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춘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수안군(遂安君) 1455∼1510 파명:수춘군(壽春君)
  휘는 당(셼), 자는 근옹(謹翁), 시호는 양소(襄昭). 정국공신이다. 1455년(단종 3)에 밀성군의 3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1468년(세조 14)에 수안도정(遂安都正)으로 봉해졌고 1469년(예종 1)에는 품계가 올라 수안군으로 봉해졌다. 1505년(연산군 11) 충의의사(忠義義士)를 길러서 진성대군(晉城大君) 즉 중종대왕을 왕위로 추대키로 하고 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그 해 9월 2일에 수안군은 전 이조판서 성희안(成希顔) ·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 이조판서 류순정(柳順汀) · 군위시첨정(軍威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기로 모의, 저녁에 훈련원에서 회동하고 장졸을 부처별로 모아 밤중에 창덕궁 어귀에 진을 쳤다. 영의정 류순(柳洵) · 우의정 김수동(金壽童)과 합류하여 용사들을 시켜 간신인 신수근(愼守勤) · 임사홍(任士洪) · 신수영(愼守英) 등을 죽이고 옥문을 열어 죄인을 풀어 군대에 편입시켰다. 날이 밝자 대궐로 나가 류자광(柳子光) · 김영남(金永男) · 김수경(金壽卿)에게 대내(大內)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박원종은 백관과 군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나가 대비에게 진성대군을 신왕(新王)으로 명하기를 간청하였다. 마침내 대비의 명을 받아 진성대군을 중종대왕으로 오르게 하니, 중종대왕은 그 공이 지대하다 하여 병충분의 결책익운 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翼運靖國功臣) 4등 공신을 하사하였으며 위계를 높여 종1품 가덕대부로 봉하였다. 수안군이 51세 때인 1506년(중종 1) 정월, 중종대왕은 “수춘군의 후사가 없으니 어찌 무관심하리오.”라고 하며 수춘군의 서거를 애석하게 여기고, 비록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밀성군의 셋째 아들인 수안군을 수춘군 계자로 봉하도록 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수안군은 어명을 받들어 수춘군의 아들로 입적하고 슬하의 3남 4녀의 자녀를 수춘군의 손자와 손녀로 입적시켰다. 그 후 1510년(중종 5) 3월 18일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56세였다. 석달 후인 6월 16일,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등원리에 예장하였으며 문인석 · 비석이 있다.
배위 가평군부인(加平郡夫人) 죽산안씨는 군수 종도(從道)의 딸로 수안군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의인군, 차남은 안흥도정, 3남은 적성군이다. 장녀는 정윤(鄭潤)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민천석(閔天錫)에게, 3녀는 한세창(韓世昌)에게, 4녀는 하익정(河益精)에게 출가하였다. 배위의 묘소는 수안군과 합부하였다.
배위 가평군부인(加平郡夫人) 죽산안씨는 군수 종도(從道)의 딸로 수안군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의인군, 차남은 안흥도정, 3남은 적성군이다. 장녀는 정윤(鄭潤)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민천석(閔天錫)에게, 3녀는 한세창(韓世昌)에게, 4녀는 하익정(河益精)에게 출가하였다. 배위의 묘소는 수안군과 합부하였다.
적성군(赤城君) 1484∼1539 파명:수춘군(壽春君)
  휘는 석(錫), 수안군의 3남이며 외모가 출중하고 자랄수록 영특하고 총명했다. 1498년(연산군 4)에 초수(初授)는 적성부수(赤城副守)로 봉해졌다. 이 후 한서(漢書)에 정진하여 문사로서 조신(操身)에 법도가 있었으므로 덕행으로 추앙받고, 1510년(중종 5)에 음사(蔭仕)로 군(君)에 봉해졌으며 정의대부이다.
배위는 풍산심씨 영흥부(永興府) 판관 광필(光弼)의 딸이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함양군(咸陽君) 기(機), 차남은 흥양군(興陽君) 영(楹), 3남은 임계부령(臨溪副令) 권(權)이다. 장녀는 한양조씨 종형(宗亨)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동래정씨 경충(敬忠)에게 출가하였다.
적성군은 1539년(중종 34) 병환으로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20의 3에 배위와 함께 합부하였는데, 1977년 2월에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망월리 산399-1로 이장하여 합부하였다.
배위는 풍산심씨 영흥부(永興府) 판관 광필(光弼)의 딸이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함양군(咸陽君) 기(機), 차남은 흥양군(興陽君) 영(楹), 3남은 임계부령(臨溪副令) 권(權)이다. 장녀는 한양조씨 종형(宗亨)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동래정씨 경충(敬忠)에게 출가하였다.
적성군은 1539년(중종 34) 병환으로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20의 3에 배위와 함께 합부하였는데, 1977년 2월에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망월리 산399-1로 이장하여 합부하였다.
흥양군(興陽君) 1499∼1574 파명:수춘군(壽春君)
  흥양군(興陽君) [1499(연산군 5)∼1574(선조 7)]
휘는 영(楹), 자는 국주(國柱)이다. 적성군의 2남이며 어머니는 풍산심씨이다. 1499년(연산군 5) 8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경서를 읽었으며 자라서 흥양령(興陽令)을 받았다. 거듭 품계가 높아져 흥양수(興陽守)에 이르렀고 1529년(중종 24) 12월에는 종친들의 학예고시에서 2등을 하여 품계가 올라 흥양정(興陽正)이 되었다. 1550년(명종 5) 1월에는 재시(再試)에서 장원을 하여 흥양도정 명선대부에 올랐다. 1560년(명종 15) 6월에는 62세의 나이로 대궐에서 임금이 직접 보는 시험에서 우등하여 정의대부를 받았고 군으로 봉해졌다.
흥양군은 성품이 온순하였고 호사하지 않아 가난해서 여축이 없어도 마음은 늘 태평하였다. 항상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바둑 두는 것으로 소일하였고 친구를 사귀면 대접을 극진히 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의 넓은 국량에 탄복하였다. 또한 흥양군은 모든 조정 청약(請約)과 공식 모임에 늙을수록 더욱 빠짐없이 참석하여야 한다고 하며 말하기를 “왕가 혈족의 벼슬은 은혜가 특별히 크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만의 하나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 어찌 늙고 병들었다 하여 감히 불참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574년(선조 7) 10월 8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6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도 슬퍼하고 특사를 보내어 조상하고 제전(祭奠)을 지내게 하였다. 또한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20의 1번지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명문을 하사하였는데 그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世宗之支 公族振振
公族之中 惟公其人
治經高第 爵秩超倫
不撰遺烈 刻之貞珉
세종대왕 지손으로 공의 문중 떨쳤어라.
공족들 종중에서도 공의 행적 뚜렷하도다.
경서 닦아 높은 성적 위계(位階) 또한 뛰어났네.
끼친 자취 글로 엮어 돌에 새겨 기념하라.
배위는 언양김씨 창신교위(彰信校尉) 종5품 행부장 철공(行部將 哲恭)의 딸이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억룡(憶龍)으로 충좌위 부사과(忠佐尉副司果) 종6품이었고, 차남 억령(憶齡)은 무과의 별천으로 진첨절제사(鎭僉節制使) 종4품을 제수받았다. 3남 억정(憶禎)은 진사를 지냈고 4남 억서(憶瑞)는 충위 좌부사정(忠衛佐副司正) 종7품이었다. 딸은 내금위 서수의(徐壽義)에게 출가시켰다. 배위 김씨는 1497년(연산군 3) 11월 6일 태어나 1570년(선조 3) 3월 16일 별세하니 향년 74세였다.
휘는 영(楹), 자는 국주(國柱)이다. 적성군의 2남이며 어머니는 풍산심씨이다. 1499년(연산군 5) 8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경서를 읽었으며 자라서 흥양령(興陽令)을 받았다. 거듭 품계가 높아져 흥양수(興陽守)에 이르렀고 1529년(중종 24) 12월에는 종친들의 학예고시에서 2등을 하여 품계가 올라 흥양정(興陽正)이 되었다. 1550년(명종 5) 1월에는 재시(再試)에서 장원을 하여 흥양도정 명선대부에 올랐다. 1560년(명종 15) 6월에는 62세의 나이로 대궐에서 임금이 직접 보는 시험에서 우등하여 정의대부를 받았고 군으로 봉해졌다.
흥양군은 성품이 온순하였고 호사하지 않아 가난해서 여축이 없어도 마음은 늘 태평하였다. 항상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바둑 두는 것으로 소일하였고 친구를 사귀면 대접을 극진히 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의 넓은 국량에 탄복하였다. 또한 흥양군은 모든 조정 청약(請約)과 공식 모임에 늙을수록 더욱 빠짐없이 참석하여야 한다고 하며 말하기를 “왕가 혈족의 벼슬은 은혜가 특별히 크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만의 하나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 어찌 늙고 병들었다 하여 감히 불참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574년(선조 7) 10월 8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6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도 슬퍼하고 특사를 보내어 조상하고 제전(祭奠)을 지내게 하였다. 또한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20의 1번지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명문을 하사하였는데 그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世宗之支 公族振振
公族之中 惟公其人
治經高第 爵秩超倫
不撰遺烈 刻之貞珉
세종대왕 지손으로 공의 문중 떨쳤어라.
공족들 종중에서도 공의 행적 뚜렷하도다.
경서 닦아 높은 성적 위계(位階) 또한 뛰어났네.
끼친 자취 글로 엮어 돌에 새겨 기념하라.
배위는 언양김씨 창신교위(彰信校尉) 종5품 행부장 철공(行部將 哲恭)의 딸이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억룡(憶龍)으로 충좌위 부사과(忠佐尉副司果) 종6품이었고, 차남 억령(憶齡)은 무과의 별천으로 진첨절제사(鎭僉節制使) 종4품을 제수받았다. 3남 억정(憶禎)은 진사를 지냈고 4남 억서(憶瑞)는 충위 좌부사정(忠衛佐副司正) 종7품이었다. 딸은 내금위 서수의(徐壽義)에게 출가시켰다. 배위 김씨는 1497년(연산군 3) 11월 6일 태어나 1570년(선조 3) 3월 16일 별세하니 향년 7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