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대군파 약사

완원대군파


원래 이북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나 그 중 일부 종현들이 이남으로 남하하여 서울 · 경기 일원에 터전을 잡고 생활해 왔다. 그러던 중 1969년 종현들이 회동하여 파보를 발간키로 논의하고 1970년 초에 흑석동 소재 한원(漢元 : 19대손)의 자택에서 재헌(載憲 : 18대) 경선(慶善 : 18대) 원용(元容 : 17대) 광연(光演 : 19대)이 중심이 되어 <경자보(庚子譜)> (1900년 발행, 載憲댁 소유)를 기초 자료로 하여 남한 각지에 연락되는 종현의 수단(收單)을 받아 완원대군파계보(完原大君派系譜)인 <경술보(庚戌譜)>를 발간하였고 이를 계기로 각지에 있는 종친간의 친목을 유지하여 오다가 1980년에 정식으로 파종회를 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970년 <경술보>에 누락된 각지 종현들의 수단을 받아 1984년 <갑자보(甲子譜)> 를 발간하였는데 그 후 각지에서 누보된 종현들의 연락이 있어 새 계보를 발간할 예정이다. 파종회 재산은 다음과 같다. 

개령군(開寧君) 지(枝) 묘역 (현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 : 임야 2만2천평, 전답 2천평.동계군(東溪君) 상항(尙恒) 묘역 (현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 임야 1천2백평, 전답 2천평.

완원대군(完原大君) [1331(충혜왕 1)∼1356(공민왕 4)]은 도조대왕과 경순왕후(敬順王后) 문주박씨와의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휘는 자선(子宣), 자는 성수(聖受), 시호는 정효(貞孝)이며 고려조에 벼슬하여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도 삭녕군 마장면 남일원리 간촌에 있으며 배위는 개성왕씨 봉양대군(鳳陽大君) 부(浮)의 딸이며 대군묘에 합장하였다. 태조고황제 등극 후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추증되고, 1872년(고종 9) 대군이 되었다. 제사는 차남인 개령군파에서 올리고 있다.

대군은 개흥군 원(元) · 개령군 지(枝) · 개원군 매(枚) 등 3남을 두었는데, 개흥군은 동양군 춘(春) 1남을 두었고, 개령군은 동선군 상흥(尙興)과 동계군 상항(尙恒)의 두 아들을 두고, 개원군은 동하군 억천(億千) 1남만을 두었다.

대군의 차남인 개령군은 1348년(고려 충목왕 3)에 태어나 1428년(세종 10)에 별세했다. 8세에 부모를 잃어 외가인 개성왕씨 댁에 가서 있던 중 태조고황제 잠저로 데려왔는데 성장한 이 후 태조고황제 휘하에서 장수로서 위화도회군에 참가하였고 태조고황제 등극 후에는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지고 영의정과 영돈녕에 올랐다. 시호는 양안(良安)이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에 있다.

대군의 3남인 개원군은 1419년(세종 1)에 충청도우도 수군도만호(忠淸道右道 水軍都萬戶)를 지냈으며 1872년(고종 9)에 군(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청주한씨이고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 동면 마전동에 있다.

개령군의 장남 동선군은 1422년(세종 4)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1431년(세종 13) 의주목사(義州牧使), 1432년(세종 14) 중추원부사 ·경창부윤(慶昌府尹)을 지내다가, 1433년(세종 15)에 급사하였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영월엄씨이고 동선군 묘소는 실전되었으며 정부인 묘소는 연천군 연천읍 와초리에 있다.

개령군의 차남 동계군은 1441년(세종 23) 12월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1445년(세종 27) 3월에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 事)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며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이며 배위와 합장하였다.




종원 분포 상황

서울 · 경기 일원에 약 150세대, 800명.4세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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