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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始祖) 한(翰)
제 1대조 이름(한글):시조 한 이름(한자):始祖 翰
우리 전주이씨의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이다.
전주(全州)의 연혁(沿革)
제 1대조 이름(한글):시조 한 이름(한자):始祖 翰
지금의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 比斯我 · 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에 주를 폐하 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 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 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고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 23)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018년(현종 9) 안남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다 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 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 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 (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 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895년(고종 32) 군이 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한 후 전북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35년 부로 승격, 1949년 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는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첫 이름이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 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 였다.
또 부의 북쪽 10리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따라서 우리 전주이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대체로 전주이씨라 부 르고 간혹 기호에 따라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이 전주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이 전주는 우리 전주이씨와 절대적 인 관계에 있고, 전주이씨를 빼놓고 전주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경단(肇慶壇)
제 1대조 이름(한글):시조 한 이름(한자):始祖 翰
`조경(肇慶)\'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우리 전주리씨 의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나라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 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 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 여 지키게 하고, 전라 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 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전의와 읍지에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고황제와 영조대왕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그 정성은 문헌으 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 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금년 봄에 재신(宰臣)을 보내어 왕자봉(王字峯) 아래 진좌(辰座) 언덕을 살펴보려 하 였더니 전설에 내려오는 대로 아래 위로 무덤의 형체가 있다 하므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하는데 정조대왕은 산을 봉하여 수호하던 절차에 따라 양지척(量地尺)으로써 땅을 측정했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또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산소 형체의 앞에다 제사지낼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지 내는 예를 올리게 하고 지키면서 받드는 관원 두 사람을 두어 모든 절차를 각 원(園)의 예 에 따르게 하니, 대저 우러러 아득하게 넓음은 하늘이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냄에는 제기와 제수가 제 자리를 차지하여 그 경건한 정성이 한결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이곳이니 만약 산 전체를 묘역으로 봉한다면 어디에다 사모하는 정을 부치리요?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조경단(肇慶壇) 비(碑)
제 1대조 이름(한글):시조 한 이름(한자):始祖 翰
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썼다.
이로 보면 우리의 시조할아버지의 묘가 이곳에 있었고 태조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 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 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 뒤 정조대왕도 산소 보존을 위하여 사방경계를 정 하는 등,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그 때까지 내려오던 비가 있었으나 비문이 전부 풍마우세로 닳 아 버리고 7자만 남았다는 내용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 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 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도 남아 있 지 않다.
또 조경단 영역은 현재 약 9천평 정도로 둘레의 담을 쌓은 것도 1972년 환의(桓儀) 현 종약원 이사장이 전북도지사로 있었고, 해권(海權)종현이 부지사로 있을 때 당시 대통령 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지금과 같이 정화했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로 지정되어 있다.
2세(世) 자연(自延)
제 2대조 이름(한글):자연 이름(한자):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자연(自延)인데 <경주이씨족보>에는 자연(子延)으로 표 기되어 있다.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자연공이 신라 경순왕 때 시중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翰) 시조공이 신라 경덕왕(742∼764 在位) 때 살았는데, 경순왕(927∼935 在位) 때까지는 170여 년이나 간격이 생기니 30년이 1세대라는 통념으로 보아서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경순왕 때 살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연공이 지냈다는 `시중(侍中)\'이란 벼슬은 요사이 내각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배위인 윤씨의 아버지 윤자인의 봉군호(封君號)인 진양군(晋陽君)은 후세의 군호로 후대에 올려 기록한 것일 것이다.
3세(世) 천상(天祥)
제 3대조 이름(한글):천상 이름(한자):天祥
2세 자연공의 아들로 이름은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 · 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하였다.
고려 시대 관직으로 지칭한 것이리라. 장인인 영일정씨의 관직 시랑(侍郞)은 신라 · 고려 때 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한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천상공은 젊어서 매우 호탕하였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 가 중앙관서에 들어가셔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가 9년만에 천문지리에 달통하여서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지라,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고서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 반드시 왕이 나오리 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 고 하였다.
4세(世) 광희(光禧)
제 4대조 이름(한글):광희 이름(한자):光禧
3세 천상공의 아들로 이름은 광희요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 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광희(光禧)를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광희(光喜)\'로 쓰기도 한다 했다.
태조고황제의 친구였던 이색(李穡 : 1328∼1396)이 지은 <환조대왕 정릉 신도비명(桓祖大王 定陵 神道碑銘)>에는 `전주리씨는 대성(大姓)으로 신라 아간 `광희\'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라고 하여 우리 시조를 `광희\'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완산실록>에는 별다른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세직(世稷 :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직공은 훌륭한 인물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당대의 은둔 군자인데 아들 8명을 두었다. 공은 이 아들들에게 형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참언과 재물을 멀리하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아들 8형제 중에 한 명만이 대를 잇고 나머지는 전염병에 모두 죽는 대목이 곁들어 져 있다.
5세(世) 입전(立全)
제 5대조 이름(한글):입전 이름(한자):立全
4세 광희공의 아들로 이름은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씨족원류>에는 입전공의 벼슬이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요, 이 입전공부터 고려의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 司徒 ·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는데 `사도\'가 높은 벼슬이기 때문에 앞에 이런 품계명을 덧붙여 `삼중대광사도\'라고 부른 듯하다.
`한림\'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준말로 고려 때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이었다.
<완산실록>에는 입전공의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에는 입전공이 문옹(文雍)으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8형제 중 막내로서 위로 7형이 모두 전염병으로 일시에 사망하여 합동 장례를 치르고 유리걸식하니, 임금님이 그 소식을 듣고 고결함에 탄복하여 고관의 직책까지 주었다는 내용이 곁들어져 있다.
또 <충효전>에도 이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나 입전공이 문옹(文翁) 으로 기록되고 8형제 중 장형으로 되어 있다.
6세(世) 긍휴(兢休)
제 6대조 이름(한글):긍휴 이름(한자):兢休
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 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 육금불(六金佛)이 와서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긍휴공이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긍휴공은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하고 9년(또는 8년)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하고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다 하였다.
7세(世) 염순(廉順)
제 7대조 이름(한글):염순 이름(한자):廉順
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완산실록>에는 염순공에 대한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6세(또는 28세) 때 문명(文名)을 날려 중국으로 들어가 송나라 휘종(徽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귀국하니, 고려조에서 기특하게 여겨 예천태수(醴泉太守)에 임명했다.
그 뒤 그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천자의 눈에 들어, 마침 쳐들어온 금(金)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대도독부원수(大都督副元帥)로 임명되어 4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부인 오씨(吳氏)가 7세 된 아들 화선(和善 : 華先)을 업고 9개월을 걸어 중국에 들어가 완탑촌(玩榻村 : 完塔村)에서 묵을 때였다.
이 날 밤 꿈에 팔척대인(八尺大人 : 六丈鐵人)이 나타나 말하기를“당신 남편의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 <충효전>에는 蜀山으로 적혀 있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씨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자살하려 하니 먼저 노인이 또 꿈에 나타나“죽지 말라. 훗날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여 깨닫고, 이튿날 문 밖을 나갔다.
그 때 한 여인이 슬피 울며 오는데, 거마(車馬)와 좌우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굉장하였다. 오씨가 나아가 물으니 답하되“나는 운남국(雲南國 : 漢南國) 우도독(禹都督)의 딸인데, 남편 곽필성(쥦必誠 : 郭必成)이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항주 대전에서 전사하여 그 시체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오씨도 그간의 일을 말하니, 그 우씨가 수레에서 내려 오씨의 손을 잡고,“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인심은 같으니 어찌 차마 모른 체하겠소?” 하고 함께 차에 태워 항주로 갔다.
그러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울부짖으며 낮에는 찾아 다니고 밤에는 복파장군(伏派將軍) 사당에서 잤다. 몇 개월이 되어도 찾지 못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조선에서 온 부원수의 사령(使令)이었는데, 이 부원수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살을 맞아 살아났으나 이렇게 불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고 부원수의 시체를 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모셔 올 때 중국에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제공하여 3개월만에 귀국하여 선산에 장례지내니 조상꾼이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 일화는 <완산실록>에서는 6세 긍휴공 사적에 비슷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세 책이 거의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한 소설적인 사료임을 짐작케 한다.
8세(世) 승삭(承朔)
제 8대조 이름(한글):승삭 이름(한자):承朔
7세 염순공의 아들로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시랑\'은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삭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효자라 칭했다. 나이 67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산맥을 보고 돌아오다가 청평산 (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객사하였다.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내렸으며, 서원에다 모시게 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없어졌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승삭이 화선(和善 : 和先)으로, 60세에 등과하여 65세에 벼슬이 평의사(平義使 : 平義士)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작고하여 국왕이 예관을 파견하여 호상하고, 평장사(平章使 : 平章事)로 증직하고 시호를 문학(文學) 이라 하고, 향린산 아래에다 서원을 짓고 모셨는데, 공근왕(恭勤王 : <충효전>에는 恭讓王) 때 소인배들이 참소하여 서원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9세(世) 충경(充慶)
제 9대조 이름(한글):충경 이름(한자):充慶
8세 승삭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경인데, <씨족원류>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 <목은집(牧隱集)>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충경공은 초년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유리걸식의 지경이었는데, 지관(地官) 김지원(金志元)이라는 이가 와서 “선대 조상의 산소가 흉지에 잘못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오.” 하므로, 그와 함께 향린산으로 올라가 산맥을 살펴보았는데, 김지원이 말하 기를 “7∼8대에 이르러는 멸망하고 말 땅이니, 마땅히 천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마땅한 땅이 어디에 있소?” 하니, 대답하되 “청령산(靑嶺山) 밑에 5대에 걸쳐 서 삼공(三公)이 날 땅이 있소.”라고 했다. 그래서 그리로 산소를 옮기려고 하는데, 이 날 밤 부인 윤씨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선조의 유골을 무슨 까닭으로 천장하려 하는가? 청령산 아래 5대에 삼공이 나올 땅은 곧 금가(琴哥)의 산소 자리이니, 금가 집에 리 씨가 들어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도리어 멸망할 땅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윤씨가 꿈의 조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김지원과 더불어 향린산 밑에 갔는데, 뇌성이 떨치더니 김지원은 벼락을 맞아 즉사하고, 충경공은 바 위 밑에 엎어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셨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똑같은 설화가 적혀 있는데, 다만 충경공의 이름을 희 흥(希興 : 喜興)으로, 김지원(金志元)을 김지원(金知元 : 金智原)으로, 배위 윤씨는 할머니 오 씨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10세(世) 경영(景英)
제 10대조 이름(한글):경영 이름(한자):景英
9세 충경공의 아들로 이름은 경영이다.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배위는 유수(留守) 윤필인(尹必仁)의 딸이다.
`유수\'는 수도 이외의 인근 도시 또는 행궁(行宮)에 두던 특수한 지방장관이다. 고려 ·조선조에 걸쳐 두었는데 중앙 관서의 직속 기관이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영공이 7세에 부모가 함께 돌아가시니 증조모 정씨(鄭氏)가 등에 업고 구걸하면서 키 워 16세가 되어 유수 윤필인의 딸에게 장가가셨다. 윤씨 부인은 증조모 정씨를 섬길 때, 증 조모 정씨가 나이가 많고 치아마저 없자 윤씨는 자신의 젖을 짜서 지성으로 효도하여 천수 를 마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런 손부라고 칭찬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이러하다. 경 영공의 이름이 `직(直)\' 또는 `진(進)\'으로 표기되고, 증조모가 오씨로, 강남의 큰 장사꾼 최 원(崔元 : 崔遠)에게 발탁되어 16세에 요명궁(寥明宮 : 瑤明宮) 거사(居士) 홍무(洪武 : <충 효전>에는 洪務日)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홍씨의 효행이 특이하여 97세 된 증조모 오씨가 치아가 없음을 알고 자신의 젖으로 봉양하여 101세까지 사시게 하고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 르는데 죽만 먹고 그 애통함이 예도를 넘었었다는 점이다.
11세(世) 충민(忠敏)
제 11대조 이름(한글):충민 이름(한자):忠敏
10세 경영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민이고 벼슬은 장사(長史)이었다. 배위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딸이다.
`장사\'라는 벼슬은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 있다.
`충민공은 처음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의탁할 데가 없었는데, 하루는 별안간 청의동자 (靑衣童子)가 나타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대개가 하늘과 사 람들을 원망하는데, 그대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허물하지 않으면서 천명을 기다리 니 어째서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시되, “궁하고 통달함이 모두 운명에 달려 있는 데, 어찌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망령되이 말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청의동자가 기꺼이 사례하고 한 물건을 주면서 “천명이 돌아올 때 이것이 변하여 활과 화살이 되어 교 룡(蛟龍)을 쏘게 될 것이오”라 하고 가거늘, 이에 보니 토기 모양은 아니고 술잔 모양 같았 다.
그것을 숨겨 두고 청림산(靑林山) 아래에서 그릇을 굽는데, 불합격품이 나오지 않아 집 안 형편이 차차 나아져 말년에는 부자 소리를 들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약간 다른 점은 이러 하다. 곧 `충민\'공의 이름이 `후경(厚慶)\'으로 나오고, 그는 9형제였는데 일시에 8형제가 전 염병으로 죽고, 막내인 그가 외톨이가 되어 강가에 가 낚시질을 하는데 천동(天童)이 내려와 이상한 물건을 주며 말했다는 것이다.
12세(世) 화(華)
제 12대조 이름(한글):화 이름(한자):華
11세 충민공의 아들로 이름은 화인데 추밀(樞密) 벼슬을 지내셨다.배위는 대언(代言) 벼슬을 한 황진(黃璡)의 딸이다.
\'추밀\'은 고려 때 왕명의 출납(出納) · 숙위(宿衛) · 군기(軍機) 등을 맡아 다스리는 관서 추밀원(樞密院)에 딸린 관원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가리킨다. 종2품 · 정3품 벼슬이었다. 그리고 `대언\'은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로 승선(承宣)이라 고도 했는데, 나중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화공은 처음에 집이 가난했으나 집안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술집과 기생집에만 다니며 자칭 협객(俠客)이라고 했는데, 부인 황씨가 홀로 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강도를 만 났으나 끝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 청림태수(靑林太守)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하고 정 려문을 내렸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비슷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화(華) 공을 덕량(德亮) 또는 덕랑(德郞)으로 적고, 부인 황씨를 김씨로 대신했으며, 그 부인이 효성스럽고 용감 하여 도적떼가 들어 재물을 강탈할 때 시어머니를 구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완산실록>의 내용을 부연하고 있다.
13세(世) 진유(珍有)
제 13대조 이름(한글):진유 이름(한자):珍有
12세 화공의 아들로 이름은 진유라 했는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일명 유진(有珍)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배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더 들어 있다.
`진유공은 처음에 집안이 가난하였으되 지극한 효도로써 어머니를 받들더니, 부인 오씨가 시집와 아내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가난하되 편안해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채소를 뜯어다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롭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항상 효자 효 부라고 칭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진유공의 이름을 천균(千鈞) 또는 천준(天俊)으로 표기하 고 어머니를 김씨로 표현한 외에는 대체로 <완산실록>과 같은 내용이다.
14세(世) 궁진(宮進)
제 14대조 이름(한글):궁진 이름(한자):宮進
13세 진유공의 아들로 이름은 궁진인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궁진공이 15세에 아무개[失名]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 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 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 어양(魚羊 : 鮮)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 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 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그러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이 대목을 더 각색하여 미화시키고 있다. 곧, 궁진공의 이름은 여열(餘說)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여열이 15세 때 학문을 가르친 선 생이 김대유(金大有)로 실명화(實名化)되고, 김대유가 꿈을 꾼 뒤 여열을 사위로 삼으며, 여 열이 27세에 등과하여 홀유궁(笏츉宮 : <충효전>에는 屹留宮으로 표기했음)의 교수관(敎授官)이 되니, 모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그래서 배륭대군(裴隆大君 : <충효전>에 는 濱龍大君으로 표기됨)이 여열의 기상과 문장을 보고 임금님께 추천하여 대제학(大提學) 을 제수하려 했는데, 중상하는 자 있어 여열은 벼슬을 팽개치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하다가 작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용부(勇夫)이고 차남이 단신(端信)이다. <씨족원류>에는 단 신을 단인(端仁) · 서인(瑞仁)으로 기록되었는데 글자가 비슷하여 이런 표기가 생겼을 것 이다. 이 단신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냈고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시중\'은 요사이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15세(世) 용부(勇夫)
제 15대조 이름(한글):용부 이름(한자):勇夫
14세 궁진공의 장남으로 이름은 용부요,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씨족원류>에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다.
`대장군\'은 고려 무관의 벼슬로 상장군(上將軍) 다음, 장군(將軍)의 위로 종3품이었다. `태자청도솔부\'는 태자좌청도솔부(太子左淸道率府)의 준말로 고려 때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은 관청이다. 그 관청의 장이 부수(府率)일 것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용부공은 3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계신데, 남의 모함을 받아 세살배기가 잘못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 때 16세 된 누님이 한 분 계셨고 공은 겨우 말을 익히는 때였 다.
마침 금(金)나라의 난리를 만나 중국 송나라 정부에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그 누님이 어 린 동생을 대신하여 징발되어 낙랑(樂浪) 지방에 이르니 원수 이민항(李敏恒)이 군사를 점 검하였다. 그 누님 이씨가 허리에 화살통을 비껴 차고 손에 화살을 들고 나서니, 그 자색이 남다르고 위풍이 당당하여 이민항 원수가 보고서 “그대는 뉘 집 아들인고?” 하므로, 대답 하되 “나는 한림(翰林) 리궁진(李宮進)의 아들 용부(勇夫)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으로 데려갔다. 원수 악비(岳飛) 장군이 우리 나라 장수와 대좌하여 군사를 점검할 때, 누님 이씨가 앞으로 나가 섰다. 악비 장군이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뉘 집 아가씨 인데 군대에 들어왔느냐? ”하므로 이씨는 시를 지어 악비 장군에게 말하니 내용은 이러하다.
이마에 점 찍히니 늙은 아버지 이름 빼낼 수 없어
군대에 채워지니 가는 허리의 몸이라고 어찌 애석해하리?
비단옷 벗고 차디 찬 철갑 옷을 갈아 입으니
국경지방에서 다행히 남자의 기풍을 펼 것이로세.
(點額難逃老父名
充軍何惜細腰躬
羅衣換着鐵衣冷
塞外幸伸男子風)
악비 장군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칭찬하고 이 시로 인해서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간신의 이간질로 악비 장군이 죽었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씨는 머리를 깎고 영고탑(寧古塔)까 지 떠돌아 가 아들을 낳고 살았다.
15세(世) 용부(勇夫) (2)
제 15대조 이름(한글):용부 이름(한자):勇夫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용부\'가 `충일(忠逸 : 忠溢)\'로, `이민항(李敏恒)이 이민행(李敏行)\'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책에서는 일화가 더 구체적이다. 악비가 진회(秦檜)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을 때 리씨의 손을 잡고 뱃속의 아이가 남아일 것이니 잘 키우면 7대 후에 친정 본종(本宗)의 자손들과 손 잡아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리씨는 머리를 깎고 일부러 장애자로 만들어 구걸하며 방성지(方城池) 면수(沔水) 가에 사는 왜인(倭人) 집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러나 <충효전>은 더 구체적이다.
리씨가 악비를 사별하고 스스로 병자로 만들어 유리걸식하다가 방령지(方靈地)에 이르러 면수정장(綿水亭長) 갈가(乫家)에 의탁하니 이는 이적(夷狄)이었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의 7대손에 이르러 퉁두란( 李之蘭 : 靑海李氏 始祖)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 용부 대장군의 아들이 둘이 있으니 장남은 인(璘)이요, 차남은 거(?)로 이분이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를 이루어 시중공파에 이어 두번째 지파가 갈라져 나갔다.
<선원계보>에는 `인\'과 `거\' 두 형제만 기록되어 있으나, <씨족원류>에는 용부 대장군은 3남 1녀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아래와 같다.
용부 ――子 준 의
(勇夫) (俊義)
―子 의 방 ―― 女 사평왕후
(義方) (思平王后)
―子 인 ―― 子 양 무
(璘)(일명: 隣) (陽茂)
―女 우학유 ―- 女 유 택
(于學儒) (柳澤)
16세(世) 인(璘) (1)
제 16대조 이름(한글):인 이름(한자):璘
15세 용부공의 아들로 이름은 인이고 내시집주(內侍 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 셨다. 그러나 인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경 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하자, 황후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대극(奇大極)에게 들었는 데 우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완산리씨가 뒤를 잇는다고 하였습니다.”이 에 왕이 기대극을 불러다가 묻기를 “리씨가 왕이 될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기대극 이 대답하기를 “신이 기린산맥(麒麟山脈)을 살펴보니 반드시 왕이 일어날 곳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기대극이 말하기를 “옛부터 제왕이 성을 바꾸 어 계승함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옛 사람 김지원(金志元)이 그 무덤을 이장하려다가 도리어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어찌 무덤을 파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 시오.
<편목(編目)>이란 책에 `나무의 아들[李]이 양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다[魚羊]\'고 하였는데, 지금 그 중이 아직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나 신년(申年 : 壬申年, 1392) 이 멀지 않았으니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지사(地師)더러 기린산맥 을 살펴보고 오라 하니,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산맥을 살펴보니 자손들이 끊길 형국이라 별로 왕이 일어날 곳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어 “그렇다면 기대극의 흉칙한 말 은 어째서 생겼느냐?” 하고 두 사람을 불러 대질시키니, 기대극이 묻기를 “기린산이 어떤 좌향(坐向)인가?” 하자 지사가 대답하기를 “계좌정향(癸坐丁向)이오.”라고 하였다.
기대 극이 말하기를 “그 곳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용과 뱀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요, 천명 이 반드시 영험할 것이요, 기린산은 금강산의 산맥이 뻗어 와 용과 물이 꼭 맞아 용이 구오 (九五 : 王位)에 펼쳐 있어 그것이 베푸는 은혜가 물고기[魚]나 양(羊)에까지 내리는 격이 요”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로하여 인(璘)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吉城 : 吉州) 으로 귀양 보내고, 군사 3백 명을 파견하여 무덤을 파내게 하였는데, 그 군인들이 모두 향린 산 밑에서 벼락을 맞아 몰살했다.
이에 왕은 탄식하여 “하늘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는 할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중지했다.\'
부인 문씨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때 오랑캐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 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으로 경산(慶山)으 로 이배(移配)되어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안남(安南)으로 이배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