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파 4세 약사에는 총 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평군(慶平君) 1600∼1673 파명:경평군(慶平君)
  선조대왕의 11남이며 휘는 늑(폠), 호는 냉천정(冷泉亭),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어머니는 온빈(溫嬪) 청주한씨이고 배위는 삭녕최씨, 남양홍씨, 하음전씨이다.
경평군은 성품이 맑고 곧으며 말수가 적은 편으로 빈한한 선비의 차림이었으나 의지가 굳세고 문장 짓는 재주가 뛰어나 7, 8세에 재주와 덕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어진 사람을 존경하며 비록 왕자의 신분이나 자신을 낮추어 조야에서 금일의 맹자(孟子)라 하여 이를 일생일대의 영예로 여겼다.
당시 연산군의 실정의 여파로 영창대군, 진릉군, 능창군 및 흥안군(興安君), 인성군(仁城君)이 차례로 살해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되 생과 사는 홍모(鴻毛)보다도 가벼운 것이며 재화에 또한 뜻이 없어 세상일을 잊고 유연자락(悠然自樂)하고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자적의 심정만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초정(椒井) 광릉(光陵)에서 탄식하며 읊은 시에서도 알 수 있다. 뛰어난 언행으로 5조(五朝)에 걸쳐 무사히 수명을 보전하였으되 단 한번의 허물이나 방자함이 없이 향년 74세에 별세하였다.
경평군은 성품이 맑고 곧으며 말수가 적은 편으로 빈한한 선비의 차림이었으나 의지가 굳세고 문장 짓는 재주가 뛰어나 7, 8세에 재주와 덕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어진 사람을 존경하며 비록 왕자의 신분이나 자신을 낮추어 조야에서 금일의 맹자(孟子)라 하여 이를 일생일대의 영예로 여겼다.
당시 연산군의 실정의 여파로 영창대군, 진릉군, 능창군 및 흥안군(興安君), 인성군(仁城君)이 차례로 살해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되 생과 사는 홍모(鴻毛)보다도 가벼운 것이며 재화에 또한 뜻이 없어 세상일을 잊고 유연자락(悠然自樂)하고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자적의 심정만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초정(椒井) 광릉(光陵)에서 탄식하며 읊은 시에서도 알 수 있다. 뛰어난 언행으로 5조(五朝)에 걸쳐 무사히 수명을 보전하였으되 단 한번의 허물이나 방자함이 없이 향년 74세에 별세하였다.
동원군(東原君) 1651∼1717 파명:경평군(慶平君)
  휘는 집(潗), 자는 사심(士深). 경평군의 장손. 배위 청송심씨와의 사이에서 손이 없어 영양군(永陽君)파 청릉군(靑陵君) 모(模)를 계자로 삼았다. 처음에는 부정(副正)을 받았다가 도정(都正)이 되어 도총관이 되었다.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오고 숙종대왕 때 사직단과 종묘를 잘 관리한 공으로 군으로 되었고 67세로 별세하였다.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오고 숙종대왕 때 사직단과 종묘를 잘 관리한 공으로 군으로 되었고 67세로 별세하였다.
영양군(嶺陽君) 1619∼1675 파명:경평군(慶平君)
  휘는 환(탶), 자는 중민(仲敏), 호는 오농정(五쩅亭). 경평군의 장남. 1633년(인조 11) 처음으로 정(正)을 받고, 이어 영양군으로 봉해졌다. 사옹원 제조를 역임하고 병자호란 때 어가를 잘 호종했고 남한산성에서 종친부 유사 당상에, 1643년(인조 21) 사옹원 제조를 겸직하다가 도총관을 지냈다. 1648년(인조 26), 1669년(효종 10), 1676년(숙종 2)의 혼란기에 나라의 어려운 일을 잘 수행하였고, 하정사(賀正使), 어필 간행의 공로로 소덕대부에 이르고, 1673년(현종 14) 부친상으로 3년시묘 중에 57세로 별세하였다.
청릉군(靑陵君) 1673∼1723 파명:경평군(慶平君)
  휘는 모(模), 자는 원례(元禮), 호는 양성재(養性齋). 생부는 중종대왕 4남인 영양군파 후손 중번(重蕃)이며 동원군의 계자로 입사(入嗣)하였다. 처음에는 종친 품계 수(守)를 받았다가 도정(都正)을 거쳐 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