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世) 염순(廉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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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9-15 17:13 조회5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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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완산실록>에는 염순공에 대한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6세(또는 28세) 때 문명(文名)을 날려 중국으로 들어가 송나라 휘종(徽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귀국하니, 고려조에서 기특하게 여겨 예천태수(醴泉太守)에 임명했다.

그 뒤 그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천자의 눈에 들어, 마침 쳐들어온 금(金)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대도독부원수(大都督副元帥)로 임명되어 4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부인 오씨(吳氏)가 7세 된 아들 화선(和善 : 華先)을 업고 9개월을 걸어 중국에 들어가 완탑촌(玩榻村 : 完塔村)에서 묵을 때였다.

이 날 밤 꿈에 팔척대인(八尺大人 : 六丈鐵人)이 나타나 말하기를“당신 남편의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 <충효전>에는 蜀山으로 적혀 있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씨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자살하려 하니 먼저 노인이 또 꿈에 나타나“죽지 말라. 훗날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여 깨닫고, 이튿날 문 밖을 나갔다.

그 때 한 여인이 슬피 울며 오는데, 거마(車馬)와 좌우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굉장하였다. 오씨가 나아가 물으니 답하되“나는 운남국(雲南國 : 漢南國) 우도독(禹都督)의 딸인데, 남편 곽필성(쥦必誠 : 郭必成)이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항주 대전에서 전사하여 그 시체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오씨도 그간의 일을 말하니, 그 우씨가 수레에서 내려 오씨의 손을 잡고,“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인심은 같으니 어찌 차마 모른 체하겠소?” 하고 함께 차에 태워 항주로 갔다.

그러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울부짖으며 낮에는 찾아 다니고 밤에는 복파장군(伏派將軍) 사당에서 잤다. 몇 개월이 되어도 찾지 못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조선에서 온 부원수의 사령(使令)이었는데, 이 부원수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살을 맞아 살아났으나 이렇게 불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고 부원수의 시체를 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모셔 올 때 중국에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제공하여 3개월만에 귀국하여 선산에 장례지내니 조상꾼이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 일화는 <완산실록>에서는 6세 긍휴공 사적에 비슷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세 책이 거의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한 소설적인 사료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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