)에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도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取嫡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 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또 아뢰기를,
“소현이 이미 세상을 일찍 떠났고, 효종께서 인조 대왕의 둘째 아들로 종묘를 이었으니 대비께서 효종을 위해 자최 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함은 예(禮)로 볼 때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體而不正不得爲三年]\'는 것으로 비교하였으니, 신은 그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현종이 그 소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에서는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난점을 제기하 면서 어물어물 결정하지 못하고,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예종(睿宗)을 위해 입은 복제(服制)를 <실록(實錄)>에서 고증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가령 어떤 집안에 10여 명의 아들이 있는데 전중(傳重)한 다음 잇따라 죽을 경우 모두 참최복을 입어 주어야 합니까? 주소(註疏)에 이미 둘째 아들부터는 서자(庶子)가 된다는 의의를 분명히 말하였는데, 허목은 꼭 첩의 아들이라고 하니, 예의 뜻이 과연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의논은 이르기를 `제왕가(帝王家)는 왕통(王統)을 잇는 것을 소중히 여기므로 태상황(太上皇)이 사군(嗣君)을 위해서는 비록 지자(支子)로서 입승(入承)하였다 하더라도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정체이든 정체(正體)가 아니든 모두 삼년복을 입어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은 기년 복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극력 말하고 또 <예경(禮經)>의 장자(長子) · 서자(庶子)의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서자라는 칭호는 물론 첩의 아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임금의 아우[母弟]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대왕이 인조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지장이 없습니다. 옛날에도 물론 적자(嫡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운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에는 반드시 장자와 서자의 구별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설은 물론 가공언의 소에 있고, 황면재(黃勉齋)의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감정(勘定)을 거치지 않았으니 그 설이 과연 허목이 말한 바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연양부원군 이시백,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병 때문에 의논을 개진하지 못하였다. 사관이 강화(江華)의 <실록(實錄)>을 고증하여 아뢰기를,
“예종이 승하하였을 때에 정희왕후가 어떤 복을 입었는지 고증할 수 없고, 기년(朞年)도 못 되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복을 벗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3)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현종 원년 4월에 부호군(副護軍)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복제를 논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한 왕자의 정통성을 복제에 근거하여 격렬이 논박하였다. 그 대략에

“성인이 상례(喪禮)를 오복(五服)으로 제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습니까. 친소(親疎)와 후박(厚薄)을 이것이 아니면 구별할 수 없으며, 경중(輕重)과 대소(大小)를 이것이 아니면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이를 사용하면 부자의 윤기가 밝아지고, 국가에서 이를 사용하면 군신이 분의(分義)가 엄해지며,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종묘와 사직의 보존과 망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으니, 이게 바로 막중 막대해서 터럭만큼도 참람(?濫)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통(嫡統)을 계승한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적자(嫡子)에게 반드시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도록 복제를 만든 것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적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사가(私家)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의 태평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위태롭고 어지러운 말세의 때이겠습니까. 신민의 마음을 정하고 불만을 품은 자들이 넘보는 것을 끊는 것이 이 상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소유한 자가 이 예에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효종의 상에 대왕대비전의 복제는 <예경(禮經)>을 고증해 보면 자최 삼년(齊衰三年)으로 정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당초 예관(禮官)의 의주(儀註)에 기년복으로 정하였으므로 조야(朝野)의 신민 중에 유식한 이는 모두 놀라고 탄식하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대통(大統)을 밝히어 백성의 뜻을 정하고 종사를 튼튼히 하는 예라고 하겠습니까. 이야말로 곧바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연기(練期)가 임박하였으나 적적하게도 국가를 위해 이 말을 올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신이 평소 깊이 생각해 볼 때 종사에 대한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전 장령 허목이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소 한 장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 신은 자신도 모르게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의 말은 예를 의논하는 대경(大經)일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를 경영하는 지극한 계책이니, 말을 듣지 않으실 경우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곧바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거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할 터인 데 송시열에게 다시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송시열 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 `만일 기명언(奇明彦)이 아니었다면 천고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라 고 한 것 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나쁜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고 허물을 숨기려는 심산으로, <예경>의 글귀를 주워모아 자기의 의견에다 뜯어 맞추었으므로 그 사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경>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참최복 을 입어 주는 것은 오직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 데 있고 성인이 이 예를 엄하게 하는 것 은 다만 종묘의 계통을 잇는 데에 있다는 큰 뜻에 대해, 종시 견해가 미치지 않았고 언급되 지도 않았습니다. 신은 실로 그 말에 복종하지 못하겠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종대왕 - 시대상 (4)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아, 선조(先朝) 때부터 신임하여 위임한 이로는 송시열 · 송준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일생 동안 강구(講究)한 바는 예학이었고 자기들도 이를 맡을 만하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만,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 이처럼 소견이 빗나갔는데, 더구나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와 나라를 튼튼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펼치는 계책을 같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대왕대비의 복제는 마땅히 삼년으로 의주(儀註)를 고친 다음 팔방에 알려, 대소의 신민으로 하여금 조정의 의논이 이의(異意)가 없음을 환하게 알도록 함으로써 명분을 바르게 하고 국시를 정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터전 위에 올려 놓아야 하며, 기년(朞年)만에 복을 벗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되고, 삼년상으로 정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러한 윤선도의 주장은 왕실의 계승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여겨져 부제학 유계(兪棨), 부교리 안후열(安後說), 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은 윤선도의 말이 흉악하고 참혹하므로 그의 소를 불태우고 먼 변방으로 내쫓자고 청하였다. 이에 윤선도가 삼수(三水)로 귀양가고 말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혜(李?)등은 소를 올려 국가의 형벌을 바르게 시행할 것을 청하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정언 권격(權格),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 · 정수(鄭脩) 등은 엄히 국문하여 율(律)에 비추어 죄를 정하자고 누차 아뢰었으나, 왕이 따르지 않고 다만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결국 서인들의 정치적 공세로 함경도 삼수부로 귀양갔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여, 윤선도를 율에 비추어 죄를 정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극구 말하고, 또 아뢰기를,
“대왕대비께서 오늘날의 상에 삼년복을 입어야 함은 필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지금 비록 의리로 헤아려 제정한다 하더라도 백세토록 질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른바 `선왕은 서자가 되어도 지장이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윤선도는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였으니 그 또한 과감히 말하는 선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격렬해 져서 `죄없는 선비를 죽인다\'라고 한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었 습니다.”
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가상히 받아들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를 올려, 당초 기년의 복제를 따른 것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나열하고, 대신 · 유신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마침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기년복제의 잘못에 대해 소를 올려 논하면서 심지어 `종사를 편히 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하라\'고 말하고 또 송시열이 어질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조정 의논이 발칵 뒤집혀 서로 편당을 지어 배척하였다.

 이 때 승지 이유태(李惟泰)가 마침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와서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사림(士林)에게 화를 전가하려 한다.”
고 말하고, 송시열도 의논 수렴에서 허목의 설이 옳지 아니함을 크게 지척하고, 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 자유(子游)가 최 복(衰服)을 입었다는 말을 인용하여 그 뜻을 거듭 밝혔다. 이에 허목의 설이 드디어 행해지지 못하고 윤선도는 귀양갔다. 우윤 권시 또한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다가 죄를 얻었다.
현종대왕 - 시대상 (5)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얼마 뒤에 원두표가 또 차자를 올려 `제후(諸侯)가 종통을 빼앗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고 또 다시 복제에 대해 이유태 · 윤선거(尹宣擧) · 심광수(沈光洙) · 허후(許厚) · 윤휴(尹?) 등에게 물어보자고 청하였다. 윤선거는 외방에 있었고, 허후의 의논은 가부가 없었고, 이유태는 기년복제의 의논을 따랐고, 심광수는 종통의 의논을 따랐으며, 윤휴는 `오직 그 인심에 의거하면 대강(大綱)에 관계되고 선왕(先王)에게 어그러짐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으며,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은 국가의 전례로 말하였다. 왕이 다수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니 기년의 복제가 마침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부사 조경, 수찬 홍우원(洪宇遠), 전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모두 소를 올려 윤선도와 권시를 구원하고 또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논하니, 대간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혹은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혹은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뒤에 무릇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간사한 사람과 편당을 짓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였다\'고 지목하였으므로 벼슬에 제수되지 않은 지가 거의 10여 년이나 되었다.

 조대비의 복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현종 15년 2월 왕대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게 되자, 재연되었다.
 처음에는 예조판서 조형(趙珩)이 기년복으로 정하였는데 조정(서인)의 의논이 다시 대공(9월복)으로 고치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7월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인선왕후의 복제에 대해 논하기를,
“대왕대비께서 마땅히 맏며느리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국가의 복제는 도리어 중서부(衆庶婦)의 복을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였으니,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윤기를 전도시킴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정원이 여러 차례 기각하였는데 오래 있다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에 수일만에 왕이 대신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기해년의 복제는 대개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지금 대공복이 기해년의 복제와 같은지의 여부를 아울러 상고해 내되 `원임 대신, 육경(六卿), 정부의 동 · 서벽(東西壁), 판윤(判尹), 삼사의 장관이 모여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드디어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기해년에 수렴한 의논을 상고해 내어 들였다. 왕이 이르기를,
“만일 등록(謄錄)만 상고해 내고 말려고 하였다면 하필 대신 · 육조 · 삼사의 장관에게 회의하도록 하였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판서 이은상(李殷相), 한성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참판 이준구(李俊耉), 예조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洪萬宗)이 같은 사연으로 대답하기를,
“옛날 기해년에 신하들이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 용해 기년복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전(大典)>의 복제를 다시 상고해 보니, 다만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라고 말하였을 뿐이고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지금 복제를 의논해 정하는 날에 해조에서 바로 부표(付標)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