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녕군파 4세 약사에는 총 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금천군(錦川君) ? ∼1506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변(변), 자는 이열(而悅), 시호는 효의(孝毅). 우산군의 5남으로 처음에는 금천부정(錦川副正)에 제수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중인의 촉망을 받았었는데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되고 갑자사화 때 형을 받고 온 집안이 모두 남해 고도로 귀양갔다가 1506년(중종 1) 6월 24일 6부자가 일시에 사사되고, 그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명선대부 금천도정에 추증되고 장지를 하사받았다.
1705년(숙종 31) 정려문이 내려지고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금천군에 추증되었으며 1910년(순종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고령신씨로 준(浚)의 딸이며 신숙주의 손녀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선영 국내 간좌이다.
1705년(숙종 31) 정려문이 내려지고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금천군에 추증되었으며 1910년(순종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고령신씨로 준(浚)의 딸이며 신숙주의 손녀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선영 국내 간좌이다.
무풍군(茂豊君) ? ∼1504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총(摠),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西湖) · 구로주인(鷗鷺主人) · 월창(月窓), 시호는 충민(忠愍).
우산군의 차남으로 인품이 출중하고 충효가 깊었으며 절개가 굳어 뭇 사람이 존경하였다.
시문을 잘하고 음률에도 신묘한데 양화도(楊花渡)에다 별장을 짓고 풍류를 즐기면서 시인 묵객이 찾아오면 반가이 맞고 속객이 방문하면 숨어 버리곤 했다.
남효온 · 김일손 · 김굉필 · 정여창 · 조위 등과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되었는데 단천역(端川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다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6월 5일에 사사되었다. 1506년(중종 1)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고 1705년(숙종 31) 정려문을 받고, 1735년(영조 11) 부정(副正)에서 군으로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에 소민(昭愍)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1900년(광무 4) <선원보>를 수보(修譜)할 때 전의 시호가 맞지 않는다고 장례원경 리근수(李根秀)가 상소하고 종정경 리재원(李載元)이 건의하였으나 시호가 내려지지 않다가 1910년에 충민(忠愍)이라 고쳐졌다.
배위는 신부인 평양조씨로 견지(見知)의 딸과 신부인 의령남씨로 추강(秋江) 효온(孝溫)의 딸이다.
무풍군은 5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선영 국내 간좌이다.
무풍군은 당시 청담파(淸談派)의 중심인물로 현존하는 <서호문집>외에 시조 몇 수가 전한다. 그 시조 중에 다음 것이 유명하다.
이몸이 쓸 데 없어 세상에 버리거늘
서호의 옛 집을 다시 쓸고 누웠으니
일신이 한가할손 내님 못 보아 하노라.
우산군의 차남으로 인품이 출중하고 충효가 깊었으며 절개가 굳어 뭇 사람이 존경하였다.
시문을 잘하고 음률에도 신묘한데 양화도(楊花渡)에다 별장을 짓고 풍류를 즐기면서 시인 묵객이 찾아오면 반가이 맞고 속객이 방문하면 숨어 버리곤 했다.
남효온 · 김일손 · 김굉필 · 정여창 · 조위 등과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되었는데 단천역(端川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다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6월 5일에 사사되었다. 1506년(중종 1)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고 1705년(숙종 31) 정려문을 받고, 1735년(영조 11) 부정(副正)에서 군으로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에 소민(昭愍)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1900년(광무 4) <선원보>를 수보(修譜)할 때 전의 시호가 맞지 않는다고 장례원경 리근수(李根秀)가 상소하고 종정경 리재원(李載元)이 건의하였으나 시호가 내려지지 않다가 1910년에 충민(忠愍)이라 고쳐졌다.
배위는 신부인 평양조씨로 견지(見知)의 딸과 신부인 의령남씨로 추강(秋江) 효온(孝溫)의 딸이다.
무풍군은 5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선영 국내 간좌이다.
무풍군은 당시 청담파(淸談派)의 중심인물로 현존하는 <서호문집>외에 시조 몇 수가 전한다. 그 시조 중에 다음 것이 유명하다.
이몸이 쓸 데 없어 세상에 버리거늘
서호의 옛 집을 다시 쓸고 누웠으니
일신이 한가할손 내님 못 보아 하노라.
온녕군(溫寧君) 1407∼1453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정(정), 시호는 양혜(良惠). 태종대왕의 3남으로 어머니는 신빈(信嬪) 영월신씨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종학(宗學)에서 수학할 때 여러 아우들의 모범이 되어 궁중에서도 존중을 받는 왕자였다.
배위는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로 찬성을 지낸 안명(安命)의 딸이다. 그러나 온녕군은 후사가 없어 아우 근녕군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 3거리 서쪽 언덕 술좌에 있었으나 도시 확장 관계로 1962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1 갑좌로 이장했고 배위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90-1 병좌에 있었으나 1988년 대자동으로 옮겨 535년만에 부군과 합폄했다.
온녕군의 사당은 봉사손이 살던 충남 공주시 신풍면 행정리에 있었으나 15대손 희천(羲天)이 독자적으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에 이건하여 60여 년을 받들어 왔는데, 1988년부터 파종회에서 모시고 있다.
배위는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로 찬성을 지낸 안명(安命)의 딸이다. 그러나 온녕군은 후사가 없어 아우 근녕군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 3거리 서쪽 언덕 술좌에 있었으나 도시 확장 관계로 1962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1 갑좌로 이장했고 배위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90-1 병좌에 있었으나 1988년 대자동으로 옮겨 535년만에 부군과 합폄했다.
온녕군의 사당은 봉사손이 살던 충남 공주시 신풍면 행정리에 있었으나 15대손 희천(羲天)이 독자적으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에 이건하여 60여 년을 받들어 왔는데, 1988년부터 파종회에서 모시고 있다.
용성군(龍城君) ? ∼1506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원(援), 자는 문연(文淵), 시호는 정민(貞愍). 우산군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부정(副正)을 받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남해의 고도로 유배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에 사사되고, 그 해 9월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었다. 이때 군으로 추증되고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지고 1910년에 시호를 받았다. 외아들 운양정(雲陽正)을 두었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로 윤종(允宗)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좌에 있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로 윤종(允宗)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좌에 있다.
우산군(牛山君) ? ∼1506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종(踵), 자는 계이(繼而), 호는 정재(靜齋), 시호는 정민(貞愍). 온녕군의 계자이며 생부는 근녕군이다. 우산군은 체구가 건장하고 인품이 준수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종실을 상대로 시행하는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하였다.
오직 절의와 지조를 굳게 가지고 아들들의 훈육에 힘써 당대 석학을 찾아 이들의 학업을 맡겼었다.
그러나 차남인 무풍군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효수형을 받자, 우산군은 다른 아들 5형제와 함께 남해의 섬으로 귀양갔다가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에 함께 사사되었다. 무풍군을 포함해서 이른바 7공자라 부른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어 품계가 가덕대부에 이르고 나라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지고 시호를 정민(貞愍)이라 받았다.
배위는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로 효장(孝章)의 딸이며 슬하에 6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좌에 있다.
오직 절의와 지조를 굳게 가지고 아들들의 훈육에 힘써 당대 석학을 찾아 이들의 학업을 맡겼었다.
그러나 차남인 무풍군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효수형을 받자, 우산군은 다른 아들 5형제와 함께 남해의 섬으로 귀양갔다가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에 함께 사사되었다. 무풍군을 포함해서 이른바 7공자라 부른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췦)되어 품계가 가덕대부에 이르고 나라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지고 시호를 정민(貞愍)이라 받았다.
배위는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로 효장(孝章)의 딸이며 슬하에 6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간좌에 있다.
청양군(靑陽君) ? ∼1506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건(?), 자는 공간(公幹), 호는 자구와(自求窩), 시호는 정헌(貞憲).
우산군의 6남으로 처음에는 부정(副正)으로 제수되었다. 천품이 단아하고 후덕하여 세인의 중망을 받았다. 연산군 무오사화 때 중형 무풍군이 관련되었으므로 갑자사화 때 나머지 6부자도 함께 거제도로 귀양갔다가 1506년(중종 1) 6월 24일에 6부자가 함께 사사되었다. 그 해 9월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창선대부 청양부정에서 명선대부 청양도정에 오르고 장지를 하사받았다. 1705년(숙종 31) 정려문을 하사받고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청양군에 추증되고, 1910년(융희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송심씨로 담(淡)의 딸인데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선영 안산 유좌이다.
우산군의 6남으로 처음에는 부정(副正)으로 제수되었다. 천품이 단아하고 후덕하여 세인의 중망을 받았다. 연산군 무오사화 때 중형 무풍군이 관련되었으므로 갑자사화 때 나머지 6부자도 함께 거제도로 귀양갔다가 1506년(중종 1) 6월 24일에 6부자가 함께 사사되었다. 그 해 9월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창선대부 청양부정에서 명선대부 청양도정에 오르고 장지를 하사받았다. 1705년(숙종 31) 정려문을 하사받고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청양군에 추증되고, 1910년(융희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송심씨로 담(淡)의 딸인데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선영 안산 유좌이다.
한산군(韓山君) 1471∼1506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정(挺), 자는 이직(而直),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 시호는 민절(愍節).
우산군의 3남으로 천품이 영특하고 호기가 출중하였다. 음률에 뛰어나고 시주를 즐기며 사교에 능했다. 중형 무풍군 사건에 연루되어 1506년(중종 1) 6월 24일 연산군에 의해서 6부자가 죽음을 당할 때 평시와 같이 웃으면서 별세했다. 그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명선대부 한산도정에 추증되고 묘지가 하사되었으며,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졌다.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한산군에 봉해지고, 1910년(순종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평양조씨이며 슬하에 외아들 신양수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화접리 불암산 아래 묘좌이다.
우산군의 3남으로 천품이 영특하고 호기가 출중하였다. 음률에 뛰어나고 시주를 즐기며 사교에 능했다. 중형 무풍군 사건에 연루되어 1506년(중종 1) 6월 24일 연산군에 의해서 6부자가 죽음을 당할 때 평시와 같이 웃으면서 별세했다. 그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명선대부 한산도정에 추증되고 묘지가 하사되었으며, 1705년(숙종 31)에 정려문이 내려졌다.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한산군에 봉해지고, 1910년(순종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평양조씨이며 슬하에 외아들 신양수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화접리 불암산 아래 묘좌이다.
화원군(花原君) 1476∼1506 파명:온녕군(溫寧君)
  휘는 동(?), 자는 공택(公擇), 시호는 혜정(惠貞). 우산군의 4남으로 처음에는 부정(副正)이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된 중형 무풍군 사건으로 아버지 우산군을 비롯한 7부자가 갑자사화 때 남해 고도로 귀양갔다가 1506년(중종 1) 6월 24일에 사사되었다. 그 해 9월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명선대부 화원도정에 추증되고 묘지를 하사받았다. 1705년(숙종 31) 정려문이 세워지고 1900년(광무 4) 자헌대부 화원군에 봉해지고, 1910년(융희 4)에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부인 초계정씨로 전(詮)의 딸이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었으나 1977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1-2 선영하 경좌로 이장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초계정씨로 전(詮)의 딸이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었으나 1977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1-2 선영하 경좌로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