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춘군파 약사

수춘군


세종대왕의 6남으로 1431년(세종 13) 7월 10일에 혜빈(惠嬪) 양씨(楊氏)의 2남으로 태어났다. 휘는 현(玹)이며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수춘군의 태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동 선석산에 모셔져 있으며 세종왕자 태실로서 전열은 11기 후열은 8기로 태비(胎碑)가 세워져 있다.(단종 태비도 포함되어 있음) 대부분 태비는 1438년(세종 20)∼1439년(세종 21) 사이에 세워진 것이며 199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1437년(세종 19) 12월 8일 수춘군으로 봉군하였다. 1443년(세종 25) 3월 1일 세종대왕이 왕비와 더불어 충청도 온양 온천에 거둥하면서 수춘군에게 궁궐을 살펴 상언(上言)하도록 하였다. 1445년(세종 27) 6월 22일 수춘군에게 예를 지키지 않은 안철손을 곤장 80대와 벼슬 3급을 빼앗도록 의금부에 어명하였다. 1445년(세종 27) 7월 6일 세종대왕이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지평(持平) 이계선(李繼善)이 행궁에 나와 일을 아뢰고 걸어서 남문으로 나오는데 수춘군이 말을 타고 지나가매 계선이 명(命)을 욕되게 하였다 하여 피혐하기를 청하였고 뒤를 따라 말을 타고 돌아가다가 수춘군이 길 옆 멀지 않은 곳에 말(馬)을 머물러 두고 있었는데 이계선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갔으니 심히 무례하니 추궁하라.”고 의금부에 명하였다.

1445년(세종 27) 7월 9일 세종대왕이 승정원에 전지하여 수춘군에게 결례한 이계선을 엄히 징계하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평 이계선이 수춘군에게 실례하였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으나 이계선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꾸미어 대답하였다. 전일에 안철손의 일은 광망(狂妄)한 것이었지만 이계선은 그 마음이 간사하고 교활하니 짐이 장차 통렬히 징계하여 후래를 경계하겠다 하였다. 수춘군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편벽되게 나의 권애(眷愛)를 받았기 때문에 조금 교광(驕狂)한 버릇이 있다. 그날도 졸도(卒徙)를 생략하고 단기(單騎)로 다녔으므로 이계선에게 욕을 당한 것이나, 조정 신하가 어찌 왕자를 보고 말을 범하여 능욕할 리가 있겠는가. 이계선이 유자(儒者)로서 지평(持平)까지 되었으니 사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내가 이 죄를 통렬히 징계하고자 한다.”

1446년(세종 28) 5월 22일 수춘군이 빈전(殯殿)에 진향(進香)하였다.

1448년(세종 30) 12월 21일 세종대왕이 황보인 · 박종우 · 김종서 · 정분 · 정갑손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세자의 면복을 명나라에 청하고자 하는데 장차 수춘군으로 하여금 북경에 가서 청하게 하려 한다.” 하였다.

1449년(세종 31) 12월 10일 종친, 문 · 무 2품 이상 등의 관원에게 사연하는 자리에서 세종대왕이 말하기를 “이제 그대들에게 신악(新樂)을 내리니 마땅히 마음껏 즐기라.” 하며 수춘군에게 명하여 술을 권하게 하고 이르기를 “오늘의 기쁜 경사를 비할 데가 없어서 왕자에게 명하여 술을 권하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마음껏 즐기라.” 하였다.

1450년(세종 32) 1월 28일 세종대왕이 수춘군과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계전(李季甸)을 명하여 의정부에 가서 의논하게 하기를 세자를 부축하여 조서를 맞이한 뒤에 태평관에 나갈 수 없으므로 사신과 상견(相見)하는 절차가 없으니 근정전 동편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사신을 만나 보는 사례(私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1443년(세종 25) 3월 1일 세종대왕이 환후가 있으매 수춘군이 손수 시탕(侍湯)에 정성을 다하자 부왕이 기특하게 여겨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그 후 세종대왕이 환후가 심하여 보은 속리산 복천사로 이어하자 광평대군과 수춘군 등이 대궐에 남아 궁궐내의 모든 상황을 살펴 상언(上言)하도록 하였다. 이토록 의약과 기도를 지성으로 드렸으나 끝내 1450년(세종 32) 2월 17일에 별궁에서 승하하니 수춘군은 호곡(號哭)하며 애통해 하였다.

1451년(문종 원년) 3월 6일 이로부터 수춘군이 날마다 향(香)을 올렸다.

1451년(문종 1) 2월 19일 문종대왕이 종부시(宗簿寺)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제 소상(小祥)이 이미 지났으니 수춘군을 특수교육장(特殊敎育場)에 나가게 하라” 하였다.

1452년(단종 원년) 윤 9월 2일 단종대왕이 나이가 어려 수춘군의 어머니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섭정(攝政)하면서 사정전(思政殿)에서 효령대군 · 수양대군 · 금성대군 · 화의군 · 계양군 · 의창군 · 한남군 · 수춘군 · 밀성군 · 익현군 · 영풍군 · 영해군 · 경녕군 · 함녕군 · 온녕군 · 익녕군 등을 인견하고 모피 1장, 녹피 1장, 활 1장씩을 하사하였다.

1453년(단종 1) 2월 4일 단종대왕이 비 정순왕후와 같이 수양대군의 저택 서청(西廳)에서 연회를 베푼 자리에 수춘군이 복명하고 배석하였다.

1453년(단종 1) 2월 26일 수양대군이 부사(副使) 이사철(李思哲)과 함께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복명(復命)하니 단종대왕이 연회를 외정(外政)의 막차(幕次)에서 베풀어 수춘군이 입시(入侍)하였다.

1454년(단종 2) 5월 21일 수양대군이 종친내외를 불러 경회루 아래서 풍정을 올릴 때 수춘군 · 혜빈 양씨 · 봉보부인(奉保夫人 : 혜빈양씨의 모) 등이 초대받아 시연하였다.

1455년(단종 3) 3월 21일 금성대군 · 화의군 등이 몰래 궐내에 출입하여 혜빈 양씨와 결탁하였고 그 자리에서 혜빈 양씨는 수춘군이 일찍부터 병이 드니 금성대군의 집에서 치료하며 완치되도록 당부하니 금성대군은 혜빈 양씨의 뜻에 따라 시행하였다.

1455년(단종 3) 5월 10일 금성대군이 수춘군에게 말을 주면서 말하기를 “병이 이미 다 나았으므로 준다.”고 하였다. 이때 수춘군은 수양대군에게 불만을 품고 말하기를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 계양군과 결탁하여 어머니 혜빈으로 하여금 궁중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총괄해 다스리기로 의논이 되었고 금성대군이 인정이 많아 널리 인심을 얻었고 또 안으로는 궁중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대신들과 연결을 맺었으니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수양대군이 비록 엄중하고 명철하지만 빈객(賓客)이 없고 고립하여 돕는 자가 없으니 이는 한낱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1455년(단종 3) 6월 5일 수춘군이 교거(僑居 : 금성대군 저택)에서 별세하자 백관들이 홍례문밖에서 거애(擧哀)하고 조회와 시장을 3일간 정지하였고 부의로 쌀과 콩 100석과 정포(正布) 40필을 내려주고 시호를 안도라 하였는데 관유(寬裕)하고 화평(和平)함을 `안(安)'이라 하고 중년에 일찍 죽음을 `도(悼)'라 하였다. 혜빈 양씨는 상장(喪葬)의 예(禮)를 한결같이 담양군(潭陽君)의 예(例)에 의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그대로 따라 전칠관(全漆棺)을 내리고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염습(殮襲)할 옷을 만들어 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그 시신을 본가로 들어오게 하고 예관들에게 조상하라 명하였다.

1455년(단종 3) 6월 6일 혜빈 양씨가 수춘군 현의 장지를 양주 대방동에 잡으니, 산주(山主)인 고(故) 지상원군사(知祥原郡事) 김여회(金如晦)의 처 이씨와 행지자산군사(行知慈山郡事) 김약회(金若晦) 등 7인이 상언하기를 “부친 김사청(金士淸) 부처(夫妻)와 김여회(金如晦)를 모두 이 산에 장사지냈는데 일시에 무덤을 옮기기가 곤란하오며 통민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모두 살 곳을 잃게 되옵니다.” 하니 의정부에서 장지로 허락하지 않았다.

1455년(단종 3) 6월 24일 또한 혜빈이 아뢰기를 “수춘군의 장지를 성동(城東)의 왕십(往十)의 동향한 땅에 장사지내게 하여 주소서.” 하니 곧 의정부에 의논하라 하였다. 의정부에서 말하기를 “이곳은 행행(行幸)하는 길이니, 청컨대 허락하지 마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1455년(단종 3) 윤 6월 3일 혜빈이 수춘군 장지를 수춘군의 처가 산인 고양 원당골에 장사 지내도록 청함에 허락하여서 동년 윤 6월 5일 장사를 지냈다.

1477년(성종 8) 4월 15일 승정원에서 안효례(安孝禮)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승문원의 예전 터는 선왕이신 세종대왕이 영의정 황희(黃喜), 예조판서 신상(申商), 제조 정인지(鄭麟趾)에게 명하여 승문원의 땅은 영구히 나라에서 쓰지 않겠으니 수춘군에게 내려 주어 집을 짓고 거처하도록 하였으니 논할 바 없다.”고 하였다.

수춘군의 배위 영천군부인(榮川郡夫人) 연일정씨는 홀로 된 후 단종대왕 비 정현왕후가 홀로 되매 같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정업원이라는 승방을 차리고 단종대왕과 수춘군의 명복을 빌며 대궐에서 거느린 궁녀들과 같이 일생을 보냈다. 현재 위치는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언덕 위 암자 원위치에 보존되어 있다.

1478년(성종 9) 3월 10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지금 수춘군 부인 정씨는 왕자군의 아내로서 삭발출가하였으니 청컨대 종부시로 하여금 머리를 길러서 환속(還俗)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82년(성종 13) 2월 2일 수춘군 부인이 정업원 주지가 된 일의 시비를 경연에서 논한 바 임금이 말하기를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좋지만 정업원에 거처하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 또한 종실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은 진실로 마땅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비구니가 되었으면 정업원에 거처하는 것이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나라의 이해(利害)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대왕대비께서 이미 명하여 주지로 삼은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였다.

1492년(성종 23) 8월 5일 수춘군의 부인 정씨가 경녕군 아들이며 복성군(福城君)의 아들인 안양부수 옥산(玉山)을 후사로 삼고자 예조(禮曹)에 고했는데 예조에서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었다.

성종대왕은 영돈녕 이상과 의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윤필상 · 이극배 · 윤호 · 허종 등이 의논하기를 “청컨대 예조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하소서.” 하니 그대로 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수춘군은 세종의 아들이고 안양부수는 경녕군(敬寧君)의 아들이다. 세종의 아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수춘군 형제의 아들로서 후계자를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대왕이 명하기를 “수춘군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나 왕실의 무관심으로 선왕이신 성종대왕은 수춘군 후사를 논한 바 있었으나 정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과인이 어명하노라.” 하며 밀성군 셋째 아들 수안군(遂安君)을 수춘군의 후사로 봉하도록 명하였다.

수안군은 1455년(단종 3)에 태어나 1506년(중종 1) 당시 51세 때 중종대왕의 어명에 따라 부인(夫人) 안씨와 슬하에 3남 4녀와 동반하여 수춘군의 후사로 입적하였다. 장남은 의인군(宜仁君), 차남은 안흥도정(安興都正) 3남은 적성군(赤城君), 장녀는 진주정씨 윤(潤)에게 출가, 차녀는 여흥민씨 천석(天錫)에게 출가, 3녀는 청주한씨 세창에게 출가, 4녀는 진주하씨 익정(益精)에게 출가하였다.

수춘군의 배위 영천군부인 연일정씨는 1504년(연산군 10) 9월에 향년 71세로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왕능골 임좌원에 수춘군과 함께 쌍분하였고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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