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世) 인(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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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9-15 17:09 조회699회 댓글0건본문
15세 용부공의 아들로 이름은 인이고 내시집주(內侍 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 셨다. 그러나 인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경 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하자, 황후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대극(奇大極)에게 들었는 데 우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완산리씨가 뒤를 잇는다고 하였습니다.”이 에 왕이 기대극을 불러다가 묻기를 “리씨가 왕이 될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기대극 이 대답하기를 “신이 기린산맥(麒麟山脈)을 살펴보니 반드시 왕이 일어날 곳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기대극이 말하기를 “옛부터 제왕이 성을 바꾸 어 계승함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옛 사람 김지원(金志元)이 그 무덤을 이장하려다가 도리어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어찌 무덤을 파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 시오.
<편목(編目)>이란 책에 `나무의 아들[李]이 양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다[魚羊]'고 하였는데, 지금 그 중이 아직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나 신년(申年 : 壬申年, 1392) 이 멀지 않았으니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지사(地師)더러 기린산맥 을 살펴보고 오라 하니,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산맥을 살펴보니 자손들이 끊길 형국이라 별로 왕이 일어날 곳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어 “그렇다면 기대극의 흉칙한 말 은 어째서 생겼느냐?” 하고 두 사람을 불러 대질시키니, 기대극이 묻기를 “기린산이 어떤 좌향(坐向)인가?” 하자 지사가 대답하기를 “계좌정향(癸坐丁向)이오.”라고 하였다.
기대 극이 말하기를 “그 곳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용과 뱀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요, 천명 이 반드시 영험할 것이요, 기린산은 금강산의 산맥이 뻗어 와 용과 물이 꼭 맞아 용이 구오 (九五 : 王位)에 펼쳐 있어 그것이 베푸는 은혜가 물고기[魚]나 양(羊)에까지 내리는 격이 요”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로하여 인(璘)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吉城 : 吉州) 으로 귀양 보내고, 군사 3백 명을 파견하여 무덤을 파내게 하였는데, 그 군인들이 모두 향린 산 밑에서 벼락을 맞아 몰살했다.
이에 왕은 탄식하여 “하늘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는 할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중지했다.'
부인 문씨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때 오랑캐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 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으로 경산(慶山)으 로 이배(移配)되어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안남(安南)으로 이배하라고 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인공의 이름을 정량(貞亮 : 定良)으로,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부국태(父國太) 또는 부국대부(富國大夫) 염우(?祐)로, 기대극(奇大極)이 기대승(奇大升)으로, 기린산(麒麟山)이 향린산(香麟山) 또는 향인산(香因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인(璘) 공의 휘를 인(隣)으로도 보느냐가 문제이다. 이 동음이자(同音異字)가 우리 선원선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원계보>에는 용부(勇夫) 공의 아드님으로 인(璘)과 거(?)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璘)을 인(隣)과 같이 볼 때는 준의(俊義)와 의방(義方) 두 형이 생기고, 매제[于學儒]가 더 늘어난다.
<고려사> · <태조실록> · <씨족원류>에는 인(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璘)과 인(隣) 을 같은 분으로 보는 이유는
<선원계보>에 `인(璘)공은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요, 배위 는 문극겸(文克謙)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고,
<고려사> · <문극겸열전(文克謙列傳)>에 “문극겸은 미혼의 딸이 있었는데, 리의방(李義方 : ?∼1174)의 아우 리린(李隣)에게 시집보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 <리의방열전(李義方列傳)>에 1174년(고려 명종 4) 1월에 중흥사(重興寺) 중 등 2천 명이 리의방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뒤, 리 준의(李俊義)와 리의방이 싸우므로 정중부(鄭仲夫 : ?∼1178)가 말하기를 “형제가 궁중에서 싸우다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며 리준의를 살해하려 하는 등의 기록으로 리준의와 리의 방이 한 형제임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또, <고려사> · <우학유열전(于學儒列傳)>에는 “정중부의 난을 꾸밀 때 우학유 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성공한 후에 그를 죽이려 하니, 그는 겁 이 나서 리의방의 누이에게 장가 가서 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준의 · 리의방 · 리린 · 우학유가 남매 지간이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기록은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을 비롯하여 타성의 학자들도 그렇 게 주장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선원계보>에는 인(璘)공의 아우에 거(?)공만 아우로 기록되어 있으니 어째서일 까? <고려사> · <최균전(崔均傳)>에 이런 기사가 있다. “1174년(고려 명종 4) 9월에 서 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 리의방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때 화주(和州 : 永興)의 낭장(郞將) 리거(李?)가 성문을 열어 주어 정중부군이 퇴각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리거란 분이 과연 우리의 선조인 평장사공일까? 동명이인일까? 시대가 비슷한 것은 수긍이 가는데, 형제간에 행동이 다르니 의아하게 느껴진다. 리준의가 마지막에 리의방을 죽이려 한 일화나, 리의방을 죽이려 쳐들어온 조위총의 편을 들어 리거가 리의방 에게 불리하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형제간의 의리상 부도덕한 것이다.
물론 형제간에도 뜻이 다르고 이해가 달라 해치려던 일은 동서고금에도 있는 일이나 준의 · 의방 · 인 · 거를 4형제로 볼 때 관계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으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리의방은 정중부난 때 제2인자로, 총참모로 그의 지략에 의하여 그 일이 성공된 것이다. 혁명이 성공한 뒤 1174년(고려 명종 4) 3월 기축일에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니 <고려사> <후비열전(后妃列傳)>에 “강종(康宗) 사평왕후(思平王后) 리씨는 의방의 딸로 강종이 태자였을 때 맞아들여 수령공주(壽寧公主)를 낳았는데 의방이 죽음을 당하자 쫓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리의방은 한때 제일의 권력자로 부원군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나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18일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보낸 중 종감(宗?)에게 피살되니 그 집안은 만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170년(고려 의종 24) 혁명을 일으킨 지 4년만의 일이었다.
리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인 등 1백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이 지은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이 때 태자비는 임신 8개월이라 의종 임금이 보류해 두었었는데 두 달 후에 딸을 낳고 이듬해 3월에 폐출해 버렸다.
그러니 인(璘)과 인(隣)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우리 선원선계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치 욕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분을 별개의 인물로 볼 때는 우리의 <선원계보>대로 단 순해지나, 요는 인(璘)공이 내시집주(內侍執奏) 벼슬이란 것과 문극겸의 딸을 아내로 맞으신 것이 똑같기 때문에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어렵다.
내시집주란 왕명의 출납(出納)과 숙위(宿衛)의 임무를 띠고, 임금 곁에서 복무하는 조선조 때 승정원 내 관리같이 생각되는데, <고려사>에는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계해일에 리 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고려사> ·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 등의 기록대로 인(璘)과 인 (隣)이 같은 분이라 가정하면 용부(勇夫) 공의 자녀는 4남 1녀가 되고, 1174년(고려 명종 4) 에 준의 · 의방 · 인 세 분이 동시에 작고한 것이 된다.
그러면 <선원계보>에서는 왜 준 의 · 의방을 제적했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려 시대이지만 나라의 역적으로 몰린 분들이라 족보에서 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174년부터 1392년까지는 218 년 간이다.
16세 인(璘)공부터 태조고황제까지는 6대의 기간이니, 30년을 1세로 치면 그럴 듯하게 맞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인(璘)공의 아들로 양무(陽茂)장군과 딸 유택(柳澤)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 셨다. 그러나 인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경 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하자, 황후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대극(奇大極)에게 들었는 데 우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완산리씨가 뒤를 잇는다고 하였습니다.”이 에 왕이 기대극을 불러다가 묻기를 “리씨가 왕이 될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기대극 이 대답하기를 “신이 기린산맥(麒麟山脈)을 살펴보니 반드시 왕이 일어날 곳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기대극이 말하기를 “옛부터 제왕이 성을 바꾸 어 계승함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옛 사람 김지원(金志元)이 그 무덤을 이장하려다가 도리어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어찌 무덤을 파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 시오.
<편목(編目)>이란 책에 `나무의 아들[李]이 양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다[魚羊]'고 하였는데, 지금 그 중이 아직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나 신년(申年 : 壬申年, 1392) 이 멀지 않았으니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지사(地師)더러 기린산맥 을 살펴보고 오라 하니,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산맥을 살펴보니 자손들이 끊길 형국이라 별로 왕이 일어날 곳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어 “그렇다면 기대극의 흉칙한 말 은 어째서 생겼느냐?” 하고 두 사람을 불러 대질시키니, 기대극이 묻기를 “기린산이 어떤 좌향(坐向)인가?” 하자 지사가 대답하기를 “계좌정향(癸坐丁向)이오.”라고 하였다.
기대 극이 말하기를 “그 곳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용과 뱀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요, 천명 이 반드시 영험할 것이요, 기린산은 금강산의 산맥이 뻗어 와 용과 물이 꼭 맞아 용이 구오 (九五 : 王位)에 펼쳐 있어 그것이 베푸는 은혜가 물고기[魚]나 양(羊)에까지 내리는 격이 요”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로하여 인(璘)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吉城 : 吉州) 으로 귀양 보내고, 군사 3백 명을 파견하여 무덤을 파내게 하였는데, 그 군인들이 모두 향린 산 밑에서 벼락을 맞아 몰살했다.
이에 왕은 탄식하여 “하늘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는 할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중지했다.'
부인 문씨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때 오랑캐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 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으로 경산(慶山)으 로 이배(移配)되어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안남(安南)으로 이배하라고 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인공의 이름을 정량(貞亮 : 定良)으로,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부국태(父國太) 또는 부국대부(富國大夫) 염우(?祐)로, 기대극(奇大極)이 기대승(奇大升)으로, 기린산(麒麟山)이 향린산(香麟山) 또는 향인산(香因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인(璘) 공의 휘를 인(隣)으로도 보느냐가 문제이다. 이 동음이자(同音異字)가 우리 선원선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원계보>에는 용부(勇夫) 공의 아드님으로 인(璘)과 거(?)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璘)을 인(隣)과 같이 볼 때는 준의(俊義)와 의방(義方) 두 형이 생기고, 매제[于學儒]가 더 늘어난다.
<고려사> · <태조실록> · <씨족원류>에는 인(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璘)과 인(隣) 을 같은 분으로 보는 이유는
<선원계보>에 `인(璘)공은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요, 배위 는 문극겸(文克謙)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고,
<고려사> · <문극겸열전(文克謙列傳)>에 “문극겸은 미혼의 딸이 있었는데, 리의방(李義方 : ?∼1174)의 아우 리린(李隣)에게 시집보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 <리의방열전(李義方列傳)>에 1174년(고려 명종 4) 1월에 중흥사(重興寺) 중 등 2천 명이 리의방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뒤, 리 준의(李俊義)와 리의방이 싸우므로 정중부(鄭仲夫 : ?∼1178)가 말하기를 “형제가 궁중에서 싸우다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며 리준의를 살해하려 하는 등의 기록으로 리준의와 리의 방이 한 형제임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또, <고려사> · <우학유열전(于學儒列傳)>에는 “정중부의 난을 꾸밀 때 우학유 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성공한 후에 그를 죽이려 하니, 그는 겁 이 나서 리의방의 누이에게 장가 가서 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준의 · 리의방 · 리린 · 우학유가 남매 지간이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기록은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을 비롯하여 타성의 학자들도 그렇 게 주장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선원계보>에는 인(璘)공의 아우에 거(?)공만 아우로 기록되어 있으니 어째서일 까? <고려사> · <최균전(崔均傳)>에 이런 기사가 있다. “1174년(고려 명종 4) 9월에 서 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 리의방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때 화주(和州 : 永興)의 낭장(郞將) 리거(李?)가 성문을 열어 주어 정중부군이 퇴각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리거란 분이 과연 우리의 선조인 평장사공일까? 동명이인일까? 시대가 비슷한 것은 수긍이 가는데, 형제간에 행동이 다르니 의아하게 느껴진다. 리준의가 마지막에 리의방을 죽이려 한 일화나, 리의방을 죽이려 쳐들어온 조위총의 편을 들어 리거가 리의방 에게 불리하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형제간의 의리상 부도덕한 것이다.
물론 형제간에도 뜻이 다르고 이해가 달라 해치려던 일은 동서고금에도 있는 일이나 준의 · 의방 · 인 · 거를 4형제로 볼 때 관계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으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리의방은 정중부난 때 제2인자로, 총참모로 그의 지략에 의하여 그 일이 성공된 것이다. 혁명이 성공한 뒤 1174년(고려 명종 4) 3월 기축일에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니 <고려사> <후비열전(后妃列傳)>에 “강종(康宗) 사평왕후(思平王后) 리씨는 의방의 딸로 강종이 태자였을 때 맞아들여 수령공주(壽寧公主)를 낳았는데 의방이 죽음을 당하자 쫓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리의방은 한때 제일의 권력자로 부원군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나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18일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보낸 중 종감(宗?)에게 피살되니 그 집안은 만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170년(고려 의종 24) 혁명을 일으킨 지 4년만의 일이었다.
리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인 등 1백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이 지은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이 때 태자비는 임신 8개월이라 의종 임금이 보류해 두었었는데 두 달 후에 딸을 낳고 이듬해 3월에 폐출해 버렸다.
그러니 인(璘)과 인(隣)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우리 선원선계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치 욕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분을 별개의 인물로 볼 때는 우리의 <선원계보>대로 단 순해지나, 요는 인(璘)공이 내시집주(內侍執奏) 벼슬이란 것과 문극겸의 딸을 아내로 맞으신 것이 똑같기 때문에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어렵다.
내시집주란 왕명의 출납(出納)과 숙위(宿衛)의 임무를 띠고, 임금 곁에서 복무하는 조선조 때 승정원 내 관리같이 생각되는데, <고려사>에는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계해일에 리 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고려사> ·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 등의 기록대로 인(璘)과 인 (隣)이 같은 분이라 가정하면 용부(勇夫) 공의 자녀는 4남 1녀가 되고, 1174년(고려 명종 4) 에 준의 · 의방 · 인 세 분이 동시에 작고한 것이 된다.
그러면 <선원계보>에서는 왜 준 의 · 의방을 제적했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려 시대이지만 나라의 역적으로 몰린 분들이라 족보에서 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174년부터 1392년까지는 218 년 간이다.
16세 인(璘)공부터 태조고황제까지는 6대의 기간이니, 30년을 1세로 치면 그럴 듯하게 맞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인(璘)공의 아들로 양무(陽茂)장군과 딸 유택(柳澤)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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