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대왕 - 시대상 (6)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왕이 다시 하교하기를,
“계사(啓辭)가 분명하지 못하다. 대왕대비께서 오늘날 기년복과 9월복에 어느 복을 입어야 하는지 왜 귀결처가 없단 말인가?”
하자, 영의정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오늘은 다만 기해년의 복제를 의논하였을 뿐이고, 대왕대비께서 대비에게 어떤 복을 입어야 될지에 대해서는 감히 가벼이 먼저 의논해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또 탑전에 불러들여,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의도를 힐문하니, 김수흥이 황공하여 사죄하고 글로 써서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드디어 나가 빈청의 신하들과 재차 계사를 올리기를,
“<대전>에서 복제를 상고해 보니 장자(長子)의 아내에게 기년복을 입어주고 중자(衆子)의 아내에게는 대공복을 입어준다고 하였을 뿐 승중(承重)의 여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대공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사체가 중대하므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장순왕후(章順王后)의 상에서와, 소혜왕후(昭惠王后)가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상에서 반드시 이미 행한 제도가 있을 것이니,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상고해 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실록>이 강도(江都)에 있어 상고해 내기 쉽지 않다 하여 다시 모여 의논을 드린 뒤에 <실록>을 상고해 내게 하였다. 김수항 · 김수흥 등이 또 `<경국대전>에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복은 모두 기년으로 되어 있다\'라고 대답하면서 아뢰기를,
“만일 차례로 논한다면 저절로 장자 · 중자의 구별이 있습니다만, 중자가 왕통을 계승할 경우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조문은 국가의 법전에 뚜렷이 나타난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복제는 국가의 법전 이외에는 억견(臆見)으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 복제를 의논해 정할 때에 장자 · 중자에 대한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감히 대공의 설을 말한단 말인가? <대전>의 오복조(五服條)에 왕통 계승에 관한 조항이 없는 것은, 비록 시왕(時王)이 제정한 예라 할지라도 이게 곧 미비한 점이다. 시왕이 제정한 예라고 핑계대고 <예경(禮經)>을 참고하지 않으니 오늘 회의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빈청에서 재차 계사를 올려, <의례(儀禮)> 주소(註疏)의 4종 중에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니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법전이 <예경(禮經)>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현종은 승지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의례> 경전(經傳)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父爲長子]\'는 조목의 주소(注疏)를 문단마다 해석하여 들이게 하였다. 이튿날 재차 올린 계사에 답하기를,
“계사가 터무니없어 나도 모르게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감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설로 오늘날의 예율을 삼고 있다. <예경> 주석 중의 `서자(庶子)라고 한 것은 장자와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는 설은, `4종(種)은 삼년복이 될 수가 없다\'는 문귀와 관통되지 않는다.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이미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우는데 이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 하였으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이처럼 이치에 가깝지 않은 어긋난 말을 예율로 정하여 선왕을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임금을 박하게 대우하였다고 하겠는데, 누구에게 후하게 하려고 한 것인가? 막중한 예를 의탁한 논의를 가지고 정제(定制)라고 결단할 수 없으니 당초에 마련한 국가의 제도에 따라 정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7)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또 정원에 전교하여, 기년으로 고쳐 표지를 붙이게 하고, 예관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였다. 예조판서 조형(趙珩), 예조참판 김익경(金益炅), 예조참의 홍주국(洪柱國) 등을 모두 하옥하고 대공(大功)의 복제를 고쳐 기년으로 정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신의 직책은 문서를 봉행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큰 일에 임하여 지조를 변하지 않아야만 곧 임금을 보좌하여 나랏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영의정 김수흥이 오늘날 복제에 관해 회의할 때 감히 수많은 어지러운 논설로 아뢰었으나 끝내 귀결처가 없었다. 혹은 인용해서는 안 될 고례(古例)를 인용하기도 하고, 혹은 국가의 법전 몇 마디 말로 책임이나 때웠는가 하면 마침내 두서도 없고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말을 주창하였으니, 선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논의에 빌붙은 그의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 하였다.
승지 이단석(李端錫), 사헌부의 이광적(李光迪) · 류지발(柳之發) · 송창(宋昌) · 정창도(丁昌道) · 김빈(金賓), 사간원의 이혜(李?) · 송창(宋昌), 옥당의 조근(趙根) · 권유(權愈) 등이, 예관을 나국하라는 것과 김수흥(金壽興)을 부처(付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다. 현종은 승정원에게는 `번독(煩瀆)하게 한다\'고 꾸짖고, 대관(臺官)에게는 ` 규핵(糾劾)하지 못하고 직무를 거행하지 못한 데다 사정을 따르고 공론을 멸시한다\'는 것으로 지적하고, 옥당에게는 `터무니없다\'는 것으로 지적하고, 이광적 · 류지발 등은 관작을 삭탈하여 내쫓았다.
정원과 삼사가 또 그들을 구원하였으나 왕은 모두 듣지 않았다. 좌참찬 이상진(李尙眞)이 또 소를 올려 구원하니, 왕이 `임금을 섬기는 데 의리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또 차자를 올려 논하니, 왕은 `임금을 성실하게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이 또 소를 올려 논변하니, 전교하기를,
“남이성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여 앞장서서 분노를 부리고 대신에게 아부하면서 감히 `반드시 오늘 빈청에서 의논해 올린 계사와 같이 해야만 국가의 전례(典禮)가 털끝만큼도 미진하다는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또 `각각 소견을 지키고 각각 그 논설을 펼 뿐이니, 여러 사람의 말이 어지 러우므로 성인에게서 절충돼야 한다\' 하였다. 어지러운 말이 성인에게서 절충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의 임금을 위해 후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 반드시 4종의 조목 중 한 조항에 의거해 박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의리인가? 또 감히 박한 쪽을 따라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따라야만 `털끝만큼도 미진한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하는 것 은 또한 무슨 의도인가? 이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자의 말이다. 전후로 아부한 말과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멀리 외딴 섬에다 귀양보내라.” 하였다.
승지 이합, 장령 안후태, 부교리 조근 등이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조근을 강서현령(江西縣令)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8월에 현종은 병이 들자, 승지를 급히 보내어 충주에 있는 영의정 허적(許積)을 불렀다. 왕의 병이 매우 위독하자, 허적을 침소로 불러들여 떠나갈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 마음을 내가 아는 바이고, 나의 뜻을 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氣)가 부족하여 국가의 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다.” 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8)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예관이 처음에는 기년(朞年)으로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제를 정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 · 송(唐宋) 때 적부(嫡婦)에게 입어주는 상복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외부의 의논은 `효종이 이미 서자(庶子)가 되었으니 인선왕후가 적부(嫡婦)가 될 수가 없다.” 하면서 비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송시열에게 편당하는 자가 또 앞뒤의 복제가 다르다 하여, 예관 조형(趙珩) 등에게 부탁하여 대공(大功)으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였는데, 대개 서부(庶婦)에게 입어주는 상복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현종은 마음으로부터 불쾌하여 왕이 앞뒤가 전도되었다 하여 예관을 가두고 치죄하였다. 그러나 대공의 복제가 또한 시행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빈청(賓廳)에서 모여 의논하는 일이 있었는데, 7월 13일이었다. 현종은 친히 <예경(禮經)>을 고증하여, <예경> 주소(注疏)의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는 문구로 주장을 삼아, 대왕대비의 복제를 대공에서 기년으로 고쳐 입게 하였다. 이에 적통(嫡統)이 밝아지고 나라의 예가 엄해지는 동시에 인심도 흡 족히 여기었다. 왕의 뜻을 여쭈어 보지 않고 마음대로 복제를 고쳤다 하여 예관을 죄주고, <예경>을 따르지 않고 다른 논의에 의탁하였다 하여 수상을 죄주었는데, 빌붙은 여러 사람은 모두 차례로 벌을 받았다. 또 장차 내치고 들어쓰는 일을 크게 밝혀 국시(國是)를 바르게 하고 종묘를 존중되게 하려 하였는데, 이때 현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과 논의를 거치면서 이른바 조선왕조 역사상 예송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를 복제의 예론으로 표출한 것이다. 현종은 효종의 왕위 계승이 정통에 부합하는 예론으로 입증되어 조대비의 복제에 반영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조야의 예론 인식이 대립되고 우연하게도 조대비는 다시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상에도 생존하여 복제기간에 대한 조야의 예론 결정을 뜨겁게 한 것이다.
현종년간은 기후가 불순하여 기근과 재해가 잇따라 왕의 특단의 조치가 자주 있었다. 즉위 원년인 1660년에는 기근으로 하여, 단천(端川)의 공은(貢銀), 영동 · 영서의 대동미(大同米), 각 도의 전세(田稅)와 노비의 공포(貢布)를 견감했으며, 떠돌이로 나선 북민(北民)들을 어사를 보내 위로하고 안집시켰다. 그리고 호구(戶口)의 법을 엄하게 하여 백성들이 감히 누락자가 없이 모두 판적(版籍)에 등재되게 하였으며, 강원도에는 여정포(餘丁布)를 내려 재앙 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중외의 노인들에게는 쌀과 베, 명주, 솜 등을 내려주었으며,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고, 관북 또는 영동 · 영서로부터 성중으로 떠들어온 백성들은 상평창으로 하여금 쌀과 소금 등을 대주도록 명하였다.
7월에 큰 가뭄으로 인하여 기우제를 행하였다. 가을 이후에는 기우제가 없는 것이 국가 제도였지만 이 때 특별히 행하였던 것이다. 각 아문이 백성을 상대로 물건을 팔거나 빌려주고 이식을 취하는 일을 금하였고, 영릉(寧陵) 성알(省謁)길에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을 단속하여 길가 곡식들을 밟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팔도에 두루 유시를 내려 유민들을 안집시키도록 하교하고, 어공(御供)의 정미(精米) · 향온미를 제감하였으며, 각 도에 명하여 각기 인 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해서(海西) 사람으로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는데, 현종은 일차 심문에서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는 그를 목 베고 연루되어 체포된 자 70여 명은 모두 석방하면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하고 이졸들에게 재산을 빼앗긴 자는 그것을 모두 찾아 되돌려 주도 록 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9)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겨울에 사형수를 복심해야 했는데 도심지에 마마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대신이 외신(外臣)들을 인접하기가 곤란하다 하여 정지할 것을 청하자, 서찰을 내리기를,
“아, 천성(天性)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의 천성을 되찾지 못해서 악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를 즉시 처리하지 않고서 계속 가두어만 둔다면 그의 죄로 보아서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정상으로서는 불쌍한 것이다. 생각이 여기 미치니 나도 모르게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금년에 그 때문에 처리를 하지 않고 내년에도 또 그 때문에 처리를 못한다면 그 죄인은 모두 다 감옥 속의 귀신이 되고야 말 것이니 그는 나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현종 2년에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였다. 현종은 처음에는 중들이 교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던 것인데, 불시에 다 그리 하기는 어렵다는 대신과 옥당의 건의에 따라 우선 자수(慈壽) · 인수(仁壽) 두 원을 철거하도록 명하고, 나이 젊은 중은 각기 제 갈 곳으로 가게 하고 늙은이는 성밖으로 내쫓았으며, 그 원의 목재로는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외에서 행하는 부당한 제사는 모 두 금하였다. 가뭄이 심하여 친히 기우제를 행하려고 했는데, 연신(筵臣)들이 성상 체후가 편치 않음을 들어 말하자, 이르기를,
“내 어찌 내 한 몸을 아껴 만성의 생명을 돌보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강도(江都) · 남한(南漢)의 쌀을 옮겨 삼남(三南)을 진구하였다. 7월에 왕이 태묘(太廟)에 이르러 효종의 부제(쯊祭)를 행하고, 진하(陳賀) · 반교(頒敎) · 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였다. 종전에는 수시로 도성 안의 양가(良家) 딸을 선발하여 시녀로 삼는 예가 있었는데, 이때 와서 그를 특별 혁파하고 일정한 법으로 삼았다. 삼남과 경기 · 해서의 조적을 일체 면제하고 이어 봄에 징수하는 미곡을 감하였으며 태복시의 말먹 이 곡식 1천여 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현종 3년 봄에 진휼어사(賑恤御史)를 양남에 보내 편리한 대로 일을 보도록 하였으며, 절행이 있는 영남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미곡을 하사하고, 서북면의 감사들에게 명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에 전지 측량을 실시하고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현종 4년에 가뭄으로 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대소 신료들에게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명했으며, 여러 궁가의 면세전결(免稅田結)을 정하면서 그 수에 차등을 두었고 시장(柴場)도 한 곳만 남겨두고 많이 점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어장(魚場) · 망장(網場)은 선조조(宣祖朝)에서 하사받은 것만을 인정하되 그나마 하사받은 당 사자에 한해서만 인정하도록 하였다.
현종 5년에 내수사 노비의 신공(身貢)에 있어 이미 죽은 자에게도 추징하던 것을 탕감하였다.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대소 신하에게 명하여 정사의 득실에 대해 갖춰 아뢰게 하고, 내사옥(內司獄)의 죄수를 석방했으며 상의원의 비단짜는 일도 정지시켰다.
10월에는 풍뢰(風雷)의 이변이 있었다. 왕은 재야의 유신(儒臣)들에게 실봉(實封)을 갖추어 아뢰도록 명하고, 백성의 전결이 몰래 궁가의 면세전결에 등록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10)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현종 7년에도 흉년 때문에 자신을 죄주는 분부를 내렸고, 영남 곡식은 영동 · 영서로 해서 곡식은 북관으로 옮겨 굶주린 백성을 먹였으며, 목화가 품귀하다 하여 포보(砲保)가 바치는 포목 및 각 관아 노비의 신공을 차등을 두어 견감하였다. 그리고 함경도 9개 읍의 전세 및 우황(牛黃) · 표피(豹皮) 등 공물도 면제하였다.
현종 8년에 한재로 인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각 사 노비의 신공 절반을 감했으며, 저화(楮貨) 값을 특감하였다. 국가제도에 노비들 신공 이외에 저화 값이라는 것이 또 있었는데, 그 후 저화가 없어졌는데도 그 값을 환산하여 베를 징수하여 오던 것을 지금 와서 특감하고 그를 영(令)으로 삼았다.
7월에 친히 사직에 제사하여 비를 빌고 옥중 죄수들을 재심했으며, 바른말을 널리 구하고 경기 지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두 견감하였으며, 각 사의 경비도 모두 절반씩 감하게 하고, 호조의 염세도 감하고 양서(兩西)의 징수할 쌀을 견감했으며, 북로 조적의 포흠분(逋欠分)을 탕척하였다. 그리고 경기 관내에서 번을 드는 기병(騎兵) 및 각 진의 수군(水軍)이 매월 번드는 조로 납입하는 군포도 그것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각 도 노비의 신공 중 아직 거 두지 못한 것도 모두 탕척하였다.
현종 9년에 성변으로 인하여 자신을 책하는 분부를 내리고 뭇 신하를 경계하여, 경건한 자세로 봉직하고 인재발굴에 힘쓰며 모든 옥사를 유체없이 제때제때 처리하도록 하였으며, 강도의 쌀 1만 석과 남한산성의 쌀 5천 석을 풀어 경기 관내의 기민을 먹이게 하였다. 예조가 성변이 이미 사라졌으니 평상의 수라를 다시 들도록 청하자, 이르기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파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무슨 마음으로 평상 수라를 들겠는가. 가을걷이 후에나 할 일이다.” 하였다.
현종 10년에 영남 지방에 기근으로 하여 각사 노비 중에 현종 6년 이후로 신공을 징수할 수 없는 자를 조사하여 그 신공을 견감해주도록 명하고, 여러 궁가가 떼어받은 곳을 조사하여 주인이 있는 백성의 전지 및 떼어받기 이전에 백성들이 일구어 경작했던 땅이 있으면 모두 그들에게로 되돌려주게 하였다. 세시 때 송엽(松葉) 바치는 일에 대하여, 대신이 청하기를, `그것은 기도에 가까운 일로 정도가 아니니 없앴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은 그 청을 받아들여 도장(桃杖) · 도지(桃枝) · 인승(人勝) · 채화(綵畵)까지도 모두 함께 없애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성씨가 같으면 관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혼인을 못하게 하였다. 종전의 나라 풍속은 성씨가 비록 같더라도 관향만 서로 틀리면 으레 혼인을 해왔었는데 이때 와서 금한 것이다.
10월에 처음으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묘에 합부하고 의식에 맞추어 휘호를 올리고 능침도 복원하였다. 왕후는 태조가 개국 때 여러 해 동안 중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승하하자 신하들이 잘못하여 합부의 예를 거행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나 신도 오래도록 억울하게 여기던 일이었고 그에 대한 조정 논의가 가끔 발발하기도 하였지만 열성조에서 미처 못했던 일이었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그 동안 빠져 있던 전례를 거행한 것이다. 능침을 봉하고 제를 올리던 날 소나기가 정릉(貞陵) 일대에 갑자기 쏟아져 백성들은 그 비를 일러 세원우(洗怨雨)라고 하였다. 천둥 · 우박의 재이로 하여 중외의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고 대동미 징수도 그 수를 감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11)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현종 11년에 흉년 때문에 각 전(殿)의 향온미를 감량하고 강화도 쌀 3만 석을 실어다가 서울에서 발매했으며, 호조의 염철포(鹽鐵布)를 전라도에다 끊어주어 기민 구제에 충당하게 하고, 어영군(御營軍)에 번드는 일을 정지하여 그 보미(保米)를 각기 자기 도에 유치하였다가 진구에 쓰게 하였다. 그리고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어 호남 및 통영(統營) 곡식을 옮겨다가 진구하게 하고 본주의 노비들 신공은 모두 제감했으며, 호조와 진휼청에 명하여 춥고 굶주린 사람에게 곡식과 옷가지를 차등을 두어 주급하게 하고, 각 도에도 포공(布貢)의 수를 감하였다.
현종 12년 봄에 큰 기근이 들어 하교하기를,
“이렇게 큰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을 독려하여 조세를 징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삼남과 원양(강원) · 황해 · 경기의 전세를 모두 본 도에 유치하였다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라.”
하고, 도심 안에는 세 곳에 진청(賑廳)을 두어 재신(宰臣)이 그 일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각 도에는 읍과 촌락의 원근을 헤아려 기민 먹이는 곳을 군데군데 설치하고 미음을 쑤어 굶주리고 부황 난 자를 먹이게 하였다. 그리고 건량(乾粮)을 대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진청에서는 조곡의 값을 내려 뛰는 값을 막도록 명하였다.
여름에는 또 보리 농사가 크게 흉작이어서 굶어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으므로 중외에 명하여 창고의 것을 모두 털어내어 기민 먹이는 일을 계속하게 하고 병든 자에게는 의약을 대주고 죽은 자는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버려진 아이는 그를 수양하여 자식으로 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울 밖에 사는 백성들도 모두 관청을 찾아 먹여주기를 바랐으며 그렇게 했기 때문에 비록 의지할 곳 없이 금방 죽어가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저들끼리 모여 사람을 죽이거나 한 일이 없어 죽은 자가 유한없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자도 자기 고장으로 다시 갈 수가 있었다.
가을에는 각 도에 풍년이 들어 그다지 가꾸지 않고서 수확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동서 교외에다 단을 만들어 굶주려 죽고 마마에 죽은 사람들을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각 도의 진상품은 두 자전(慈殿)에 올리는 것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다 정파하였으며, 어사를 제주에 보내 세 읍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무명베 4천 필, 보리 종자 2천 석, 쌀 2천 석을 수송하여 도와주게 하였고, 정상적으로 바치던 토산품도 그 모두를 견면하였다. 그리고 각 도 에도 토산품 바치는 것을 명년부터 계축년까지 그 수를 감하도록 하였다.
현종 13년에 재신 및 육조의 참의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명하고, 중외의 죄수들 중 사형수 이하를 관대히 처리하며 병오년 이전의 조적 포흠분을 모두 물시하고 각 아문에서 받을 조세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현종 14년에 애통한 심사와 함께 농사에 힘쓰라는 하교를 팔도에 내리고 한재로 인하여 억울한 죄인이 있는가를 살폈으며, 정전을 피하고, 수라상 음식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였다. 단오첩(端午帖)을 지어올리자, 이르기를,
“가뭄이 이렇게 심할 때는 이와 같이 실속없는 글월은 짓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12)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1671년(현종 12) 이전의 군병과 노비 중 도망갔거나 죽은 자 및 1672년에 상납못한 것 또는 1673년에 바쳐야 할 군포들을 일체 물시하도록 명하였고, 영릉(寧陵)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9월에 구릉(舊陵)을 열어보았으나 탈이 없었다. 10월 계묘일에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으로 옮겨 모셨는데, 영구가 지나간 5개 읍에 대하여 대동미 징수를 면제하고 경기에는 봄에 징수할 쌀을 차등을 두어 감해주었으며 경기 · 황해 · 전라 · 원양(강원) 4개 도의 1670년 전세 미수분을 탕감하였다. 그 중 현종 14년 정월에 경기 지방이 재해를 입었다 하여,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大同米)를 차등있게 감하라 2월에 명을 내려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조적의 수를 뽑아내어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팔도의 감사와 강화부와 개성부 등의 유수(留守)에게 유시하기를,
“내 생각건대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는 진실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히 여기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들은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알고 농사짓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의 빈풍(?風)과 <서경(書經)>의 무일(無逸)이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에서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먼저 전제(田制)를 바르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풀이하여 가르치고, 토지를 이미 시험해 본 방법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지어서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였으며, 또 농사를 권장하는 글을 반포하는 등 무릇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여러모로 심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과 당(唐)나라 때에 쌀 1말 값이 3전이었던 것도 그다지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과인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없는 해가 없었고, 기근의 참혹함이 지난해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노약자들은 구렁텅이에 죽어 뒹굴고 백골이 서로 잇따르고 있으나 이주시킬 만한 곳이 없고 구제할 만한 곡식도 없다. 내 이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아니하고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으므로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는 계책 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른 백성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만 있게 되어 조종(祖宗)께서 3백 년 동안 길러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 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지고, 뽕나무와 삼이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으니, 아, 이를 차마 말 할 수 있겠는가. 그 연유를 구명해 보면 비록 연운(年運)이 좋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나 실로 사람이 한 일이 미진하여 그런 것이다. 만일 옛날처럼 3년을 농사지어 1년 먹을 것이 축적되고 9년을 농사지어 3년 먹을 것이 축적되었다면 떠돌거나 죽는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대체로 농사에서 힘써야 할 일은 때에 맞추어 하는 것과 힘을 써서 하는 것 이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미 제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고 김매는 일에도 힘을 쓰지 않는가 하면, 제방을 쌓아 관개(灌漑)하는 이로움을 폐지한 채 수거(修擧)하지 않고, 거름을 주고 김매는 일도 대부분 소홀히 하여 힘쓰지 않고 있다.
현종대왕 - 시대상 (13)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아, 사농공상 가운데 오직 농민이 가장 괴로움을 겪고 있다. 추울 때에 밭갈이 하고 더울 때에 김매는 등 해가 다 가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데, 고을의 관리가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정치가 소요를 일으키고, 장사꾼과 놀고 먹는 무리가 또 뒤따라 좀먹고 있으니, 어떻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지금 봄날이 따뜻해져 토맥(土脈)이 처음으로 열리었으니, 보습을 손질하는 정월은 이미 멀어지고, 밭갈이하는 2월이 문득 박두하였으므로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 번 우역(牛疫)이 치성해지면서부터 백성들은 어깨가 붉게 문들어진다고 탄식하고 있다. 날카로운 보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으므로 흙을 일구는 밭갈이 를 장차 폐지하게 되었다. 옛날 왕공(王公)이 경작하는 예를 몸소 행하여 천하의 백성을 거느렸다. 내가 경사대부(卿士大夫)와 함께 옛날의 제도를 본받아서 사방의 주창이 되려 하였으나, 이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실로 불만스럽게 여긴다. 아, 큰 흉년을 치른 전지가 황폐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살아갈 대책이 막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마하는 도리 는 급히 해야지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권장하는 방법은 서서히 해야지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는 오직 방악(方岳)뿐이며, 백성과 가까운 직책은 수령만한 사람이 없다. 경들은 나의 명농(明農)의 뜻을 체득하여 수령들에게 포고하여, 밭두둑을 출입하되 여리(閭里)를 소요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전야(田野)를 살펴 보되 백성의 농사일에 방 해되지 않도록 하라. 저수지 중에 관개할 만한 것은 수리하고, 도랑 중에 소통할 만한 것은 소통시키도록 하라. 백성의 힘이 넉넉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고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여, 갈고 씨앗 뿌리는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고 북돋우는 시기를 어기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모두 일구어 지도록 힘쓰고 놀고 먹는 백성이 다 농사에 돌아가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백성이 본업을 즐거워하여 태만하지 않고 힘을 다해서 위로는 경상(經常)의 부세(賦稅)를 바치고 아래로는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소원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백성의 생업은 농사에서 안정되고 나라의 근본은 반석처럼 튼튼해질 것이다. 경들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고 깊이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처럼 현종의 교서에는 왕의 애민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원을 보내어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노산군이 영월(寧越)로 물러가 있다가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중종 · 선조 · 효종조에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 와서 다시 행한 것이다. 절행(節行)이 바른 영남의 사람 하홍도(河弘度) · 조임도(趙任道)에게 미곡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영남 진휼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굶주린 백성이 대여받은 곡식을 일체 탕감해 주었다. 제도(諸道)에 홍수가 져서 백성이 많이 떠내려가 죽었다. 제도에 명하여 해당 고을에서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명하여 각 아문(衙門)에서 소유하고 있는 배[船]의 숫자를 정하게 하고, 내수사(內需司) · 명례궁(明禮宮) · 용동궁(龍洞宮) · 수진궁(壽進宮) · 어의궁(於義宮) 등의 배는 현존 하는 숫자 이외에 더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고려조의 여러 왕릉(王陵)에 화재와 벌채를 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에 있는 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사당 편액을 하사하였다. 주지하듯이 이순신은 선조조에 왜구를 누차 격파하여 충의와 용맹이 가장 뛰어났던 장군으로, 전쟁터에서 순국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14)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이조참의 이단하(李端夏)의 상소로 인해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신주(神主)를 신씨의 집안 직손 집에 옮겨 모시게 한 다음 관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고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3호(戶)를 두었다. 신씨는 중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의 정비(正妃)이다.
“아, 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굳세고 침착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너그럽고 따스한 덕이 있고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자애로운 심성은 아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재위한 지 16년 동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애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 몸을 검속(檢束)하되 부족한 것처럼 하고 선(善)을 구 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하루 이틀 사이 번거로운 정무에 경계를 다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졌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수재 · 한재 · 풍재(風災) · 상재(霜災)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으나, 왕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가다듬음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충애(忠愛)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였다. 안으로는 음악이나 여색(女色)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놀이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릇 전대 제왕이 욕심껏 방종하고 사정(私情)을 행하며, 법도를 패하고 덕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마음이나 행동에 파고들지 못하였다.
진하(陳夏)를 아울러 썼으나 경력(慶曆)의 치세(治世)에 해가 되지 않았고, 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 전례(典禮)가 밝혀지자 인륜이 펴고 사설(邪說)이 사라짐에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 속으로 말할 적마다 `우리 왕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와 송 인종(宋仁宗)도 앞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임금도 무시하고 아버지도 무시하는[無君無父] 논설을 물리쳐서 온 세상에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기가 나타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또 사도(斯道)에 큰 공로가 있었다. 비록 신민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장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다는 소문이 사람에게 깊이 감명되어 실로 영구히 잊지 못하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우뚝이 동방에 성덕(盛德)의 임금이 되었다. 아, 아름답도다.
옛날 주(周)나라의 왕계(王季)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랑을 쌓아 문왕(文王)의 빛난 덕과 무왕(武王)의 큰 공렬(功烈)을 이룩하게 해 주었고,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몸소 공손과 검소를 행하여 건원(建元)의 성대한 정벌의 공을 이루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며,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지극한 정성과 깊은 자애로 한결같은 덕을 지녔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오래 지속되어 마침내 반드시 힘입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현종(顯宗)으로 말하면,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과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 도는 진실로 옛날 명철하고 올바른 임금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다. 첫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고, 둘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여 하나의 생각도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이 깊어서 교화가 믿음을 받게 되고, 백성이 감화됨에 하늘이 감응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장차 우리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을 크게 인도해 주어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국운을 길이 누리게 하며,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어 우리 국가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할 것이다.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라고 하였다.
현종대왕 - 시대상 (15)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현종개수실록> 행장에서는 왕에 대한 또다른 사평을 남기고 있다.
“왕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바탕에 너그럽고 온유한 덕이 있었으며, 마음이 깊고 독실하고 성품이 후하고 규모가 컸다. 선왕으로부터 정일(精一)을 이어받고 사부에게서 절차(切磋)의 도움을 받아 높기가 임금이었으면서 행실은 증자(曾子) · 민자건(閔子騫)보다 고고하였고, 부자로는 나라를 소유하였으면서 절제하기가 포의 한사와 같았다. 궁금을 엄히 하여 사사롭 고 그릇된 길을 막았으며, 조정을 바로세워 되도록 화평을 주장하였다. 나라 법을 굳게 지켰으나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고쳤으며, 신하들을 예로 대우했으나 죄가 있으면 반드시 징계하였다. 몸에 비록 지병이 있어 한철 한 달도 평온할 때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 하루도 쉬며 안일을 취하지 않았으며, 비록 만 가지 일이 답지하여도 일 처리에 있어 조용하고 신밀 하게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없었다. 관직 제배에 있어 한 관직도 사사로이 제배하지 않았으며, 형옥(刑獄)에 있어서도 죄 없이 죽은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안에서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도 없었고 밖에서 유전(游田)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사사로이 있을 때도 관대(冠帶)를 반드시 갖추고 병이 아무리 심해도 의관을 않고는 신료들을 접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임종 직전까지도 그러했었다. 걱정하고 근면하고 두려워했던 정성이 위로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족했으며, 불쌍히 여기고 슬피 여기는 마음은 아래로 뭇 백성들을 결속시키기에 족했다. 조심조심 깊은 못 가에 있는듯이 하기 15년을 하루같이 하였는데 이것들이야말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마음에 생각하고 입으로 외우고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천지신명에게 질정하더라도 될 일들인 것이다.
비록 만난 것이 어려운 시기였고 하늘이 수명에 대하여 인색했으나 그 동안 사람들 마음에 스며든, 인자한 마음 인자하다는 소문 만으로도 이미 국가 억만년 기반을 공고히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신이 보건대 전대의 순미했던 임금들로서 은(殷)의 중종(中宗) · 고종(高宗) · 조갑(祖甲)은 덕이 훌륭했다고 할 수 있고, 한(漢)의 문제(文帝)와 송(宋)의 인종 (仁宗)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찬사라는 것이 고작, 근엄하고 공순하고 하늘을 무서워했다는 것, 감히 황령(荒寧)하지 않았다는 것, 감히 환과(鰥寡)를 업신여기지 않았다는 것, 공순하고 검소했다는 것, 형(刑)을 없애고 조(租)를 내려주었다는 것, 남이 덕택을 입었다는 것, 사직이 영원토록 그의 힘을 입을 것이라는 것 등등에 불과하였다. 아, 우리 현종 대왕도 백세를 두고 잊지 못할 일들이 아마 이상에 열거된 것과 같은 것들이리라. 아마 꼭 그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