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숙달(叔達) 1617∼1670 파명:견성군(甄城君)
  숙달(叔達) [1617(광해군 9)∼1670(현종 11)]
자는 순원(舜元), 견성군의 6대손으로 평성부정의 현손이고 유번의 손자이며 문병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창원유씨이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2남 1녀를 두었다.
공은 천품이 총혜하고 기질이 온량하며 행의가 두드러져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로써 대하였다. 또 봉제사에 극진히 다하고 종족을 대함이나 향당에 처할 때나 비복을 거느릴 때나 한결같이 성심으로써 힘썼다. 이로써 돈독의 기풍이 집안에 충일하고 어질다는 명성이 세상에 자자했다. 공은 평소에 닦은 학문과 박식으로 1660년(현종 1) 식년 문과 갑과에서 방안(榜眼)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헌납과 사헌부 장령을 지낸 후 해주목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폈다. 그 후 1670년(현종 11) 6월 24일 병에 걸려 별세하였다. 그 때 나이 54세였다. 나라에서 공의 공적을 높이 인정하여 사패지를 가평군 조종면, 현 경기도 가평군 상면에 내려 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연하리 산1의 9 내묵동 능산 선영 묘하 갑좌에 부인 남양홍씨와 합장되었다.
자는 순원(舜元), 견성군의 6대손으로 평성부정의 현손이고 유번의 손자이며 문병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창원유씨이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2남 1녀를 두었다.
공은 천품이 총혜하고 기질이 온량하며 행의가 두드러져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로써 대하였다. 또 봉제사에 극진히 다하고 종족을 대함이나 향당에 처할 때나 비복을 거느릴 때나 한결같이 성심으로써 힘썼다. 이로써 돈독의 기풍이 집안에 충일하고 어질다는 명성이 세상에 자자했다. 공은 평소에 닦은 학문과 박식으로 1660년(현종 1) 식년 문과 갑과에서 방안(榜眼)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헌납과 사헌부 장령을 지낸 후 해주목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폈다. 그 후 1670년(현종 11) 6월 24일 병에 걸려 별세하였다. 그 때 나이 54세였다. 나라에서 공의 공적을 높이 인정하여 사패지를 가평군 조종면, 현 경기도 가평군 상면에 내려 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연하리 산1의 9 내묵동 능산 선영 묘하 갑좌에 부인 남양홍씨와 합장되었다.
양현(揚顯) 1661∼1750 파명:견성군(甄城君)
 양현(揚顯) [1661(현종 2)∼1750(영조 26)]
자는 효백(孝伯), 호는 둔암(遁巖) 또는 쌍청(雙淸). 견성군의 7대손이며 여성군의 5대손이고 성준(聖俊)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권씨이다.
공은 성현의 모범을 하나하나 명기해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고사를 읽다가도 충신의사가 그 죽을 곳에서 죽지 못하는 대목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공은 또 생도들을 위하여 별당을 봉산 동편에 세우고 봉산서재(鳳山書齋)라고 하고 스스로 모범문을 가려서 벽에 써 붙여 백록동의 옛 규범과 같이 하였다. 이곳에서 인재들이 배출되고 문풍이 크게 진작했으나 불행히도 서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당하고 흉년이 들어 마침내 철폐되고 말았다.
공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에 오르고 1742년(영조 18)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1744년(영조 20)에는 영조대왕의 입기로소(入耆老所)의 경사로 가의대부에 올랐다. 1747년(영조 23)에는 왕대비 존숭의 경사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1750년(영조 26) 가을 마침 임금이 온양온천에 행행하였다가 돌아오는 날 공은 관대를 갖추고 수원 세람교가에서 임금의 행차를 공경스럽게 맞고 있었다. 임금이 다리에 이르러 잠시 머물러서 묻기를 “저기 환영나온 자가 누구냐?” 하니 “용인 사는 아무개”라고 답하자 공의 장남 전(澱)을 불러 “네 아비의 나이가 몇이냐?”하므로 “금년에 90이옵고, 신의 근본은 선파(璿派)로서 성종왕자 견성군이옵니다.”하고 답하니 임금이 듣고 그 자리에서 동지중추부사를 특별히 제수하고 수원성주에게 명하여 쌀과 비단을 보내주라고 하였다.
공은 1750년(영조 26) 12월 22일에 별세하니 향년 90세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깊이 애도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백미 10석을 하사하였다. 익년 1751년(영조 27) 3월 5일에 용인 남방 10리,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차동 갑좌지원에 예장하였다.
자는 효백(孝伯), 호는 둔암(遁巖) 또는 쌍청(雙淸). 견성군의 7대손이며 여성군의 5대손이고 성준(聖俊)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권씨이다.
공은 성현의 모범을 하나하나 명기해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고사를 읽다가도 충신의사가 그 죽을 곳에서 죽지 못하는 대목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공은 또 생도들을 위하여 별당을 봉산 동편에 세우고 봉산서재(鳳山書齋)라고 하고 스스로 모범문을 가려서 벽에 써 붙여 백록동의 옛 규범과 같이 하였다. 이곳에서 인재들이 배출되고 문풍이 크게 진작했으나 불행히도 서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당하고 흉년이 들어 마침내 철폐되고 말았다.
공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에 오르고 1742년(영조 18)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1744년(영조 20)에는 영조대왕의 입기로소(入耆老所)의 경사로 가의대부에 올랐다. 1747년(영조 23)에는 왕대비 존숭의 경사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1750년(영조 26) 가을 마침 임금이 온양온천에 행행하였다가 돌아오는 날 공은 관대를 갖추고 수원 세람교가에서 임금의 행차를 공경스럽게 맞고 있었다. 임금이 다리에 이르러 잠시 머물러서 묻기를 “저기 환영나온 자가 누구냐?” 하니 “용인 사는 아무개”라고 답하자 공의 장남 전(澱)을 불러 “네 아비의 나이가 몇이냐?”하므로 “금년에 90이옵고, 신의 근본은 선파(璿派)로서 성종왕자 견성군이옵니다.”하고 답하니 임금이 듣고 그 자리에서 동지중추부사를 특별히 제수하고 수원성주에게 명하여 쌀과 비단을 보내주라고 하였다.
공은 1750년(영조 26) 12월 22일에 별세하니 향년 90세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깊이 애도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백미 10석을 하사하였다. 익년 1751년(영조 27) 3월 5일에 용인 남방 10리,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차동 갑좌지원에 예장하였다.
채원(采元) 1870∼1907 파명:견성군(甄城君)
  채원(采元) [1870(고종 7)∼1907(순종 1)]
자는 광삼(光三), 견성군의 13대손이며 우승(友承)의 아들이다. 배위는 단양우씨와 기계유씨이다.
공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의병대장 박래봉(朴來鳳)이 이끄는 의병대에 입대하여 춘천과 가평 등지에서 활약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던 중 1907년(순종 1) 10월 18일 남양주시 와부면 조안리 마세부락 북한강변에서 일병(日兵)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현지에 달려온 공은 내가 의병활동을 한 것이라고 우겨 아버지를 구출하려다가 부자가 함께 조안리 마세부락 북한강변에서 1907년 10월 18일 왜병에게 사살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상대 건좌이다.
자는 광삼(光三), 견성군의 13대손이며 우승(友承)의 아들이다. 배위는 단양우씨와 기계유씨이다.
공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의병대장 박래봉(朴來鳳)이 이끄는 의병대에 입대하여 춘천과 가평 등지에서 활약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던 중 1907년(순종 1) 10월 18일 남양주시 와부면 조안리 마세부락 북한강변에서 일병(日兵)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현지에 달려온 공은 내가 의병활동을 한 것이라고 우겨 아버지를 구출하려다가 부자가 함께 조안리 마세부락 북한강변에서 1907년 10월 18일 왜병에게 사살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상대 건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