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선평군(善平君) 1389∼1439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흥발(興發), 시호는 평안(平安). 대군의 손자이며 완원부원군의 장남이다.
1412년(태종 12)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지냈으며, 1414년 장연병마사(長淵兵馬使)가 되었다. 1414년(세종 1)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녕부윤(仁寧府尹) · 중군총제(中軍摠制) ·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겸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 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1년(세종 13) 지돈녕부사로 길주의 선위사(宣慰使)가 되고 함흥선위사를 거쳐 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뒤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에 있다.
1412년(태종 12)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지냈으며, 1414년 장연병마사(長淵兵馬使)가 되었다. 1414년(세종 1)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녕부윤(仁寧府尹) · 중군총제(中軍摠制) ·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겸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 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1년(세종 13) 지돈녕부사로 길주의 선위사(宣慰使)가 되고 함흥선위사를 거쳐 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뒤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에 있다.
세영(世英) 1458∼1526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대군의 5대손이며 의령군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제주목사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이다.
묘소는 전남 담양군 고지면 대곡리에 있다.
통정대부 제주목사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이다.
묘소는 전남 담양군 고지면 대곡리에 있다.
여안군(驪安君) 1380∼1460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군실(君實). 대군의 손자이며 완남군의 아들이다.
좌우위보승장군(左右衛保勝將軍)을 지냈고 1872년(고종 9)에 가선대부 여안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기리 유현에 있다.
좌우위보승장군(左右衛保勝將軍)을 지냈고 1872년(고종 9)에 가선대부 여안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기리 유현에 있다.
여양군(여양군) ? ∼141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굉(宏). 대군의 손자이며 완산부원군의 장남이다.
처음에 종친으로서 원윤(元尹)에 피봉되고, 1412년(태종 12) 삼군도총부 좌군총제(三軍都摠府左軍摠制)가 되었으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872년(고종 9)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여양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배위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며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여양군이 일찍 돌아가니, 1417년 정부인은 친가인 전남 담양으로 네 아들 월성군 · 월평군 · 월산군 · 월풍군을 데리고 내려가서 월성부원군 별장에서 수학시켰다.
묘소는 서울 양도공 묘소 아래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전남 담양군 월산면 홍암리에 설단하였고, 묘장서원에 배향되었다.
처음에 종친으로서 원윤(元尹)에 피봉되고, 1412년(태종 12) 삼군도총부 좌군총제(三軍都摠府左軍摠制)가 되었으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872년(고종 9)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여양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배위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며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여양군이 일찍 돌아가니, 1417년 정부인은 친가인 전남 담양으로 네 아들 월성군 · 월평군 · 월산군 · 월풍군을 데리고 내려가서 월성부원군 별장에서 수학시켰다.
묘소는 서울 양도공 묘소 아래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전남 담양군 월산면 홍암리에 설단하였고, 묘장서원에 배향되었다.
완남군(完南君) 1356∼1408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조(朝), 초명은 예경(藝經). 대군의 3남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고려조에 진사가 되어 사온(司춠)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가산군(嘉山君)에 봉해졌다. 일찍이 남경부 소윤(小尹)을 역임하였는데 태조고황제가 창업하자 그 조카로서 완평군(完平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진안대군(鎭安大君) 소속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1401년(태종 1) 사헌부로부터 참소가 있었으나 태종대왕은 윤허치 않았다. 1408년(태종 8) 돌아가자 임금은 쌀 40석 · 콩 30석 · 종이 50권을 하사하고, 3일간 철조함으로써 종친 뿐만 아니라 중신(重臣)의 예우를 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가선대부 완남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함흥 청룡에 있었으나 거듭된 병란으로 실전되어 1880년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기리 유현에 신단을 설립, 치제하고 있다.
배위는 정부인 청주양씨이며 여안군 군실(君實)을 낳았다.
고려조에 진사가 되어 사온(司춠)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가산군(嘉山君)에 봉해졌다. 일찍이 남경부 소윤(小尹)을 역임하였는데 태조고황제가 창업하자 그 조카로서 완평군(完平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진안대군(鎭安大君) 소속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1401년(태종 1) 사헌부로부터 참소가 있었으나 태종대왕은 윤허치 않았다. 1408년(태종 8) 돌아가자 임금은 쌀 40석 · 콩 30석 · 종이 50권을 하사하고, 3일간 철조함으로써 종친 뿐만 아니라 중신(重臣)의 예우를 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가선대부 완남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함흥 청룡에 있었으나 거듭된 병란으로 실전되어 1880년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기리 유현에 신단을 설립, 치제하고 있다.
배위는 정부인 청주양씨이며 여안군 군실(君實)을 낳았다.
완녕군(完寧君) ? ∼1419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서(曙), 일명 백온(伯溫)이며 시호는 소사(昭思). 대군의 4남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왕족으로 원윤(元尹)에 봉해졌고 도총관(都摠管)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1414년(태종 14) 총관 류습(柳濕)과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배위는 정부인 완산김씨이며 여강군 영석(永錫)을 낳았다.
왕족으로 원윤(元尹)에 봉해졌고 도총관(都摠管)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1414년(태종 14) 총관 류습(柳濕)과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배위는 정부인 완산김씨이며 여강군 영석(永錫)을 낳았다.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1354∼141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천우(天祐)이며, 시호는 양도(襄度)이다. 대군의 차남으로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남평문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풍채가 아름답고 그릇이 크고 너그러워 숙부인 태조고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태조고황제의 휘하에 종군, 누차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황산대첩에서 아기발도를 토벌할 때 귀와 코에 부상을 입었다.
요동정벌 때 상호군으로 참전하였으며, 태조고황제의 회군을 도왔다. 또 1392년 조선개국에 즈음하여 여러 신하가 태조고황제에게 즉위를 권할 때, 태조고황제가 세 차례나 불가하다고 사양하며,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자 공이 태조고황제를 부축하여 등극케 한 공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 1396년(태조 5) 강원도 조전절제사가 되어 왜구토벌에 진력하였다.
1399년(정종 1)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되고, `박포의 난\'을 평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1401년(태종 1) 태종대왕과 삽혈동맹(챍血同盟), 1402년 안주도 도절제사가 되어 `조사의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404년 개국 · 정사 · 좌명 3공신의 회맹(會盟)에 참여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1404년(태종 4) 태종대왕이 송도 · 신도(한성) · 무악 중 택일하여 천도하려 할 때 왕은 묘실(廟室)에서 향을 올리고 공에게 명하여 쟁반에 척전(擲錢 :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일)의 의식을 거행하니, 송도와 무악은 이흉일길(二凶一吉)이었고 신도는 이길일흉(二吉一凶)의 점괘가 나와 한성이 가장 길하므로 천도된 바 있다.
1407년(태종 7)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국초에 숭유문치(崇儒文治)의 길을 열었고,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하였다.
1409년(태종 9) 병조판서와 삼군진무소 도총관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병정을 맡았다.
1413년(태종 13) 이조판서, 1414년 의금부 도제조를 역임, 대광보국숭록대부 완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16년(태종 16) 퇴직할 때 태종대왕은 “경이 큰 공을 세웠는데 아직 보답을 못하였으니 좋은 논 80결(1결은 5두락, 1두락은 1마지기)과 노비 80명을 상으로 내리겠소.” 하였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차라리 저 손토시[?]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매를 저에게 주십시요.” 하였다. 임금은 매사냥을 너무 즐겨서 정사에 소홀할까 해서 올리는 갸륵한 충고로 받아들여, 웃으면서 청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화공에게 명하여 공의 화상과 두 마리 매를 그리게 하고 어필로 `사 완산부원군 리천우(賜 完山府院君 李天祐)\' 라고 쓰고 두 마리 매와 함께 하사하여 청고한 지행(志行)을 천추에 기리게 하였다. 공의 부조묘(지방문화재)에는 하사받은 영정과 두 마리 매그림(문화재자료 제22호)과 회맹축(會盟軸), 포총교지(褒寵敎旨)가 보존되고 있다. 영정은 1774년(영조 50)에 어진화가 한종유(韓宗裕)가 개보했고, 두 마리 매의 당초의 그림은 손상되어 숙종대왕 때 다시 그렸다. 우참찬 유최기(兪最基)가 1747년에 찬문(贊文)을 쓴 목각판(木刻版)도 함께 남아 있다.
1417년(태종 17) 별세하니 태종대왕은 철조 3일하고 현 고양시 학령산(鶴翎山)에 예장하며, `양도(襄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종대왕은 공의 청고한 인품을 추념하면서 사병혁파(私兵革罷) 주장이 선견지명이었음을 칭송하였다. 1424년(세종 6) 태종묘(太宗廟)에 배향하고 부조(不?)를 명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전남 영광에 사림이 발의하여 영당사(影堂祠)를 세우고, 춘추로 배향하고 강학하니 묘장서원(畝長書院)이 되었다. 묘장서원은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에 소재한 서원으로 공을 비롯하여 여양군 · 월성군 · 사매당 응종(應鍾) · 만취당 황종(黃鍾) · 한천당 홍종(洪鍾) · 우봉공 근(根) · 신봉공 복원(馥遠) 등 7위를 모신 서원이다.
배위 정경부인 여흥민씨는 여양군을 낳고, 정경부인 황보씨는 여성군과 여흥군을 낳았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성석동 감천리 웃감내에 있고, 부조묘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당산에 있으며, 묘장서원은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영당에 있다.
종묘 공신당과 묘장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유품은 영정 · 이응도(二鷹圖) · 회맹축 · 포총교지가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풍채가 아름답고 그릇이 크고 너그러워 숙부인 태조고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태조고황제의 휘하에 종군, 누차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황산대첩에서 아기발도를 토벌할 때 귀와 코에 부상을 입었다.
요동정벌 때 상호군으로 참전하였으며, 태조고황제의 회군을 도왔다. 또 1392년 조선개국에 즈음하여 여러 신하가 태조고황제에게 즉위를 권할 때, 태조고황제가 세 차례나 불가하다고 사양하며,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자 공이 태조고황제를 부축하여 등극케 한 공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 1396년(태조 5) 강원도 조전절제사가 되어 왜구토벌에 진력하였다.
1399년(정종 1)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되고, `박포의 난\'을 평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1401년(태종 1) 태종대왕과 삽혈동맹(챍血同盟), 1402년 안주도 도절제사가 되어 `조사의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404년 개국 · 정사 · 좌명 3공신의 회맹(會盟)에 참여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1404년(태종 4) 태종대왕이 송도 · 신도(한성) · 무악 중 택일하여 천도하려 할 때 왕은 묘실(廟室)에서 향을 올리고 공에게 명하여 쟁반에 척전(擲錢 :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일)의 의식을 거행하니, 송도와 무악은 이흉일길(二凶一吉)이었고 신도는 이길일흉(二吉一凶)의 점괘가 나와 한성이 가장 길하므로 천도된 바 있다.
1407년(태종 7)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국초에 숭유문치(崇儒文治)의 길을 열었고,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하였다.
1409년(태종 9) 병조판서와 삼군진무소 도총관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병정을 맡았다.
1413년(태종 13) 이조판서, 1414년 의금부 도제조를 역임, 대광보국숭록대부 완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16년(태종 16) 퇴직할 때 태종대왕은 “경이 큰 공을 세웠는데 아직 보답을 못하였으니 좋은 논 80결(1결은 5두락, 1두락은 1마지기)과 노비 80명을 상으로 내리겠소.” 하였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차라리 저 손토시[?]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매를 저에게 주십시요.” 하였다. 임금은 매사냥을 너무 즐겨서 정사에 소홀할까 해서 올리는 갸륵한 충고로 받아들여, 웃으면서 청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화공에게 명하여 공의 화상과 두 마리 매를 그리게 하고 어필로 `사 완산부원군 리천우(賜 完山府院君 李天祐)\' 라고 쓰고 두 마리 매와 함께 하사하여 청고한 지행(志行)을 천추에 기리게 하였다. 공의 부조묘(지방문화재)에는 하사받은 영정과 두 마리 매그림(문화재자료 제22호)과 회맹축(會盟軸), 포총교지(褒寵敎旨)가 보존되고 있다. 영정은 1774년(영조 50)에 어진화가 한종유(韓宗裕)가 개보했고, 두 마리 매의 당초의 그림은 손상되어 숙종대왕 때 다시 그렸다. 우참찬 유최기(兪最基)가 1747년에 찬문(贊文)을 쓴 목각판(木刻版)도 함께 남아 있다.
1417년(태종 17) 별세하니 태종대왕은 철조 3일하고 현 고양시 학령산(鶴翎山)에 예장하며, `양도(襄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종대왕은 공의 청고한 인품을 추념하면서 사병혁파(私兵革罷) 주장이 선견지명이었음을 칭송하였다. 1424년(세종 6) 태종묘(太宗廟)에 배향하고 부조(不?)를 명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전남 영광에 사림이 발의하여 영당사(影堂祠)를 세우고, 춘추로 배향하고 강학하니 묘장서원(畝長書院)이 되었다. 묘장서원은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에 소재한 서원으로 공을 비롯하여 여양군 · 월성군 · 사매당 응종(應鍾) · 만취당 황종(黃鍾) · 한천당 홍종(洪鍾) · 우봉공 근(根) · 신봉공 복원(馥遠) 등 7위를 모신 서원이다.
배위 정경부인 여흥민씨는 여양군을 낳고, 정경부인 황보씨는 여성군과 여흥군을 낳았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성석동 감천리 웃감내에 있고, 부조묘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당산에 있으며, 묘장서원은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영당에 있다.
종묘 공신당과 묘장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유품은 영정 · 이응도(二鷹圖) · 회맹축 · 포총교지가 있다.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1346∼141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양우(良祐)이며 시호는 안소(安昭)이다.
환조대왕의 손자이며 대군의 장남으로서 어머니는 남평문씨이다.
공은 고려말에 벼슬길에 올라 사복정(司僕正)이 되었다가 태조고황제가 즉위한 뒤 영안군(寧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아우 천우(天祐)와 함께 정도전 · 남은의 내란(內難)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녹훈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완원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00년(정종 2) `박포(朴苞)의 난\' 때는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잡혀갔던 백성들을 구하여 왔다. 1412년(태종 12) 10월, <선원록(璿源錄)>을 잘못 만든 데 대하여 그 부당성에 불만을 품고 병을 빙자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413년 전주에 유배중인 방간(芳幹)과 사사로이 통하고, 병을 칭탁하며 조회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臺諫)의 격렬한 탄핵을 받았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사헌부 사간원이 총사퇴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오히려 대간이 외방에 부처(付處)되고, 공은 양주에 안치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417년(태종 17) 별세하니 태종대왕이 철조(輟朝) 3일하고 양평(楊平)에 예장하며 `안소(安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조(不?)를 명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 선산박씨이며 3형제 선평군 · 선성군 · 선산군을 낳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있고, 흰돌로 된 신도비가 있다.
환조대왕의 손자이며 대군의 장남으로서 어머니는 남평문씨이다.
공은 고려말에 벼슬길에 올라 사복정(司僕正)이 되었다가 태조고황제가 즉위한 뒤 영안군(寧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아우 천우(天祐)와 함께 정도전 · 남은의 내란(內難)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녹훈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완원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00년(정종 2) `박포(朴苞)의 난\' 때는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잡혀갔던 백성들을 구하여 왔다. 1412년(태종 12) 10월, <선원록(璿源錄)>을 잘못 만든 데 대하여 그 부당성에 불만을 품고 병을 빙자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413년 전주에 유배중인 방간(芳幹)과 사사로이 통하고, 병을 칭탁하며 조회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臺諫)의 격렬한 탄핵을 받았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사헌부 사간원이 총사퇴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오히려 대간이 외방에 부처(付處)되고, 공은 양주에 안치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417년(태종 17) 별세하니 태종대왕이 철조(輟朝) 3일하고 양평(楊平)에 예장하며 `안소(安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조(不?)를 명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 선산박씨이며 3형제 선평군 · 선성군 · 선산군을 낳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있고, 흰돌로 된 신도비가 있다.
완풍대군(完豊大君) 1330∼1388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원계(元桂)이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환조대왕의 1남으로, 어머니는 한산이씨이다.
태조고황제 잠저 시에는 공과 의안대군 등 3형제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태조고황제와 함께 누차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파하여 2등공신이 되고 1361년 2차 침입 때 내부령(內府令)으로서 안우(安祐) 등과 함께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는 수도인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에 또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75년(고려 우왕 1) 원제(元帝)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왕(瀋王) 모자가 반역자 김의(金義)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국방경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였던 공은 원수(元帥)가 되어 서북방어의 임무를 담당, 반도(叛徒)를 막아내었고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인 나세(羅世)와 함께 격파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3월 왜구가 또 다시 광주(光州) · 화순(和順) · 능성(綾城)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나가 막아냈고 동년 8월 왜적이 배 500척을 진포(鎭浦)에 매어 두고 양광(충청) · 전라 · 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하자 공은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가 되어 출전,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3도도순찰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남원 운봉에 이르러 대승하였다. 유명한 이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많은 포로와 말 1,600여 필을 포획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공은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여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의 회군에 처음에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 태조고황제 개국 후 회군2등공신에 봉해졌다.
위화도 회군 이 후 태조고황제 옹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공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 온 고려왕조를 모반할 수도 없고, 한편 형제로서의 효우(孝友)를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고려 충신이었던 공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켜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 유언하고, 다음의 필명시(畢命詩)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 오,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三韓故國身何在, 地下願從伯仲遊. 同處休云裁處 異, 荊蠻不必海쯆浮.).”
이 필명시는 1908년(순종 2) 18세 종손 철재가 진정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에 음각되어 있어서 재확인 되었다.
공은 처음에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고 오랑캐 토벌과 왜구 토벌의 혁혁한 전공으로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에 올랐다. 태조고황제는 등극 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이란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9) 완풍대군 겸 영종정경으로 추증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 증직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함흥군 북주 동면 경흥리 귀주동 정릉(定陵) 오른쪽 언덕에 있다. 묘비문과 신도비명은 순종 때 왕실지친이었던 종정원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이 찬술하였다.
남북분단으로 묘전에서 향사를 올릴 수 없어 198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천향지소(遷享之所)로 흥경단(興慶壇)을 설단하고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세일제를 봉행한다.
배위는 남평문씨와 경주김씨이다. 남평문씨 익점(益漸 : 목화를 전래한 사람)의 딸에게서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완원부원군 · 완산부원군, 사위는 중랑장 이인우(李仁雨)이며, 경주김씨 찬성사 용(鏞)의 딸에게서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완남군 · 완녕군, 사위는 생원 노신(盧愼), 승지 변중량(卞仲良)이다.
환조대왕의 1남으로, 어머니는 한산이씨이다.
태조고황제 잠저 시에는 공과 의안대군 등 3형제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태조고황제와 함께 누차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파하여 2등공신이 되고 1361년 2차 침입 때 내부령(內府令)으로서 안우(安祐) 등과 함께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는 수도인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에 또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75년(고려 우왕 1) 원제(元帝)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왕(瀋王) 모자가 반역자 김의(金義)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국방경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였던 공은 원수(元帥)가 되어 서북방어의 임무를 담당, 반도(叛徒)를 막아내었고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인 나세(羅世)와 함께 격파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3월 왜구가 또 다시 광주(光州) · 화순(和順) · 능성(綾城)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나가 막아냈고 동년 8월 왜적이 배 500척을 진포(鎭浦)에 매어 두고 양광(충청) · 전라 · 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하자 공은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가 되어 출전,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3도도순찰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남원 운봉에 이르러 대승하였다. 유명한 이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많은 포로와 말 1,600여 필을 포획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공은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여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의 회군에 처음에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 태조고황제 개국 후 회군2등공신에 봉해졌다.
위화도 회군 이 후 태조고황제 옹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공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 온 고려왕조를 모반할 수도 없고, 한편 형제로서의 효우(孝友)를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고려 충신이었던 공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켜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 유언하고, 다음의 필명시(畢命詩)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 오,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三韓故國身何在, 地下願從伯仲遊. 同處休云裁處 異, 荊蠻不必海쯆浮.).”
이 필명시는 1908년(순종 2) 18세 종손 철재가 진정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에 음각되어 있어서 재확인 되었다.
공은 처음에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고 오랑캐 토벌과 왜구 토벌의 혁혁한 전공으로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에 올랐다. 태조고황제는 등극 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이란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9) 완풍대군 겸 영종정경으로 추증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 증직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함흥군 북주 동면 경흥리 귀주동 정릉(定陵) 오른쪽 언덕에 있다. 묘비문과 신도비명은 순종 때 왕실지친이었던 종정원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이 찬술하였다.
남북분단으로 묘전에서 향사를 올릴 수 없어 198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천향지소(遷享之所)로 흥경단(興慶壇)을 설단하고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세일제를 봉행한다.
배위는 남평문씨와 경주김씨이다. 남평문씨 익점(益漸 : 목화를 전래한 사람)의 딸에게서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완원부원군 · 완산부원군, 사위는 중랑장 이인우(李仁雨)이며, 경주김씨 찬성사 용(鏞)의 딸에게서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완남군 · 완녕군, 사위는 생원 노신(盧愼), 승지 변중량(卞仲良)이다.
월산군(月山君) ? ∼ ?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휘는 경인(敬仁). 대군의 증손자이며 여양군의 3남이다.
종부(宗簿) 직장(直長)을 지낸 후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고 두문불출, 주자학에 몰두하며 청절을 지켰다.
1872년(고종 9)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월산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전남 담양군 대덕리 청운에 있다.
종부(宗簿) 직장(直長)을 지낸 후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고 두문불출, 주자학에 몰두하며 청절을 지켰다.
1872년(고종 9)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월산군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전남 담양군 대덕리 청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