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평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재인(載仁) 1794∼1871 파명:의평군(義平君)
  자는 선장(善長), 호는 동강(東岡). 대유(大裕)의 차남이며 의평군의 14대손이다. 성균(成均) 생원에서 절충장군 행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남원양씨 도손(道孫)의 딸과 밀양박씨 채옥(采玉)의 딸과 정선이씨 달민(達民)의 딸과 정선전씨 등 네 분이다.
묘소는 회양군 배화면 용연리 후록 선영 하 정좌에 있다.
배위는 남원양씨 도손(道孫)의 딸과 밀양박씨 채옥(采玉)의 딸과 정선이씨 달민(達民)의 딸과 정선전씨 등 네 분이다.
묘소는 회양군 배화면 용연리 후록 선영 하 정좌에 있다.
제(濟) 1659∼1741 파명:의평군(義平君)
  자는 세경(世卿), 호는 나헌(懶軒). 백붕(百朋)의 아들이며 의평군의 7대손이다. 1679년(숙종 5) 사마시에 급제하고, 1699년(숙종 25) 10월 21일 증광시(단종대왕을 종묘에 부묘(쯊廟)하는 경사(慶事)로 행함)에 응시하여 갑과 아방(亞榜 : 2등)에 급제했으며 1705년(숙종 31) 증광시 을과에도 급제하여 장령 등 여러 벼슬을 거쳐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냈다. 일찍이 함종(咸從) 땅을 다스릴 때는 돌비석이 세워지고, 강계부사로 있을 때는 쇠뷔(쇠로 만든 비)가 세워지는 등 깨끗한 정치를 하여 숙종조에 청백리에 올랐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로 한성부 판관 우경(宇慶)의 딸이다. 생전에 어머니가 병석에서 앵두를 먹고 싶다는 말을 들은 김씨는 앵두를 구해 드리지 못한(제 철이 아니었음)것을 불효라 생각하고 평생 앵두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김씨가 별세한 후에도 제사에 앵두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는 조부 · 시부의 묘와 같은 기슭 해좌에 동분(同墳)으로 모셨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로 한성부 판관 우경(宇慶)의 딸이다. 생전에 어머니가 병석에서 앵두를 먹고 싶다는 말을 들은 김씨는 앵두를 구해 드리지 못한(제 철이 아니었음)것을 불효라 생각하고 평생 앵두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김씨가 별세한 후에도 제사에 앵두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는 조부 · 시부의 묘와 같은 기슭 해좌에 동분(同墳)으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