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世) 양무(陽茂) [생몰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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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9-15 17:05 조회627회 댓글0건본문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준경모`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 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 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영경모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준영경모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 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은 이 두 묘를 능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곧 백우 금관(白牛金棺) 설화다.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 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 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 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1221년(고려 고종 8)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 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이 있어 `이양무'란 이름이 <고려사>에 단 한번 비치는데, 양무장군이 바로 이분인지는 확신이 없다. 동명이인 일 것이다.
또 <완산실록>에는 양무장군에 대한 일화가 없고 대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이 런 일화가 있다. 양무장군은 덕만(德蔓 : 德滿)으로 표기되어 있다.
덕만이 조실부모하고 경흥부(慶興府)로부터 안정부(安定府)로 옮겨와 사락(謝樂 : 오랑캐 이름)의 집에서 목동 노릇을 했다. 소와 말 1천여 마리를 기르는데, 하루는 근방의 노인 20여 명이 산에 올라 화전(花煎)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노인들이 덕만을 보고, 자기들에게 와서 심부름이나 하면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덕만은 의리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노인들이 감복하여 위로했다.
그 노인들 틈에 윤학(尹鶴 : <충효전>에는 李確)이라는 노인이 밤에 꿈을 꾸는데, 흰 용이 천랑산(天狼山 :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부터 날아서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에 놀란 그 노인이 딸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되, “엊저녁에 어떤 건장한 청년이 방으로 들어와 덮치는데 소리를 질러도 말이 입에서 안 나오고, 몸을 틀어도 몸이 빠져 나가지 않아 일을 당하고는 이름을 물으니 사락의 집 목동 덕만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 노인이 천생연분이라 여기고 그와 결혼을 시켰다.
물론 황당무계한 설화이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은 모두 우리의 시 조로부터 태조고황제 개국 전까지의 일화를 창작하여 소설화한 것으로 흥미 본위의 야담류 (野談類) 의 작품이니 사료적 가치로야 별로 칠 것이 없지만 이런 유행본(流行本)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 갸륵한 현상이라 하겠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 소를 영경묘 ·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 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 영경묘 · 재실 ·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 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 영밀(英謐) · 영습(英襲) 3형 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하나 이를 증명할 기록은 없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준경모`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 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 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영경모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준영경모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 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은 이 두 묘를 능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곧 백우 금관(白牛金棺) 설화다.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 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 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 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1221년(고려 고종 8)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 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이 있어 `이양무'란 이름이 <고려사>에 단 한번 비치는데, 양무장군이 바로 이분인지는 확신이 없다. 동명이인 일 것이다.
또 <완산실록>에는 양무장군에 대한 일화가 없고 대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이 런 일화가 있다. 양무장군은 덕만(德蔓 : 德滿)으로 표기되어 있다.
덕만이 조실부모하고 경흥부(慶興府)로부터 안정부(安定府)로 옮겨와 사락(謝樂 : 오랑캐 이름)의 집에서 목동 노릇을 했다. 소와 말 1천여 마리를 기르는데, 하루는 근방의 노인 20여 명이 산에 올라 화전(花煎)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노인들이 덕만을 보고, 자기들에게 와서 심부름이나 하면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덕만은 의리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노인들이 감복하여 위로했다.
그 노인들 틈에 윤학(尹鶴 : <충효전>에는 李確)이라는 노인이 밤에 꿈을 꾸는데, 흰 용이 천랑산(天狼山 :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부터 날아서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에 놀란 그 노인이 딸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되, “엊저녁에 어떤 건장한 청년이 방으로 들어와 덮치는데 소리를 질러도 말이 입에서 안 나오고, 몸을 틀어도 몸이 빠져 나가지 않아 일을 당하고는 이름을 물으니 사락의 집 목동 덕만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 노인이 천생연분이라 여기고 그와 결혼을 시켰다.
물론 황당무계한 설화이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은 모두 우리의 시 조로부터 태조고황제 개국 전까지의 일화를 창작하여 소설화한 것으로 흥미 본위의 야담류 (野談類) 의 작품이니 사료적 가치로야 별로 칠 것이 없지만 이런 유행본(流行本)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 갸륵한 현상이라 하겠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 소를 영경묘 ·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 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 영경묘 · 재실 ·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 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 영밀(英謐) · 영습(英襲) 3형 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하나 이를 증명할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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