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공인(公仁) ?∼?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자는 극기(克己), 대군의 6대손으로 학천군 · 창선군 · 낙평군의 후손이다. 1553년(명종 8) 친경별시(親耕別試) 병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정자(正字) · 이조정랑 · 사간원 정언 · 정선군수 등을 역임했다.
명룡(明龍) 1873∼1956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호는 춘헌(春軒). 대군의 4남인 영천군의 14대손 창엽(昌葉)의 장남이다.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다. 1887년 정주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후 육영사업과 신앙생활에 진력했다. 1902년(광무 6)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이 되어 동양척식회사의 한국인 토지매수를 반대, 한국인의 주권(株券) 소유를 주장했다. 1911년 사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와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3년 동안 복역했다. 1916년 교회 장로가 되고 한편으로 농장을 경영하여 교회를 설립했고 국산품 애용운동을 벌였다. 1945년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취임했고 재산을 처분하여 평동중학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다가 1947년에 월남했다. 1954년 12월 반공연맹 이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북도 도민회 · 3·1운동 선양회 · 조선민주당 · 리준열사 기념사업회 등의 고문을 역임하고, 1956년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 오산중학교 건축 발기인 회장이 되었다. 평생에 성서와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고 근면 절약하며 일일이식(一日二食)을 실천했다. 사후 사회장으로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보영(輔永) 1890∼1955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17대손 상익(象翼)의 3남으로 양주(楊州) 미금(渼金)에서 성장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93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운동의 공로로 그 후손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승익(升翼) 1875∼1946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독립투사로 1919년 3·1운동 때 만세사건으로 1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대군 17대손으로 통사랑(通仕郞)이며 경의전 전사(敬懿殿 典祀)를 지냈다.
의종(義宗) 1685∼175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자는 득지(得之), 대군의 13대손으로 조부는 만적(萬積), 생부는 억령(億齡), 영천군 · 풍안군 · 문평군의 후손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 때 충신 `노론(老論) 4대신(大臣)\'을 따르다가 철산으로 귀양을 갔고 1725년(영조 1)에 돌아와 울산부사 등 5지방관을 지내고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
적(績) 1507 ∼1569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5대손이며 영천군의 현손이다. 충청 · 경상병마절도사를 지낸 병사공 형순(亨順)의 장남이다. 능성 · 금구 · 봉화 · 양천현감을 두루 거친 청백리이며 음 통훈대부이다.
주심(周心) 1778∼1841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자는 종심(宗心), 대군의 16대손이며 완천군 · 하릉군 · 순흥군의 후손이다. 1801년(순조 1) 식년시 병과에 급제 도사(都事)를 지냈다.
배위는 충주김씨로 묘소는 평북 정주군 운전리 천봉산 남록에 있다.
배위는 충주김씨로 묘소는 평북 정주군 운전리 천봉산 남록에 있다.
주현(周顯) 1831∼1909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16대손으로 성균관 진사이며 고종태황제 어필서(御筆書)를 지냈다. 선원보(璿源譜) 경자(庚子) 갑자보(甲子譜)를 편찬하였다.
주황(周璜) 1848∼1886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자는 문좌(文佐), 대군의 16대손이며 승려(承呂)의 아들, 학천군 · 창성군 · 청양군의 후손이다. 1881년(고종 18) 정시(庭試) 병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형순(亨順) 1475 ∼1541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자는 통부(通夫)이다. 대군의 현손으로 1507년(중종 2)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후에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12년(중종 7) 군기주부에 이어 부안현감을 역임하고, 1518년(중종 13) 창성부사, 1523년(중종 18) 길주목사, 1528년(중종 23) 만포첨사, 1532년(중종 27) 함경도 수군병마절도사, 1534년(중종 29) 상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11월에는 사은사로 임명되어 중국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1535년(중종 30) 충청병마절도사, 1536년(중종 31) 경상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37년(중종 32)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1541년(중종 36) 3월에 별세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에 있었는데 분당 신도시 개발로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당산하로 천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에 있었는데 분당 신도시 개발로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당산하로 천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