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世) 긍휴(兢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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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9-15 17:14 조회5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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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 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 육금불(六金佛)이 와서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긍휴공이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긍휴공은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하고 9년(또는 8년)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하고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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