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장사공파 현조약기에는 총 1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유의(由義) 1423∼1493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자태(自兌), 호는 은암(殷菴). 한양 출신이며 평장사공의 9대손이고 성산군 식(軾)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하고 진용교위(進勇校尉) 사예(司藝) 승문원 부교리 등을 거쳐 1451년(문종 1) 승의랑(承議郞) 성균관 주부 겸 동부유학 교수관이 되고 1454년(단종 2) 승문원 교리, 이듬해 도사(都事), 1461년(세조 7) 무장현감을 지냈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치적이 있고 특히 제방을 쌓는 등 관개시설을 하여 가뭄만 들면 속수무책이었던 전답들을 해마다 오곡이 무르익게 만드니 백성들의 송덕소리가 드높아 정표(旌表)를 했다.
1490년(성종 21) 제주목사로서 무과취겸하여 사복시 부정(副正)이 되고 이듬해 5월 경상우수사, 그 이듬해 전라좌수사 겸 진영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470년(성종 1) 왕실을 잘 보좌하고 평화를 열어 주었다 하여 순성명량경제홍대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代佐理功臣)에 녹훈되었다. 전북 진안군 산수동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사적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배위 숙부인(淑夫人)은 경주이씨 사영(士英)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하고 진용교위(進勇校尉) 사예(司藝) 승문원 부교리 등을 거쳐 1451년(문종 1) 승의랑(承議郞) 성균관 주부 겸 동부유학 교수관이 되고 1454년(단종 2) 승문원 교리, 이듬해 도사(都事), 1461년(세조 7) 무장현감을 지냈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치적이 있고 특히 제방을 쌓는 등 관개시설을 하여 가뭄만 들면 속수무책이었던 전답들을 해마다 오곡이 무르익게 만드니 백성들의 송덕소리가 드높아 정표(旌表)를 했다.
1490년(성종 21) 제주목사로서 무과취겸하여 사복시 부정(副正)이 되고 이듬해 5월 경상우수사, 그 이듬해 전라좌수사 겸 진영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470년(성종 1) 왕실을 잘 보좌하고 평화를 열어 주었다 하여 순성명량경제홍대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代佐理功臣)에 녹훈되었다. 전북 진안군 산수동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사적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배위 숙부인(淑夫人)은 경주이씨 사영(士英)의 딸이다.
유인(由仁) 1418∼1482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자진(自震), 호는 송암(誦菴). 한양 출신이며 평장사공의 9대손이고 충정공 식(軾)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아우와 더불어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경전을 익혔다. 임금이 종친이라 하여 특별히 종친부(宗親府) 부정(副正)에 천거하였고 1450년(세종 32) 양화리(陽化里)로부터 아우 유의(由義) · 유례(由禮) · 유지(由智)를 이끌고 금산으로 이사했다. 1452년 다시 아우들을 이끌고 산수동 선영하로 이사한 다음 상경하여 다시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히니 왕이 가상히 여겨 `송암(誦菴)\'이라는 호를 내렸다. 1453년(단종 1)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오로지 선비양성에만 힘썼다.
1455년(단종 3) 윤 6월 단종대왕이 세조대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자 부친을 따라 고향에 내려가 기자(箕子)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의를 지켰다. 아들이 없어 막내 아우 유지의 아들 팽석(彭錫)을 양자로 맞았는데 그는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1470년(성종 1) 왕실을 잘 도왔다 하여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배위 숙인(淑人)은 전주류씨 석신(錫新)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아우와 더불어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경전을 익혔다. 임금이 종친이라 하여 특별히 종친부(宗親府) 부정(副正)에 천거하였고 1450년(세종 32) 양화리(陽化里)로부터 아우 유의(由義) · 유례(由禮) · 유지(由智)를 이끌고 금산으로 이사했다. 1452년 다시 아우들을 이끌고 산수동 선영하로 이사한 다음 상경하여 다시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히니 왕이 가상히 여겨 `송암(誦菴)\'이라는 호를 내렸다. 1453년(단종 1)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오로지 선비양성에만 힘썼다.
1455년(단종 3) 윤 6월 단종대왕이 세조대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자 부친을 따라 고향에 내려가 기자(箕子)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의를 지켰다. 아들이 없어 막내 아우 유지의 아들 팽석(彭錫)을 양자로 맞았는데 그는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1470년(성종 1) 왕실을 잘 도왔다 하여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배위 숙인(淑人)은 전주류씨 석신(錫新)의 딸이다.
지(芷) 1537∼1599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지호(知浩), 호는 청은(淸隱). 평장사공의 13대손이며 문경공 수주(守宙)의 아들이다. 전북 전주 출신이며 잠영세족(簪纓世族)의 후손답게 슬기롭고 행의가 정숙했다. 자라나서 부모를 섬기는 절차가 예에 어긋남이 없었고, 시키지 않아도 학업을 열심히 닦아 학문에 박통했다. 1556년(명종 11) 그의 독실한 효행과 숭고한 학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천거로 공조참의에 특제되었다. 1561년 사퇴하여 행단(杏壇 : 학문을 닦는 곳)에 선비들을 사귀었고, 그 중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가장 가까이 사귀었다. 1564년(명종 19) 대제학으로 제수됐으나 사양했고, 다시 홍문관 대제학 우찬성 등으로 불렀으나 일체 나아가지 않으니 명종대왕이 “청백한 선비다.”고 칭찬했다.
배위 숙부인은 중추부첨사 진주임씨 천수(千壽)의 딸이다.
배위 숙부인은 중추부첨사 진주임씨 천수(千壽)의 딸이다.
진기(振基) 1911∼1981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기홍(其턒), 호는 교헌(쥻軒). 평장사공의 25대손이며 병학(炳鶴)의 아들이다. 전북 완주 출신이다.
청빈한 선비집에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아서 부모공양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또한 부부가 합심하여 효성을 다했으나 부친의 병환이 위급하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였으나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애통속에 장사를 치르고 묘소밑에서 주야로 호곡(號哭)하니 면민이 여막을 지어 주어 3년 시묘(侍墓)를 하였다. 그 후 홀로 계시는 모친을 지성으로 모시다가 상을 당하고는 또 시묘를 하려하자 주위에서 만류했으나 듣지 않으니 인근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여막을 지어 주어 3년 시묘를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일본관청에서도 희세의 효자라 하여 포상하였고, 1953년 전주 기령당(耆寧堂)에서 포상하였으며, 1957년에는 고산향교에서 통문(通文)을 돌렸다.
청빈한 선비집에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아서 부모공양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또한 부부가 합심하여 효성을 다했으나 부친의 병환이 위급하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였으나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애통속에 장사를 치르고 묘소밑에서 주야로 호곡(號哭)하니 면민이 여막을 지어 주어 3년 시묘(侍墓)를 하였다. 그 후 홀로 계시는 모친을 지성으로 모시다가 상을 당하고는 또 시묘를 하려하자 주위에서 만류했으나 듣지 않으니 인근 사람들이 할 수 없이 여막을 지어 주어 3년 시묘를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일본관청에서도 희세의 효자라 하여 포상하였고, 1953년 전주 기령당(耆寧堂)에서 포상하였으며, 1957년에는 고산향교에서 통문(通文)을 돌렸다.
진실(珍實) 1369∼1440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진실(珍實) [1369(공민왕 18)∼1440(세종 22)]
자는 은신(殷信), 호는 우정(尤亭), 시호는 효정(孝靖). 개성 출신이며 평장사공의 7대손이며 권계(卷桂)의 아들이다.
1395년(태조 4) 문과에 급제, 남평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항시 그의 조상들이 나라에 충성하여 세운 공적을 생각하였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천거되고 이어 왕의 스승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 정진하다가 재출사하였다. 이때 그는 도학 문필과 청백으로 명망이 높았던 아버지 권계(卷桂)에 누가 끼칠까 전전긍긍하며 공평무사와 청렴을 신조로 정무를 집행했다. 1397년 영광군수가 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정종대왕 때 우참찬을 거쳐 1402년(태종 11) 좌참찬이 되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임천(林泉)에 은거했는데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는 선비가 많아 성리학을 가르쳤다. 사후에 시호가 `효정(孝靖)\'으로 내렸으며 유적으로 묘비와 지석이 있다.
배위 정부인은 목사(牧使) 안동김씨 원익(元益)의 딸이다.
자는 은신(殷信), 호는 우정(尤亭), 시호는 효정(孝靖). 개성 출신이며 평장사공의 7대손이며 권계(卷桂)의 아들이다.
1395년(태조 4) 문과에 급제, 남평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항시 그의 조상들이 나라에 충성하여 세운 공적을 생각하였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천거되고 이어 왕의 스승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 정진하다가 재출사하였다. 이때 그는 도학 문필과 청백으로 명망이 높았던 아버지 권계(卷桂)에 누가 끼칠까 전전긍긍하며 공평무사와 청렴을 신조로 정무를 집행했다. 1397년 영광군수가 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정종대왕 때 우참찬을 거쳐 1402년(태종 11) 좌참찬이 되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임천(林泉)에 은거했는데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는 선비가 많아 성리학을 가르쳤다. 사후에 시호가 `효정(孝靖)\'으로 내렸으며 유적으로 묘비와 지석이 있다.
배위 정부인은 목사(牧使) 안동김씨 원익(元益)의 딸이다.
창길(昌吉) 1576(선조 9)~1629(인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 평장사공의 14대손이며 지(芷)의 셋째 아들이다. 경과(慶科)에 합격하여 장사랑(將仕郞)을 거쳐 교수(敎授)를 지냈다.
배위는 수문장 장흥오씨 린(麟)의 딸이고, 산소는 익산시 음기동 산 128번지 선산에 합폄이다.
배위는 수문장 장흥오씨 린(麟)의 딸이고, 산소는 익산시 음기동 산 128번지 선산에 합폄이다.
팽석(彭錫) 1449∼1513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여천(與千), 호는 성암(惺菴). 평장사공의 10대손이며 유인(由仁)의 아들.
생부는 유지(由智)이나 유인(由仁)에게 출계하였다. 천성이 온후하고 충직하며 어릴 때부터 충민하여 양부모를 친부모처럼 효성으로 섬기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문사(文詞)가 풍부하고 언행이 독실하여 향당의 추중을 받았으며 1479년(성종 10) 생원시에 합격하고 고창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1481년 3월 순창군수가 되어 역시 치적을 쌓았고, 그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관직생활 12년의 공적이 다대하므로 1490년(성종 21)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추록되었다. 그 후 임천(林泉) 사이에서 시주(詩酒)를 벗삼고 자녀를 올바로 가르치다가 향년 65세로 세상을 뜨니, 전북 진안군 산수동 선영 아래 안장되었다.
배위 숙인은 현감 밀양박씨 용성(用成)의 딸이다.
생부는 유지(由智)이나 유인(由仁)에게 출계하였다. 천성이 온후하고 충직하며 어릴 때부터 충민하여 양부모를 친부모처럼 효성으로 섬기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문사(文詞)가 풍부하고 언행이 독실하여 향당의 추중을 받았으며 1479년(성종 10) 생원시에 합격하고 고창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1481년 3월 순창군수가 되어 역시 치적을 쌓았고, 그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관직생활 12년의 공적이 다대하므로 1490년(성종 21)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추록되었다. 그 후 임천(林泉) 사이에서 시주(詩酒)를 벗삼고 자녀를 올바로 가르치다가 향년 65세로 세상을 뜨니, 전북 진안군 산수동 선영 아래 안장되었다.
배위 숙인은 현감 밀양박씨 용성(用成)의 딸이다.
행전(行典) 1245∼1312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정욱(精頊), 호는 고봉(固峰), 시호는 문간(文簡). 평장사공의 증손이며 문하시중 안인(安仁)의 아들이다. 전북 진안 출신으로 부친의 슬하에서 학문을 익혀 경전을 정통하고 시부(詩賦)에도 능했으며 한번 붓을 들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 잘 썼다.
1273년(원종 14) 소과에 급제하고 1275년(충렬왕 1) 대경과(大慶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어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1280년 평장사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중 겸 세자 사부로 품계가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1303년 다시 세자 사부가 되었다. 1309년(충선왕 1) 충렬왕을 보좌하고 세자 시강(侍講)에 공이 지대하였으므로 좌명공신의 호가 내려졌고 영천부원군(靈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고봉(固峰)\'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시부집(詩賦集) 3권이 전해지고 1312년 치사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사후 예장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진안의 평양산(平洋山)에 묘소가 있고 묘소 앞에 아들 선미(善味)가 찬한 묘비가 있다.
1273년(원종 14) 소과에 급제하고 1275년(충렬왕 1) 대경과(大慶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어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1280년 평장사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중 겸 세자 사부로 품계가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1303년 다시 세자 사부가 되었다. 1309년(충선왕 1) 충렬왕을 보좌하고 세자 시강(侍講)에 공이 지대하였으므로 좌명공신의 호가 내려졌고 영천부원군(靈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고봉(固峰)\'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시부집(詩賦集) 3권이 전해지고 1312년 치사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사후 예장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진안의 평양산(平洋山)에 묘소가 있고 묘소 앞에 아들 선미(善味)가 찬한 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