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한(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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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9-15 17:16 조회7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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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주이씨의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이다.

전주(全州)의 연혁(沿革)
지금의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 比斯我 · 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에 주를 폐하 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 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 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고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 23)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016년(현종 9) 안남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다 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 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 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 (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 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895년(고종 32) 군이 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한 후 전북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35년 부로 승격, 1949년 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는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첫 이름이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 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 였다.

또 부의 북쪽 10리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따라서 우리 전주이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대체로 전주이씨라 부 르고 간혹 기호에 따라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이 전주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이 전주는 우리 전주이씨와 절대적 인 관계에 있고, 전주이씨를 빼놓고 전주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경단(肇慶壇)
`조경(肇慶)'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우리 전주리씨 의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나라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 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 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 여 지키게 하고, 전라 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 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전의와 읍지에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고황제와 영조대왕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그 정성은 문헌으 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 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금년 봄에 재신(宰臣)을 보내어 왕자봉(王字峯) 아래 진좌(辰座) 언덕을 살펴보려 하 였더니 전설에 내려오는 대로 아래 위로 무덤의 형체가 있다 하므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하는데 정조대왕은 산을 봉하여 수호하던 절차에 따라 양지척(量地尺)으로써 땅을 측정했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또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산소 형체의 앞에다 제사지낼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지 내는 예를 올리게 하고 지키면서 받드는 관원 두 사람을 두어 모든 절차를 각 원(園)의 예 에 따르게 하니, 대저 우러러 아득하게 넓음은 하늘이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냄에는 제기와 제수가 제 자리를 차지하여 그 경건한 정성이 한결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이곳이니 만약 산 전체를 묘역으로 봉한다면 어디에다 사모하는 정을 부치리요?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조경단(肇慶壇) 비(碑)
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썼다.

`이로 보면 우리의 시조할아버지의 묘가 이곳에 있었고 태조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 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 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 뒤 정조대왕도 산소 보존을 위하여 사방경계를 정 하는 등,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그 때까지 내려오던 비가 있었으나 비문이 전부 풍마우세로 닳 아 버리고 7자만 남았다는 내용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 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 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도 남아 있 지 않다.

또 조경단 영역은 현재 약 9천평 정도로 둘레의 담을 쌓은 것도 1972년 환의(桓儀) 현 종약원 이사장이 전북도지사로 있었고, 해권(海權)종현이 부지사로 있을 때 당시 대통령 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지금과 같이 정화했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로 지정되어 있다.

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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