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의안대군(義安大君) 1348∼1408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환조대왕과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화(和)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綠大夫)이며 태조고황제의 동생이다. 고려 공민왕 때 대장군으로서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고 우왕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때 조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활약하여 1393년(태조 2) 회군1등공신 녹권을 받았다. 1389년 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순충좌명(純忠佐命)개국1등공신 녹권을 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1395년(태조 4) 태조고황제를 모시고 조정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개국공신 정도전은 <삼봉집(三峯集)>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요정기(二樂亭記)\'가 있다. 내용은 태조고황제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 좌우 정승과 동맹한 이들이 지방의 주군으로 부임하는 이들을 전송한 장소가 바로 이요정이다. 석별의 아쉬운 정을 나누는 장면, 한강 물줄기가 한 눈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 등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요정은 바로 의안백의 별장이요 또한 그의 호이기도 하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사(定社)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았다. 1400년(정종 2) 영삼사사 겸 판의금부사(領三司事兼判議禁府事)에 임명되었다. 1401년(태종 1)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명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고 의안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402년(태종 2) 왕실이 안정되어 체제개편을 단행하니 민심이 수습되어 태종대왕은 2월 한가한 날을 택하여 대군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었는데 백발백중 과녁을 뚫은 의안대군에게 수우각(水牛角)을 내려주었다. 한편 그 해 10월 13일에 임금은 태평관에 가서 중국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전(溫全)이 자신의 자리가 왕태(汪泰)의 아래에 베풀어졌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사람을 시켜 두 번이나 청하자 그제서야 잔치에 나왔다. 온전은 직책이 왕태보다 높았으나 왕태가 조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온전의 윗자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이런 심중을 훤히 들여다 본 대군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권하니 왕태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임금이 예기치 못했던 태도변화에 의아해 하면서 묻기를 “천사(天使)는 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술잔을 받소?” 하자, 왕태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분은 국왕의 숙부인 동시에 개국의 1등공신이며 문무에 달통하여 의정부와 병권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조정의 가장 으뜸가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 신분도 높으려니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온후하고도 강직한 성품과 영명한 통솔력을 이전부터 흠모해 오던 터인지라 이렇게 직접 술잔을 따라 주니 저는 빈주(賓主)의 예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1404년(태종 4) 1월 대군의 어머니 정안옹주 김씨가 별세했다. 태종대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친상하였으며 특별히 육선(肉膳)을 하사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후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환조대왕이 1360년(공민왕 9)에 승하하자 태조고황제는 정안옹주 김씨를 서울의 제택으로 모셔와 매우 공손히 섬겼다. 한편 공민왕은 태조고황제를 존경하는 까닭에 정안옹주 김씨의 아들 의안대군을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귀한 음식물을 내려 어머니 김씨에게 드리도록 하였다. 공민왕의 지극한 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 김씨에게는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여주었다. 태조고황제도 공민왕의 이같은 보살펴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 : 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대군과 형 원계(元桂)와 더불어 항상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08년(태종 8)에 돌아가니 향년 61세였으며 태조고황제가 승하한 지 다섯달 뒤였다. 1410년(태종 10) 7월 종묘 태조고황제 묘정에 배향되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때 조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활약하여 1393년(태조 2) 회군1등공신 녹권을 받았다. 1389년 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순충좌명(純忠佐命)개국1등공신 녹권을 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1395년(태조 4) 태조고황제를 모시고 조정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개국공신 정도전은 <삼봉집(三峯集)>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요정기(二樂亭記)\'가 있다. 내용은 태조고황제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 좌우 정승과 동맹한 이들이 지방의 주군으로 부임하는 이들을 전송한 장소가 바로 이요정이다. 석별의 아쉬운 정을 나누는 장면, 한강 물줄기가 한 눈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 등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요정은 바로 의안백의 별장이요 또한 그의 호이기도 하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사(定社)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았다. 1400년(정종 2) 영삼사사 겸 판의금부사(領三司事兼判議禁府事)에 임명되었다. 1401년(태종 1)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명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고 의안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402년(태종 2) 왕실이 안정되어 체제개편을 단행하니 민심이 수습되어 태종대왕은 2월 한가한 날을 택하여 대군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었는데 백발백중 과녁을 뚫은 의안대군에게 수우각(水牛角)을 내려주었다. 한편 그 해 10월 13일에 임금은 태평관에 가서 중국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전(溫全)이 자신의 자리가 왕태(汪泰)의 아래에 베풀어졌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사람을 시켜 두 번이나 청하자 그제서야 잔치에 나왔다. 온전은 직책이 왕태보다 높았으나 왕태가 조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온전의 윗자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이런 심중을 훤히 들여다 본 대군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권하니 왕태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임금이 예기치 못했던 태도변화에 의아해 하면서 묻기를 “천사(天使)는 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술잔을 받소?” 하자, 왕태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분은 국왕의 숙부인 동시에 개국의 1등공신이며 문무에 달통하여 의정부와 병권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조정의 가장 으뜸가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 신분도 높으려니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온후하고도 강직한 성품과 영명한 통솔력을 이전부터 흠모해 오던 터인지라 이렇게 직접 술잔을 따라 주니 저는 빈주(賓主)의 예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1404년(태종 4) 1월 대군의 어머니 정안옹주 김씨가 별세했다. 태종대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친상하였으며 특별히 육선(肉膳)을 하사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후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환조대왕이 1360년(공민왕 9)에 승하하자 태조고황제는 정안옹주 김씨를 서울의 제택으로 모셔와 매우 공손히 섬겼다. 한편 공민왕은 태조고황제를 존경하는 까닭에 정안옹주 김씨의 아들 의안대군을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귀한 음식물을 내려 어머니 김씨에게 드리도록 하였다. 공민왕의 지극한 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 김씨에게는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여주었다. 태조고황제도 공민왕의 이같은 보살펴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 : 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대군과 형 원계(元桂)와 더불어 항상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08년(태종 8)에 돌아가니 향년 61세였으며 태조고황제가 승하한 지 다섯달 뒤였다. 1410년(태종 10) 7월 종묘 태조고황제 묘정에 배향되었다.
익천군(益川君) ?∼143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점(漸), 대군의 7남으로 익천군(益川君)으로 봉군되었다. 1399년(정종 1) 4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종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경연시독관 배중륜에게 “숙부의 아들 점이 종친으로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범상한 예가 아니다. 네가 집현전 상서사(尙瑞司)와 삼관의 여러 선비와 함께 의안공의 집에 가서 치하하라.”고 일렀다.
1414년(태종 14) 세자시사관과 첨지돈녕부사, 1421년(세종 3) 공조참의, 1425년(세종 7) 우군동지총제, 1426년(세종 8) 부유후(副留侯), 1430년(세종 12) 좌군총제, 1431년(세종 13) 동지돈녕부사, 1432년(세종 14) 11월에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433년(세종 15) 12월 18일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부의했다. 한편 장남 의산(義山)은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1414년(태종 14) 세자시사관과 첨지돈녕부사, 1421년(세종 3) 공조참의, 1425년(세종 7) 우군동지총제, 1426년(세종 8) 부유후(副留侯), 1430년(세종 12) 좌군총제, 1431년(세종 13) 동지돈녕부사, 1432년(세종 14) 11월에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433년(세종 15) 12월 18일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부의했다. 한편 장남 의산(義山)은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전천군(全川君) ? ∼ ?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교(?), 대군의 5남으로 판교령과 세자시사관(世子侍射官)을 역임했으며 전천군(全川君)으로 봉군되었다.
창선군(昌善君) ? ∼ ?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근생(根生), 대군의 손자이며 창선군(昌善君)으로 봉군되었다. 1468년(세조 14) 7월에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지냈으며 행 호분위 중부사정(行虎賁衛中部司正)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경부인 낙안이씨(樂安李氏)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낙안이씨(樂安李氏)이다.
창성군(昌城君) ? ∼ ?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의경(義敬), 대군의 손자이며 창성군(昌城君)으로 봉군되었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학천군(鶴川君)의 장남이다. 사정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청릉군(靑陵君) 1426∼1486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희철(希哲), 대군의 증손이며 청릉군(靑陵君)으로 봉군되었다. 공조 · 형조판서를 지낸 학천군의 손자이다. 사정공부사(司正公府使)를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풍안군(豊安君) 1403∼146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효손(孝孫), 대군의 손자이며 영천군의 장남이다. 조산대부 사선 주부를 지냈으며, 증통정대부 호조참의직을 받았다. 1872년(고종 9) 풍안군(豊安君)으로 봉군되고 증 영종정경의 봉작을 받았다.
하령군(河寧君) ?∼145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양(穰), 시호는 충의(忠毅), 대군의 적손이며 완천군의 장남이다. 일찍이 조부 의안대군의 후광을 입어 호군에 제수되어 김종서와 더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때 맺은 인연이 훗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투철한 정신에 입각하여 계유정난 때 함께 생을 마감했다.
1433년(세종 15) 옥구진병마사, 1439년(세종 21) 8월에 의주목사, 1441년(세종 23) 3월에 첨지중추원사, 9월에 중추원부사, 10월에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444년(세종 26) 9월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1446년(세종 28) 6월 동지중추원사, 12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다. 1447년(세종 29) 3월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11월에 강계절제사를 제수받았다. 1451년(문종 1)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이 등극하여 2월에 수릉관(守陵官)으로 발탁되었고, 4월 지중추원사, 7월 지돈녕부사, 10월 판중추원사에 이어 우찬성으로 임명되었다. 문종대왕은 공을 매우 신임하여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직하도록 하고, 대궐 문밖을 거둥할 때는 공에게 어가 뒤를 반드시 따르도록 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도 승하할 때 황보인 · 김종서와 공 등을 불러 세자가 몸이 약하여 염려되니 세손(단종대왕)을 잘 돌보도록 당부하였다. 문종대왕도 승하할 때 이들을 다시 불러 어린 세자를 도와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1453년(단종 1)에 공은 좌찬성이 되어 어린 단종대왕을 각별히 모셨지만 계유정난으로 당시 수양대군에 의해 3상신과 함께 순절하였다. 또한 아들 승윤과 4촌 형제 등 의안대군 자손 16인이 이때 절의를 세우다 화를 당했으니 이를 일컬어 숙종대왕은 “일문과절(一門쥕節)”이라 친필을 내렸다.
이들 형제들은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안치되었으며 특히 하령군 양은 육종영위차(六宗英位次)에 배식되었다. 1872년(고종 9)에 하령군(河寧君)으로 봉군되었고 12인에게는 시호를 내렸으니 불천위(不遷位)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1433년(세종 15) 옥구진병마사, 1439년(세종 21) 8월에 의주목사, 1441년(세종 23) 3월에 첨지중추원사, 9월에 중추원부사, 10월에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444년(세종 26) 9월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1446년(세종 28) 6월 동지중추원사, 12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다. 1447년(세종 29) 3월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11월에 강계절제사를 제수받았다. 1451년(문종 1)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이 등극하여 2월에 수릉관(守陵官)으로 발탁되었고, 4월 지중추원사, 7월 지돈녕부사, 10월 판중추원사에 이어 우찬성으로 임명되었다. 문종대왕은 공을 매우 신임하여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직하도록 하고, 대궐 문밖을 거둥할 때는 공에게 어가 뒤를 반드시 따르도록 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도 승하할 때 황보인 · 김종서와 공 등을 불러 세자가 몸이 약하여 염려되니 세손(단종대왕)을 잘 돌보도록 당부하였다. 문종대왕도 승하할 때 이들을 다시 불러 어린 세자를 도와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1453년(단종 1)에 공은 좌찬성이 되어 어린 단종대왕을 각별히 모셨지만 계유정난으로 당시 수양대군에 의해 3상신과 함께 순절하였다. 또한 아들 승윤과 4촌 형제 등 의안대군 자손 16인이 이때 절의를 세우다 화를 당했으니 이를 일컬어 숙종대왕은 “일문과절(一門쥕節)”이라 친필을 내렸다.
이들 형제들은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안치되었으며 특히 하령군 양은 육종영위차(六宗英位次)에 배식되었다. 1872년(고종 9)에 하령군(河寧君)으로 봉군되었고 12인에게는 시호를 내렸으니 불천위(不遷位)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하릉군(河陵君) ? ∼ ?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확(穫), 대군의 손자이며 의정부 좌찬성인 하령군의 아우이다. 1872년(고종 9)에 하릉군(河陵君)으로 봉군되었다. 하령군이 절손됨에 따라 1등개국공신 영의정부사 의안대군 종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학천군(鶴川君) 1375∼1435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3남이며 휘는 징(澄),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학천군(鶴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대군 자손 중 성격이 가장 활달하고 무골 기질이 있었으며 13세에 산원(散員)에 임명되어 낭장(郎將)을 지냈다. 1396년(태조 5) 1월 문과에 급제했다. 정헌대부이며 공조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1412년(태종 12) 5월 우군총제에 임명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9월 하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7년(태종 17) 7월 동지돈녕부사에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4월 좌군도총제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7월 표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을 다녀오라는 어명을 받아 북경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10월에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5월 지돈녕부사가 되었고 12월에는 경상도 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25년(세종 7) 중군도총제로 발탁되었다. 1426년(세종 8) 절일사(節日使)로 3월에 북경에 다녀와서 6월에는 유후사선위사(留後司宣慰使)의 자격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 1429년(세종 11) 판좌군부사, 1432년(세종 14) 3월 판중추원사, 1434년(세종 16) 9월 지돈녕부사로 임명되었다.
1435년(세종 17) 8월에 별세하니 세종대왕은 군의 별세를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2일간 정지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제문을 내렸다.
묘소는 양주 누원 뒷산에 모셨으나 계유정난 때 가문의 피화로 실전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의안대군 사우 경내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1435년(세종 17) 8월에 별세하니 세종대왕은 군의 별세를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2일간 정지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제문을 내렸다.
묘소는 양주 누원 뒷산에 모셨으나 계유정난 때 가문의 피화로 실전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의안대군 사우 경내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