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무림군(茂林君) 1410∼1474 파명:무림군(茂林君)
 무림군(茂林君) [1410(태종 10)∼1474(성종 5)]
휘는 선생(善生), 자는 낙보(樂甫). 정종대왕의 15남이며 어머니는 숙의(淑儀) 행주기씨(幸州奇氏)이다. 학문을 즐겨 15세에 문장이 되고 19세인 1428년(세종 10)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원을 지냈다. 그리고 명나라에 세번이나 사신으로 갔다. 첫번째는 1444년(세종 26) 35세 때 중국에서 달력을 나눠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은사(謝恩使)로 갔다. 두번째는 1448년(세종 30) 39세 때에 원손 책봉을 알리는 사신으로 갔고, 세번째는 문종대왕의 승하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1452년(문종 2) 43세 때 다녀왔다. 그러나 1454년(단종 2) 45세 때 단종대왕이 선위를 하자 국사를 개탄하고 관직을 버리고 띳풀로 별당을 지어 `퇴우당(退憂堂)\'이라 이름하고 선비로 지내다가 1474년(성종 5) 65세로 별세했다.
무림군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고 절조와 충성이 특이하여 시호를 `소이(昭夷)\'라고 받았다. 이것은 “용모가 단아함[容貌端雅]을 소(昭)로 하고, 거동이 편안함[擧止安詳]을 이(夷)라 한 것”이다.
무림군은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죽은 뒤에 갈(碣 : 윗쪽을 둥글게 만든 작은 비석)에다 군호(君號)만 써라.” 하여 `무림군 소이공 묘(茂林君昭夷公之墓)\'라고 새겼다.
처음에는 장례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정안촌(正安村)에 모셨다가 3년 뒤인 1476년(성종 7)에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경좌에 이장하고 그 후 1495년(연산군 1)에 배위를 부좌(쯊左)했다.
배위는 양덕군부인(陽德郡夫人) 남양홍씨로 사정(司正) 흥선(興善)의 딸이다. 무림군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명천도정이고, 차남은 신평도정이며, 장녀는 참의 나영손(羅永孫)에게, 차녀는 진사 김맹원(金孟元)에게, 3녀는 전한(典翰) 류대승(柳大升)에게 출가했다.
휘는 선생(善生), 자는 낙보(樂甫). 정종대왕의 15남이며 어머니는 숙의(淑儀) 행주기씨(幸州奇氏)이다. 학문을 즐겨 15세에 문장이 되고 19세인 1428년(세종 10)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원을 지냈다. 그리고 명나라에 세번이나 사신으로 갔다. 첫번째는 1444년(세종 26) 35세 때 중국에서 달력을 나눠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은사(謝恩使)로 갔다. 두번째는 1448년(세종 30) 39세 때에 원손 책봉을 알리는 사신으로 갔고, 세번째는 문종대왕의 승하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1452년(문종 2) 43세 때 다녀왔다. 그러나 1454년(단종 2) 45세 때 단종대왕이 선위를 하자 국사를 개탄하고 관직을 버리고 띳풀로 별당을 지어 `퇴우당(退憂堂)\'이라 이름하고 선비로 지내다가 1474년(성종 5) 65세로 별세했다.
무림군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고 절조와 충성이 특이하여 시호를 `소이(昭夷)\'라고 받았다. 이것은 “용모가 단아함[容貌端雅]을 소(昭)로 하고, 거동이 편안함[擧止安詳]을 이(夷)라 한 것”이다.
무림군은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죽은 뒤에 갈(碣 : 윗쪽을 둥글게 만든 작은 비석)에다 군호(君號)만 써라.” 하여 `무림군 소이공 묘(茂林君昭夷公之墓)\'라고 새겼다.
처음에는 장례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정안촌(正安村)에 모셨다가 3년 뒤인 1476년(성종 7)에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경좌에 이장하고 그 후 1495년(연산군 1)에 배위를 부좌(쯊左)했다.
배위는 양덕군부인(陽德郡夫人) 남양홍씨로 사정(司正) 흥선(興善)의 딸이다. 무림군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명천도정이고, 차남은 신평도정이며, 장녀는 참의 나영손(羅永孫)에게, 차녀는 진사 김맹원(金孟元)에게, 3녀는 전한(典翰) 류대승(柳大升)에게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