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광선군(光善君) 1654∼1707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장(장), 해평군의 계자로 생부는 해령군이다. 초수로 부정계(副正階)로 봉군되고, 후에 명의대부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현부인 기계유씨 사이에 기안도정 구(構)와 기성정 를 두고 54세에 별세하였다.
현부인 기계유씨 사이에 기안도정 구(構)와 기성정 를 두고 54세에 별세하였다.
기안도정(杞安都正) 1677∼1717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구(構), 초수로는 수계(守階)였으나 도정(都正)이 되어 명선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신부인 죽산안씨로 익현(益炫), 익성(益성:火+星)과 4녀를 두었다.
배위는 신부인 죽산안씨로 익현(益炫), 익성(益성:火+星)과 4녀를 두었다.
밀창군(密昌君) 1677∼1746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직(?), 자는 군실(君實), 호는 양망재(兩忘齋), 시호는 정헌(靖獻). 화선군의 계자이며 생부는 화산군이고 인성군의 증손자이다. 처음에는 수(守)를 제수받았으나 나중에 군이 되어 현록대부에 올랐다. 종친부 유사 당상 겸 12부처 제조를 겸했으며 세 번이나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임금의 총애를 깊이 받아 일찍이 문장(門長)이라 불렸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부의를 내리고 효정려(孝旌閭)를 내렸다. 배위는 군부인 동복오씨 시적(始績)의 딸이다. 묘소는 고양시 상암리 간좌이다.
서평군(西平君) 1687∼1756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요(橈), 인성군의 증손이며 화춘군의 차남이다. 처음에는 수(守)를 받았다가 나중에 군이 되어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종계변무(宗系辯誣)로 연경에 다녀왔는데 인조반정의 일로 두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왔다. 연경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중국 황제가 서평군이 글씨를 잘 쓴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 내 10개 문의 현판을 쓰라고 하여 공의 명필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종실 신도비의 대부분이 공의 글씨이다.
배위는 군부인 여흥민씨로 정환(挺桓)의 딸과 삭녕최씨 경준(慶儁)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임좌이다.
배위는 군부인 여흥민씨로 정환(挺桓)의 딸과 삭녕최씨 경준(慶儁)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임좌이다.
여성군(礪城君) 1668∼1731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집(楫), 자는 제경(濟卿), 호는 수분와(守分窩). 인성군의 증손으로 영창군(瀛昌君)의 아들이며 화천군(花川君)에게 입양되었다. 1704년(숙종 30) 여성군(礪城君)으로 봉해졌으며 부총관을 거쳐 1719년(숙종 45) 도총관에 승진되어, 종부시제조(宗簿寺提調)를 겸하여 종학강과(宗學講課)의 법을 제정하였다. 1725년(영조 1) 왕세자의 책봉을 위해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효행이 독실하였으므로 여정(閭旌)에 이록(移錄)되었으며 젊어서부터 서도에 힘써 양왕(兩王 : 王羲之 · 王獻之)의 필법을 터득하여 글씨에 뛰어났고 팔분체에도 정묘하였다. 청송의 낙선군(樂善君) 축(潚)의 신도비를 썼으며, 또 영천군수 권덕윤표(權德潤表)를 쓰기도 하였다.
영원군(靈原君) 1669∼1730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헌(櫶),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의(孝懿). 선조대왕의 4대손으로 광평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고령신씨로 선교랑 선호(善浩)의 딸이다. 1683년(숙종 9) 영원수(靈原守)가 되었고, 1706년(숙종 32) 도정 겸 사옹원 부제조가 되었다. 1710년(숙종 36)에는 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하여 지은 갱진시(죖進詩)의 구본에 서(序)를 붙여 간행하게 한 공로로 영원군(靈原君)에 봉해졌고, 도총부의 부총관 여섯 번, 도총관 세 번을 역임하였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으며, 또 효행이 뛰어나 아버지가 병이 들자 매일 산에 올라 하늘에 빌었고 편모를 봉양할 때 지성을 다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일을 반드시 여쭙고 행했다. 또한 몸소 제사를 지냈고 늙고 병들었어도 자식들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에서 효정(孝旌)을 내렸다. 9회에 걸쳐 오위도총부에 들어가 3회 부총관이 되었고 3회 도총관이 되었으며 가덕대부(嘉德大夫)로서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 되었다. 공은 생전에 임금이 베푸는 잔치에 자주 참석했는데, 어느 정월 보름날에 어사주를 두고 읊은 시가 유명하다.
上元令節會宗英
佳氣融融日色明
公等莫辭樽酒醉
一盃宮춠콪由誠
정월 보름에 종영들이 모이니
기분좋고 날씨도 밝도다
여러분 술 취함을 사양하지 마소
한 잔 궁중 술이 모두 정성이로다
上元令節會宗英
佳氣融融日色明
公等莫辭樽酒醉
一盃宮춠콪由誠
정월 보름에 종영들이 모이니
기분좋고 날씨도 밝도다
여러분 술 취함을 사양하지 마소
한 잔 궁중 술이 모두 정성이로다
인성군(仁城君) 1588∼1628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공(珙), 호는 백인당(百忍堂), 시호는 효민(孝愍). 선조대왕의 7남으로서 정빈 민씨 소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선조대왕이 몹시 사랑했었다. 학업은 일취월장했고, 필법은 달관,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12세에 인성군에 봉해지고 사옹원 ·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의 책임을 겸했는데 사무 처리가 너그럽고 엄하며 공명정대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또한 호령을 한번 내리면 모두들 두려워 했으며 광해군이 날로 꺼려했고 이이첨 등은 공의 인망을 시기하여 사형수에게 무고하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궐하에 석고대죄하고 죄를 기다린지 수 일만에 울분으로 병이 나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인심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이유림(李有林)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었고 거기에 인성군이 관련되었다고 했으나 임금은 불문에 부쳤다. 그러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 또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하므로 인조대왕은 할수없이 인성군을 간성(杆城)에 유배시켰다가 곧 원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사면되어 돌아왔는데 1628년(인조 6) 정월 류효립(柳孝立)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때 또 인성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인목대비가 크게 놀라 죄를 물으라 하였다. 이에 인성군은 진도로 귀양보내졌고, 자진하라는 명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1628년 5월 20일, 41세 때였다.
이에 관련되어 부인 윤씨와 다섯 아들이 모두 제주도로 귀양갔는데, 10년 후에 정온(鄭蘊)과 강학년(姜鶴年)의 상소로 해평군 · 해안군 · 해원군 3형제는 강원도 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고, 해령군과 해양군은 어린 이유로 사면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정월 초하루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 절을 하고 호소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슬프더니 문득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말소리가 매우 가늘어 시종들이 자세히 듣지 못했고, 임금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임금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가 며칠 뒤에 서울로 돌아와 복작의 명을 내리니 설날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인성군이었다고 한다. 인성군은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유시(遺詩)가 전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임금은 숙부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아직 인심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이유림(李有林)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었고 거기에 인성군이 관련되었다고 했으나 임금은 불문에 부쳤다. 그러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 또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하므로 인조대왕은 할수없이 인성군을 간성(杆城)에 유배시켰다가 곧 원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사면되어 돌아왔는데 1628년(인조 6) 정월 류효립(柳孝立)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때 또 인성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인목대비가 크게 놀라 죄를 물으라 하였다. 이에 인성군은 진도로 귀양보내졌고, 자진하라는 명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1628년 5월 20일, 41세 때였다.
이에 관련되어 부인 윤씨와 다섯 아들이 모두 제주도로 귀양갔는데, 10년 후에 정온(鄭蘊)과 강학년(姜鶴年)의 상소로 해평군 · 해안군 · 해원군 3형제는 강원도 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고, 해령군과 해양군은 어린 이유로 사면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정월 초하루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 절을 하고 호소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슬프더니 문득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말소리가 매우 가늘어 시종들이 자세히 듣지 못했고, 임금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임금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가 며칠 뒤에 서울로 돌아와 복작의 명을 내리니 설날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인성군이었다고 한다. 인성군은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유시(遺詩)가 전한다.
해령군(海寧君) 1615∼1690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급(伋), 자는 자성(子聖), 시호는 강의(康懿). 인성군의 4남으로 어려서 아버지 인성군이 역모로 몰리자 온 가족이 제주도로 귀양갔고, 강원도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거마(車馬)를 준비해 두지 못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난리가 나면 임금을 따라 피난가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려 했는데 말이 없었다. 다행히 집안에 임금에게 하사받은 말 한 필이 있었는데 길들이지를 못했었다. 급한 김에 그 말을 타고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인조대왕을 호종하니 임금은 가상히 여겨 인성군 집안을 복관시켜 주었다. 그 후 인조와 효종 양대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자손들이 번창하고 가문이 부유했다. 그러나 몸가짐을 더욱 겸손히 가졌다. 그리고 말을 가리키며 “우리들이 하늘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저 말 때문이다.”라고 했다. 향년 76세에 별세했다.
해양군(海陽君) 1620 ~ 1682 파명:인성군(仁城君)
 휘(諱)는 희(僖). 자는 자미(子美) 호는 죽설(竹雪)이다. 인성군의 5남 2녀 중 5남으로서 초수(初授)로 정승 명선도정(正陞明善都正)이었다가 후에 수덕군(綏德君)으로 봉군(封君)되고, 다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배위는 군부인 순흥 안씨에 이어 계배위(繼配位)로 군부인 광산 정씨, 군부인 한산 이씨, 그리고 덕수 이씨를 맞았다. 향년은 63세이다.
해원군(海原君) 1614∼1662 파명:인성군(仁城君)
  휘는 건(健), 자는 자강(子强), 호는 규창(葵窓), 시호는 충효(忠孝).
인성군의 3남으로서 일찍이 인성군이 반정공신 이귀(李貴)의 핍박으로 역모혐의를 받고 1628년에 대역 처분을 받으면서 형 해평군 · 해안군 등과 더불어 역신의 자손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이귀가 죽자 무옥(誣獄)임이 밝혀졌고, 그리하여 인조의 특별한 배려로 1635년 제주도에서 울진으로 이배되었으며, 1637년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1657년(효종 8) 해원군의 군호를 받았다. 성품이 건실하고 사치와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그만 서실을 마련하여 경적(經籍)에 침잠하면서 시를 짓고 글씨와 그림에 힘썼으니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규창집>이 전해진다.
인성군의 3남으로서 일찍이 인성군이 반정공신 이귀(李貴)의 핍박으로 역모혐의를 받고 1628년에 대역 처분을 받으면서 형 해평군 · 해안군 등과 더불어 역신의 자손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이귀가 죽자 무옥(誣獄)임이 밝혀졌고, 그리하여 인조의 특별한 배려로 1635년 제주도에서 울진으로 이배되었으며, 1637년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1657년(효종 8) 해원군의 군호를 받았다. 성품이 건실하고 사치와 재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그만 서실을 마련하여 경적(經籍)에 침잠하면서 시를 짓고 글씨와 그림에 힘썼으니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규창집>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