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 - 이인좌의 난 과 탕평정치 (2)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반란군은 진압군이 미처 떠나기 전날 밤에 충청병영(忠淸兵營)으로 들어가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을 죽였다. 그러자 영조는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과 적을 욕하며 굽히지 않고 죽은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품계(品階)를 올려주고 종군(從軍)하여 원수를 갚게 하는 등 순직자에 대해 우대적인 배려를 하였다. 사기가 오른 오명항(吳命恒) 등의 진압군은 안성 · 죽산에서 반란군을 만나 섬멸하고 적의 우두머리 이인좌를 붙잡아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경상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격문(檄文)을 보내어 성주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아 군사를 경계하여 합천군(陜川郡)에 들어가 적병을 엄습하여 공격하였고, 선산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아서 곤양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과 함께 우지령(牛旨嶺)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결국 반란군 우두머리 정희량과 이웅보(李熊輔)의 머리를 베었고, 우두머리를 잃은 반란군은 스스로 무너졌다.

 이인좌의 난은 남인과 소론이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의 불만 세력이 규합하여 일어난 반란으로, 영조에게는 일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소론측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그뿐 아니라 영조 6년에는 나홍언(羅弘彦)이 폐출(廢黜)된 여흥군 해(垓)와 여릉군 기(圻)를 추대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여흥군과 여릉군은 숙종 6년(경신년)에 죄로 죽은 인평대군의 2남 복창군 정(楨)과 3남 복선군의 종손(從孫)이고 숙종 15년(기사년)에 죄로 죽은 민취도(閔就道)의 외손(外孫)이었다. 나홍언은 역시 영조 4년(무신년)의 역적 나숭곤(羅崇坤) · 나숭대(羅崇大)의 친속이고 정사효(鄭思孝)의 동서(同壻)였다.

 이러한 역모 사건에 직면해서 영조는 노 · 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정치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왕세제로 있을 때부터 느껴왔던 당파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각 붕당을 고루 등용하여, 영조 자신의 주도하에 정국을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나갔다. 영조는 중국의 요순 임금처럼 군주가 선정을 베풀고 신하들이 무당(無黨)의 경지를 이룬 상태로 나아가기 위하여 탕평정치를 주도하였다. 탕평론은 숙종 때 이미 박세채에 의해 제기되었던 것인데 영조는 이 탕평론(蕩平論)을 수용하여 성군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영조가 취한 정책은 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즉 노론측의 인사를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측의 인사를 좌의정으로 삼아 서로 견제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측 인사를 등용하면, 참판에 소론측 인사, 참의에 소론측 인사, 전랑에 노론측 인사를 등용하여 상대하게 하였다. 이처럼 영조대의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들을 중심으로 소론과 노론만을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안정되자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였다.

 그러나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사도세자를 둘러싼 사건으로, 숙종조에 세자와 연잉군을 둘러싸고 전개된 각 정파간의 싸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조는 당시 정성왕후(貞聖王后)와 계비 정순왕후(定順王后)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서 효장세자(孝章世子)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얻었다. 그러나 큰 아들인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 사도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따라서 사도세자에 대한 각 정파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특히 1749년 영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자 노론에 밀려있던 소론, 남인 등의 각 정파는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영조대왕 - 이인좌의 난 과 탕평정치 (3)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한편 이에 노론측과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은 영조와 세자와의 관계를 벌려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여 세자는 영조에게 자주 질책을 받는 등 정신적 압박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세자는 궁녀를 죽이거나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기도 하였고, 1761년에는 영조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하여 영조는 관서 순행에 동행했던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이 심화되자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여 영조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세자를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그러나 곧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아들을 죽인 행동이 나라를 위한 부득이한 조처라고 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탕평정치(蕩平政治)를 위한 입지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영조 17년에는 유교정치 이념을 지향하는 조선 왕조에서 공론의 주체자였던 이조정랑과 한림을 천거하는 법을 철회하였다. 즉 이조 낭관(郞官)이 청관(淸官)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통과하는 통청(通淸)을 관장하는 법을 없애고 한림(翰林)의 천거를 권점(圈點)으로 하는 것으로 고쳤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는 당습(黨習)의 폐단을 매우 미워하여
“당습은 다 신진(新進)인 선비가 조급히 부귀를 다투고 서로 모함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고 하며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대해 일찍이 한림이 된 자들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한 일을 인용하고 사관(史官)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도리어
“관원이 제 직무에 따라 아뢰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습을 미워하므로 익히 생각하고 살펴서 처리하였는데, 소관(小官)이 감히 방해하는가?”
하고 반대한 신하들을 모두 파면하기도 하였다.

 영조 18년에는 당의(黨議)의 분쟁(分爭)이 서원(書院)에서 많이 일어난다 하여 각 도의 50년 이래 새로 창설한 서원을 모두 철훼하게 하였다. 그리고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게 하였다.
 한편 노론측의 부단한 상소에도 재가하지 않았던 송시열, 송준길의 문묘종사를 영조 32년에 가서야 결정하였고, 소론측의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문묘종사를 허락함으로써 중앙의 관료는 물론 재야의 사림들을 포섭하기도 하였다.
영조대왕 - 이인좌의 난 과 탕평정치 (4)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또한 북벌론과 대명의리론의 양대 정치적 이념 속에서 명나라를 대신한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주창하면서 숙종이 주도한 대보단(大報壇, 황단) 제사를 주도적으로 행하기도 하였다. 대보단은 명나라가 망한 지 갑자(甲子)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준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모시는 제단으로 영조는 직접 황단에 대해 신하의 예를 극진히 하면서 신료들에게 군신간의 의리를 고무시키려 하였다. 그와 더불어 명나라에 대한 존주(尊周)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호란 때 순절한 충신들을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와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하였다. 또 통제영(統制營)에 있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당과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도 제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충청도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삼학사인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등의 묘석(墓石)을 세우게 하였다.

 한편 왕실의 강화를 위해 숙종(肅宗)의 묘(廟)를 받들어 세실(世室)로 정하고,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중종(中宗)의 원비(元妃) 신씨(愼氏)에게 단경(端敬)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고 태묘(太廟)에 부제(쯊祭)하였다.

 그리고 영조 29년에는 어머니 숙빈에 대한 예를 높였다. 영조는 숙종과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등극하였기 때문에 후궁 출신의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로서 예를 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어머니의 묘인 소령묘(昭寧墓)를 원(園)으로 개칭(改稱)하고 사당인 육상묘(毓祥廟)를 궁(宮)으로 개칭하여 수위관(守衛官) · 수복(守僕) ·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향(祭享)은 한결같이 궁원(宮園)의 규례대로 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시호(諡號)를 화경(和敬)이라 추상(追上)하였다. 이에 대한 명분으로 영조는
“한(漢) · 당(唐) 이래로 중국에서는 모두 낳은 어버이를 추숭(追崇)하였으나, 아조(我朝)는 가법(家法)이 엄하고 또 성고(聖考)의 하교가 있으므로 내 뜻이 추숭에 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만은 짐작하여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겠으나, 외인(外人)이 헤아리지 못하면 반드시 아직도 여사(餘事)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영조 47년에는 전주(全州)에 전주리씨의 시조를 위한 조경묘(肇慶廟)를 세웠다. 처음에 일곱 도(道)의 선비와 이득리(李得履) 등이 상소하여 국조(國朝)의 시조인 신라 사공(司空)의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여, 영조는 종백(宗伯)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의논이 분분하여 다시 정신(廷臣)을 불러 의론하게 하였다. 영조는
“예(禮)는 인정에서 비롯되거니와, 이제 조선은 사대부도 오히려 시조를 존경하여 그 예를 차리는데, 더구나 나라의 시조인 경우 이르다 뿐이겠는가? 고구려 · 신라도 다 시조묘(始祖廟)가 있거니와, 예에는 본디 풍속과 의리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 있다.”
고 하고, 유사(有司)를 보내어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세손(世孫)에게 명하여 사판(祠版)에 선공(先公)이라 칭하였다. 이와 같이 조상 숭배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영조대왕 - 경연과 사회정책의 시행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경연과 사회정책의 시행

 영조는 노 · 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는 등 영조 자신의 주도하에 정국을 이끌어가는 탕평정치를 지향하였다. 중국의 요순 임금처럼 군주가 선정을 베풀고 신하들이 무당(無黨)의 경지를 이룬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성군정치의 모범을 보여야 했는데, 영조는 이에 경연제도를 몸소 실천하였다. 경연(經筵)은 임금의 덕을 수양하기 위한 것으로 신하들의 간청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조는 붕당 정치하에 왕정의 책임과 수신의 요체로서 경연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몸소 성실히 실행하였다. 그 결과 재위 52년간 총 3,400여 회에 이르는 경연을 실시하였다. 이는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다. 영조가 경연을 했던 과목은 주로 유교경전과 역사서로, 초반기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위주로 하고 점차 주자의 저술과 <대학연의>, <근사록>, 그리고 역사서로써 경연 과목을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영조의 경연에서 주목되는 것은 <주례(周禮)>의 선정이다. <주례>는 성리학자들에게 배척받은 경서이지만 국가 제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필수적이었다. 이와 같은 성향은 영조가 행한 제반 제도의 시행이 이에 근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조는 경연의 성실한 실행자일 뿐 아니라 직접 강(講)도 행함으로서 신료들에게 지적인 소유자임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즉 당시 신하들이 추앙하던 주자의 대표적 저서인 <대학장구(大學章句)>나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대해 주자(朱子) 못지 않은 학식의 소유자임을 과시하였고, 또 각종 서적의 편찬에 손수 어제(御製), 어훈(御訓)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역대 왕 중에서 가장 긴 존호를 가짐은 물론 `요명 순철(堯明舜哲)\'이라는 요순 임금을 뜻하는 존호를 신하들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조의 경연에 대한 열의에 의해 영조조에는 세종, 성종에 이루어졌던 각종 제도가 새로이 편찬되어지고 또 실학(實學)의 부흥과 더불어 수많은 서적(書籍)들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영조 20년에는 <소학선정전훈의(小學宣政殿訓義)>를 찬집(纂輯)하였다. 일찍이 영조가 유신(儒臣)들에게
“<소학>은 내가 평생 동안 존신(尊信)한 글이다. 내가 세종조(世宗朝)의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를 본떠 음훈(音訓)의 사실(事實)과 선유(先儒)의 성명(姓名) · 출처(出處)를 집해(集解) 아래에 나누어 풀이하여 보는 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유신(儒臣)을 불러 친히 참증(參證)하고 완성되고나서는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에게 보여 거듭 교정하게 하여 세상에 유행시킨 것이다. 그리고 <속대전(續大典)>을 찬집(纂輯)하되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성종조(成宗朝)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는데, 규모는 매우 바르나 조관(條貫)은 오히려 상세하지 못하므로 역대에서 증수(增修)하여 각각 한 서책을 만들었는데, <전속록(前續錄)> · <후속록(後續錄)> · <전록통고(典錄通考)> ·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의 서책이 있었으므로 문호(門戶)가 번거롭고 많아서 고거(考據)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아홉 당상(堂上)과 아홉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육전(六典)을 나누어 맡겨 번잡한 것을 삭제하여 간단하게 하고 날마다 전석(前席)에 인대(引對)하여 친히 감정(勘定)하였는데, 전가사변율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범한 자는 죄가 있으나 처자는 무슨 죄인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없애게 한 것이다.
영조대왕 - 경연과 사회정책의 시행 (2)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1740년(영조 16)에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게 하였다. <오례의(五禮儀)>도 성종조에서 이루어졌는데, 뒤에 손익(損益)한 것이 많으나 완성된 서책이 없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속찬(續纂)하게 한 것이다.
 영조 46년에는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하였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은 금궤(金櫃)에 담고 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보관한 것이 있으나 이 밖에는 증거할 것이 없으므로 무릇 조종(祖宗)의 예악(禮樂) · 문물(文物)은 노사(老師) · 숙유(宿儒)도 혹 그 연혁(沿革)을 모르고 육관(六官) · 서직(庶職)은 다 서리(胥吏)의 전설(傳說)에 의지하므로 뒹굴고 잘못되어 점점 그 옛것을 잃어갔다. 그래서 영조는 이 글을 편찬하도록 명한 것인데 편목(篇目)은 모두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대로 하되 개괄(槪括)을 조금 더하였다. 이 때부터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의거하여 살피는 데에 이 글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그 밖에 영조 8년에 <경종실록>, 영조 10년에는 신속(申첔)의 <농가집성(農家集成)>, <병장도설(兵將圖說)>, 영조 19년에는 <수교집록속편(受敎輯錄續編)>, 영조 23년에는 형정관리들의 필독서로 일종의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 영조 25년에는 <탁지정례(度支定例)>, 영조 28년에는 <상례보편(喪禮補編)>, 영조 31년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한 <천의소감(闡義昭鑑)>, 영조 34년에는 <황단봉실의(皇壇奉室儀)>를 찬집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樂學軌範)>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 무신을 위해 쓴 <위장필람(爲將必覽)>,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 등이 있다. 영조조에는 이뿐만 아니라 영조의 후원 아래 실학자의 책이 많이 편찬되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 홍만선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조에는 탕평책으로 인한 왕권의 강화는 물론 사회 전반적인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다. 영조는 경연에서 유교경전과 역사서 등을 강(講)하면서 여러 대신들과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토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대신들과 기탄없는 대화를 통해서 사회 전반에 대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기도 하고, 왕 자신이 궁궐 밖에 몰래 나아가 민중들의 사정들을 살피기도 하였다. 민에 대한 대화의 창을 마련함으로써 영조는 사회 문제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우선 형벌제도에 있어서 1725년에 주리를 틀어 국문하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였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도 금지하였다. 그리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해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하였다.
영조대왕 - 경연과 사회정책의 시행 (3)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영조조에 가장 주목되는 사회정책으로는 영조 26년에 시행한 균역법(均役法)이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서 나라에 세금을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인 이 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의 균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처음에 숙종(肅宗) 때에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여러 번 신하들에게 명하여 여러 가지로 의논하게 하였으나, 호포(戶布) · 결포(結布) · 유포(游布) · 정전(丁錢) 등 갖가지 의논을 서로 고집하여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영조도 즉위하여 양역청(良役廳)을 두고 당상(堂上) 두서너 사람을 가려서 강구하게 하였으나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폐지하였다.

 이 해 4월에 왕은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사서(士庶)를 불러 묻기를,
“백성의 폐단 중에 양역의 폐단이 크니, 일찍 고치지 않으면 어떻게까지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성고(聖考)께서 반드시 바로잡으려 하셨으나 뭇 신하가 마침내 덕음(德音)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개탄하여 병을 견디고 임문(臨門)하였다. 유포(游布) · 구전(口錢)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인 줄 알고 있거니와, 호포 · 결포는 어느 것이 편리하고 어느 것이 불편한가? 이 밖에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였는데, 사서(士庶)가 다 대답하기를,
“호포가 편리합니다.”
하고 결포가 편리하다고 한 자도 열 중에서 두셋 있었다.

 영조는 이에 대해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문수(朴文秀)가 대답하기를,
“호포는 경비(經費)의 수를 감당할 수 없으니 호전(戶錢)이라야 합니다. 대호(大戶)는 1백 문(文)으로 하고 중호(中戶)는 50문으로 하고 소호(小戶)는 30문으로 하면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조는 말하기를,
“아! 자질구레한 것은 나라의 체모가 아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쓸데없는 고을을 없애서 경비에 보태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어렵게 여기시고 신하들도 어렵게 여기므로 그 차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호포를 근본으로 세우고 모자라는 것은 어염(魚鹽)으로 채우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포는 결포만 못합니다. 결포는 전조(田租)와 아울러 세(稅)를 내므로 관에서 거두기 쉽고 백성이 소요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영조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비국 당상(備局堂上)들에게 명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직숙(直宿)하면서 편의한 것을 강정(講定)하게 하였지만 달이 지나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홍계희(洪啓禧)가 세운 균역(均役)의 방책을 아뢰니, 영조는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마침내 그 말을 따라서 국중(國中)의 양역(良役) 1필(匹)을 모두 면제하고 따로 균역청(均役廳)을 두어 어염 · 결전(結錢) · 선무포(選武布) 등의 세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 저치 상정미(儲置常定米)와 외읍(外邑)의 은여결(隱餘結)을 보태어 경비를 채우고 균세사(均稅使)를 팔도에 보내어 어염세(漁鹽稅)를 바로잡고 은여결을 살펴 내게 하고 드디어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우고 신칙하여 이 뒤로는 변경(變更)을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게 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왕은 사람들에게
“균역의 논의를 창도한 자의 자손이 번창한 뒤에야 균역이 실효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하였다.
영조대왕 - 경연과 사회정책의 시행 (4)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이밖에도 각도에 보고 되지 않은 은결(隱結)을 자세히 조사하게 하고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조 39년에는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趙쵓)이 가져온 고구마를 전국에 구황작물(救荒作物)로 보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얼(庶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 관리도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정책으로는 1725년 화폐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고 이듬해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였다.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였고,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外城) 개축 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하였다.

 이상과 같이 영조는 붕당간의 갈등을 체험하면서 탕평정치와 경연을 통해 이를 극복하는 성군정치를 지향하려 하였다. 삼대의 요순 임금처럼 황극(皇極)의 위치에 서서 군자 소인의 당이 없는 그런 정치를 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재위 52년 동안 역대 어느 군주보다 많은 경연을 솔선수범하여 행함으로써 군주로서 성실히 행하는 이행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영조는 이를 통하여 군신의 의와 그 실천을 보이고자 하였으며, 경연을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문화정치를 꾀하고자 하였고, 손자인 정조에게 그 정신을 이어지게 함으로써 영 · 정조대의 문화부흥기를 마련하는 토대를 이룩하였다.
정조선황제 - 생애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생애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여러 번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왕위에 오른 정조선황제(이하 정조라 함)는 할아버지 영조와 같이 탕평정치(蕩平政治)를 시행하고, 규장각(奎章閣)과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신을 높이고 또 그 능행길을 빌미로 일반민의 동향을 살피는 등 영조와 함께 영 · 정조조의 문예 부흥기를 이룩하였다.

 정조 대왕의 휘는 산(?)이며 자는 형운(亨運)이다. 영조의 손자이자 장헌 세자(莊獻世子) 즉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혜빈(惠嬪) 풍산홍씨(豊山洪氏)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다. 정조는 영조의 명에 의하여 추존한 진종대왕(眞宗大王)의 후계자가 되었다. 모비(母妃)는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이다. 왕의 묘호(廟號)는 정종(正宗), 능호(陵號)는 건릉(健陵), 시호(諡號)는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이다. 순조 때에 세실로 지정되어 종묘에 불천지위로 모셔졌고, 고종 광무 연간에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면서 정종(正宗)에서 정조(正祖)로 묘호를 바꾸었다.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기묘) 축시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장헌세자가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서, 꿈을 깬 다음에 손수 꿈속에서 본 대로 그림을 그리어 궁중벽에 걸어 놓았었다. 탄생하면서 영특한 음성이 큰 종이 울리듯 하므로 궁중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영조가 친림하여 보고서 매우 기뻐하며 혜빈(惠嬪)에게 하교하기를,
“이 애는 너무도 나를 닮았다. 이런 애를 얻었으니 종사가 근심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하고,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정하였다. 1754년(영조 30)에 보양청(輔養廳)을 두었으며, 1755년(영조 31) 4세에 처음으로 주자가 쓴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759년(영조 35) 2월 계해일에 8살의 나이로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윤 6월 경자일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립을 받았는데 거동 하나하나가 법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모습이 본받을 만하였다. 영조가 전상으로 오르도록 명하고, <소학> 제사(題辭) 제3장의 16구절을 손수 써서 내렸다.
 1761년(영조 37) 2월 을미일에 자(字)를 정하고 3월 기유일 학궁에 들어가 선성(先聖)을 배알한 후 박사(博士)에게 수업을 청해 <소학>을 강하였다. 그 달 정사일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를 행하고 1762년(영조 38) 2월 병인일에 청풍김씨(淸風金氏) 증 영의정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정조선황제 - 생애 (2)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그러나 5월에 장헌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삼도록 명하고 세자궁에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을 두었다. 강(講)하는 자리에서 빈대(賓對) 때나 또는 대소 신료들 입시 때면 정조로 하여금 자주 시좌(侍坐)하도록 하고 혹 경전의 뜻을 변론하기도 하고 혹은 국정을 참여하여 듣도록 하기도 하였다.
 1764년(영조 40) 2월 임인일 왕을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명했는데 효장세자는 바로 진종을 말한다. 친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불의로 죽었기 때문에 정조의 왕위 계승 명분을 세워주기 위해 영조의 첫 왕자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그랬듯이 세손으로서 항상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이 기간에는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으며 목숨을 유지하였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문화에 열중하면서 세손으로서 왕자수업을 준비하였다.
 1775년(영조 51) 봄에 와서 영조의 병환이 날이 갈수록 더하여 세손에게 크고 작은 사전(祀典) 모두를 대신 행하도록 하고 점차 모든 정사를 대리청정하게 하였다. 영조가 승하하자, 대신 이하 제신들이 사위(嗣位)할 것을 청하여 왕은 곡만하고 승락을 하지 않다가 성복일(成服日)에 와서야 비로소 면복을 갖추고 유교(遺敎)와 대보(大寶)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받고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 왕비를 왕대비(王大妃)로,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빈(嬪)을 왕비로 책봉하면서
“종통(宗統)과 계서(繼序)는 중대한 일이기에 비록 손(孫)이 조(祖)를 승계하고 제(弟)가 형(兄)을 승계했더라도 그 할아버지와 그 형은 당연히 아버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왕대비 칭호도 사실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승계한 그 의의를 부여한 것이다.”
하고 영조의 유지(遺旨)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대왕(眞宗大王), 효순빈(孝純嬪)을 효순왕후로 추숭하였으며, 효장세자 묘는 영릉(永陵)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면복을 벗고 다시 상복을 입은 다음 윤음을 내려
“과인(寡人)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이 종통을 중히 여겨 나로 하여금 효장세자 뒤를 잇도록 명했던 것인데, 내가 전일 선왕께 올린 글월을 보면 불이본(不貳本)에 대한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예(禮)를 비록 엄밀히 지키지 않으면 안되지만 정(情) 역시 풀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니 제사 모시는 절차를 당연히 대부(大夫)의 예대로 해야 할 것이나 태묘(太廟)의 예와는 달라야 하고, 혜경궁 역시 당연히 경외에서 공헌(貢獻)하는 바가 있어야 하나 대비와는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하여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사도세자에게 존호(尊號)를 추상하여 장헌(莊獻),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 사당은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고, 각종 모시는 의식 절차는 송(宋)의 복왕(?王)에게 하던 의식을 따랐다. 그리고 축식(祝式)은 주자(朱子)가 정했던 대로 황숙부(皇叔父)라고 하고 종자(從子)라고 하는 등 당쟁속에 희생이 된 사도세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아버지의 존호와 능호를 격상시켰다.
정조선황제 - 생애 (3)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이와 함께 정조는 홍국영의 도움을 받아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홍인한(洪麟漢) 등을 제거하고 할아버지 영조가 행했던 것처럼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였고, 근위 부대로서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하여 그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등 영조조를 이어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정조는 1800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후기 영 · 정조의 문예 부흥기를 이룩하였다.
 정조는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에게서는 적출이 없었고,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순조(純祖)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정조의 친아버지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이지만 사도세자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불의로 죽었기 때문에 영조가 정조의 정통을 세워주기 위해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즉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정조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에게서 적출을 얻지 못하였고, 의빈 성씨(宜嬪成氏)에게서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를 얻었다. 문효세자는 정조 6년에 태어났고 정조 8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어난 지 다섯 해만에 홍역으로 훙(薨)하여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고, 묘호(廟號)를 문희(文禧)로, 묘(墓)를 효창(孝昌)이라고 정하였다.
 둘째 아들은 정조로부터 왕위를 이은 순조(純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