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약사
경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양녕·효령대군과 같이 수학하고 세종대왕의 사부가 되었다.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여 국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필히 자문에 응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정윤이 되고 그 해 10월에 원윤으로 승차하여 종부시 제조가 되었으며, 1417년(태종 17) 9월에 정헌대부 경녕군으로 봉작되었다. 1419년(세종 1) 8월 중국 명나라와의 마찰이 있자 상왕 태종대왕의 정사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국교를 정상화시키는 동시에 파격적인 후대를 받았다. 특히 황제의 친필로 된 어제서(御製序)를 비롯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환국하였는데 상왕 태종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지금의 무악재까지 나와 환영하고 연회를 베푼 일은 매우 유명하다. 이때 공의 나이 24세였다.
공은 그 후에도 세종대왕을 수시로 보필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국방의 대비책과 불교문화의 정화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는 조정을 대표하여 국교를 돈독히 하였다. 이런 공로로 1425년(세종 7) 11월 숭록대부로 승차하고 1430년(세종 12) 정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으로 승계되었다. 세종대왕은 승하할 때 “후일 경녕군 묘소는 왕릉에 못지 않게 예우를 갖추어 드리라.”고 했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 후 문종대왕·단종대왕 때에는 종부시 도제조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1458년(세조 4) 배위인 청풍김씨의 묘소가 있는 충주 숭선 땅으로 낙향하여 그 해 9월 9일 6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撤朝)하고 `제간(齊簡)'으로 시호를 내리고 충북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언곡 계좌에 예장하였다.
1727년(영조 3) 9대손 도정 한겸(漢謙)으로 하여금 별립종손(別立宗孫)으로 봉사할 것을 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으로 추봉하고 승지 이승우를 묘소에 보내어 제악으로 치제(致祭)하였다.
어머니 효빈 김씨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3동 한다리 아차산 남록 자좌이다. 배위인 부부인 청풍김씨는 참의 김관(金灌)의 딸로 1416년(태종 16)에 혼인하여 군부인에 올라 1450년(세종 32) 4월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잔작동 축좌이다. 1872년(고종 9) 청원부부인으로 추봉되었으며, 1994년 충북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군부인 개성부 마씨의 묘소는 부군 묘소 백호등에 설단하였는데 이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화리 모양군 묘역으로 옮겼으며, 군부인 전주최씨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신남리 함봉산 손좌이다. 공은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4남 · 5남 · 6남은 후사가 없다. 장녀는 참봉 정석내(鄭石쨴)에게, 차녀는 현감 송계흥(宋繼興)에게 출가했다.
조선시대 경녕군의 후예로서 문과 급제자는 27인이고, 무과 급제자는 4인이다. 공의 증손 하동군 계출이 4인인데 좌랑(佐郞) 희온(希溫) · 전적(典籍) 희량(希良) · 찬성(贊成) 희득(希得) · 교리(校理) 용호(容鎬)이다. 신당군 계출은 병조판서 희검(希儉) · 이조판서 수광(睟光) · 영의정 성구(聖求) · 이참(吏參) 민구(敏求) · 이참(吏參) 당규(堂揆) · 예조판서 현석(玄錫) · 사검대(舍檢大) 현기(玄紀) · 이조참의 현조(玄祚) · 이참(吏參) 희원(喜元) · 정언(正言) 한종(漢宗) · 좌승지(左承旨) 형하(瀅夏) · 승지(承旨) 유하(游夏) · 헌납(獻納) 유성(游誠) 등 12인이다. 파릉군 계출은 승지(承旨) 유신(惟信)이고, 서원군 계출은 함남절도사(咸南節度使) 용순(用淳) · 도사(都事) 시민(時敏) · 지평(持平) 시우(時雨) · 선전관(宣傳官) 명(銘)이다. 함평도정 계출은 도승지 유인(裕仁) · 대사성(大司成) 홍인(弘仁)이고, 익흥군 계출은 대사헌 형욱(馨郁) · 정언 숙(핈) · 좌승지 서조(瑞朝)이다. 이상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고, 특히 지봉(芝峰) 일가는 3대를 정승으로 활약하고 그 후손들 13명이 대과에 급제하였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는 3대 정승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순국열사로는 일문칠절(一門七節)이 있다. 병자호란 때의 3충신으로 성구(聖求)의 아들 상규(尙揆)와 민구(敏求)의 두 아들 원규(元揆)와 중규(重揆)가 있다. 4열녀로 성구의 처 안동권씨, 상규의 처 능성구씨, 이일상의 처와 한오상의 처는 성구의 두 딸이다. 이들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절함으로써 7절이 되었다. 이때 오성군의 현손 중명(重溟)과 그 둘째 아들 증() 부자도 함께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복성군의 5대손 환(丸)이 중봉(重峰) 조헌(趙憲)과 정읍 사현에서 역전하여 장열히 순사하니 임금은 그곳 이름을 `의분동(義墳洞)'이라 이름하였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정유재란 때에는 은천군의 6대손 시수(始秀)와 시화(始華)가 만정 임세무 김경덕·경탁상 등과 500여 명을 이끌고 호치(胡峙)에서 적과 분전하다가 순국하니 시신도 못찾아 치발장으로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 싸움에서 순국한 애국열사가 92인으로 유림에서는 고창군 흥덕면 남당에 모충사(慕忠祠)를 짓고 위패를 각각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그분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끝으로 곽(廓)은 가림군의 5대손으로 1615년(광해군 7) 무과에 장원하고, 1636년(인조 14) 회답사로 심양(瀋陽)에 갔다. 때마침 국호를 청(淸), 왕을 황제, 연호를 숭덕이라고 하고 들에서 제사지내려는 마당에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위협하였으나 결사항거 불참하고 본국에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승복하고 돌아왔다 하여 선천(宣川)에 귀향보냈다가 곽의 충절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후에 삼도통제사에까지 올라 충성을 다하였다. 이밖에도 종정(宗貞)·섬(暹)·원남(元男)·제송(齊松)·영식(永植)·용준(用濬) 용침(用沈)·시욱(時旭)·굉()·익용(翼龍)·경(璥)·희강(希剛)·형광(絅光)·사의(士義)·동규(同揆)·석규(碩揆)·하(廈)·홍적(弘勣)·종(悰) 경욱(慶郁)·광욱(光郁) 등은 경녕군의 후예로서 나라를 위해 일한 인물이다.
종원 분포 상황
파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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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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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수
|
은천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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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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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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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군파
|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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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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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군파
|
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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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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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군파
|
3299
|
1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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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군파
|
1054
|
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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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도정파
|
2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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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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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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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3
|
57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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