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대군파 약사

안흥대군


휘는 구수(球壽)요 목조대왕의 제6남이며 어머니는 효공왕후 평창이씨이다.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72년(고종 9)에 대군(大君)과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에 추봉(追封)되었다. 그리고 자 · 손 · 증손 4세(世)에게도 군으로 습봉(襲封)되었다.

배위는 청주한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시 동명사 벌계리 봉수 하 구수동 계좌이며 비갈(碑碣)이 있다. 방손 통판(通判) 석응(錫應)이 비문을 지었다.

안흥대군은 아들이 4명, 손자가 4명, 증손이 6명이다.

안흥대군의 후손들의 주거지는 함경남도이다. <선원속보>의 <안흥대군파보>를 일별하면 이를 알 수 있다.

파조 안흥대군을 비롯한 4세의 후손들은 주로 함흥과 정평(定平)에 살았다. 그 뒤 후손들이 영흥(永興) · 문천(文川) · 안변(安邊) · 북청(北靑) · 이원(利原) · 단천(端川) · 갑산(甲山)등 함경남도 전 군(郡)에 퍼져 살았다. 그리고 한 파는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까지 퍼져 나갔고, 또 강원도 인제(麟蹄) · 삼척(三陟)에까지 퍼져 나가 산 흔적이 엿보인다.

또 후손들의 분포를 보면 이러하다.

문과(文科)급제는 1명인데 안흥대군의 증손 장양군(長陽君) 제손(齊遜)으로 참의(參議)를 지냈다. 그리고 진사(進士) 급제가 8명, 무과(武科) 출신이 18명, 음사(蔭仕)가 2명이다. 품계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1명, 가선대부(嘉善大夫) 25명, 통정대부(通政大夫) 23명, 통훈대부(通訓大夫) 5명, 조산대부(朝散大夫) 1명, 통덕랑(通德郞) 1명, 절충장군(折衝將軍) 7명, 어모장군(禦侮將軍) 2명, 정략장군(定略將軍) 1명, 선략장군(宣略將軍) 2명, 병절교위(秉節校尉) 1 명, 적순부위(迪順副尉) 1명으로 되어 있다.

관직으로 보면 참봉(參奉) 19명이 제일 많고, 직장(直長) 2명, 사과(司果) 2명, 부사과(副司果) 4명, 봉사(奉事) 2명, 찰방(察訪) 2명, 만호(万戶) 1명, 군수(郡守) 1명 등 다양하다.

이들 중 저명한 이는 가선대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신백(信白 : ?∼1698), 통훈대부 군자감정(軍資監正) 인수(仁秀),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경흘(景屹), 중추부사(中樞府事) 정찬(廷贊 : ?∼1730), 오위장(五衛將) 광운(光運 : 1811∼?)이 있고, 절충장군으로는 영찬(永贊) · 억령(億齡) · 상적(尙迪) · 인필(仁弼) · 수삼(秀三) · 인달(仁達 : 1781∼1866),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성록(成祿) 등이 있어, 무반(武班)의 집안임을 나타내고 있다. 기타 별장(別將) 등 다른 관직도 더러 있다.

<선원속보>에는 당시 <안흥대군파보>를 만든 사람들의 명단이 나와 있다.

사손(祀孫) 윤필(允珌), 문장(門長) 경섭(景燮), 도유사(都有司) 윤현(潤鉉), 교정유사(校正有司) 두진(斗震) · 수현(秀炫) · 관회(冠晦) · 섭규(燮奎) · 교형(敎炯), 선서유사(繕書有司) 제환(濟煥) · 광섭(洸燮) · 면영(冕英) · 붕운(鵬運) · 규환(奎煥). 이로 보면 당시의 봉사손(奉祀孫) · 파종회장 · 총무이사 · 파보편찬의 교정이사 발행이사 등의 역할이 조직되어 있어 파보 제작에 공헌한 바 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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