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군파 약사

화의군


1425년(세종 7) 세종대왕의 1남으로 태어나 1460년(세조 6)에 별세하였다. 휘는 영(瓔)이고 자는 양지(良之)이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어머니는 영빈 진주강씨이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에 책봉되고 1436년(세종 18) 군부인 밀양박씨 중손(仲孫)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같은 해 4월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5, 6세에 벌써 용감하고 민첩함이 뛰어나고 또 글을 잘하였다. 자라면서 부모를 섬기고 임금께 진충하려는 뜻이 깊어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충과 효가 가장 중요하니, 충하면 나라가 보전되고 효하면 능히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며 항상 왕자 대군 형제들과 대화로 우애와 화목에 힘쓰니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세종대왕도 화의군의 재능과 뛰어난 성품을 보고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협력하게 하였다.

1455년 단종대왕이 왕위를 양위한 후에 사육신 등의 왕위복위 거사가 일어났을 때 세조대왕이 화의군에게 묻기를 “성삼문을 파직 처리함이 옳지 않으냐.”는 물음에 화의군은 묵묵부답함으로써 익산군 금산(錦山)에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었다. 그리고 1457년(세조 2) 금성대군의 거사가 발각되자 `한번 죽으리라'는 결심을 마음속에 굳게 정하고 정인지 등의 헐뜯는 상소로 말미암아 모자가 함께 1460년(세조 6)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한편, 화의군의 맏아들 여흥군(驪興君) 원(轅)은 화의군이 적소에 유배되어 있을 때 먼저 별세하여 기산(箕山)의 북쪽 언덕에 모셨고, 남은 가솔은 차남 여성군(驪城君) 번(?) 나이 7세였고 막내 금란수(金蘭守) 식(軾)도 나이 겨우 3세였으며 손자 재양군(載陽君) 급(級) · 대곡부령(大谷副令) 신(紳) · 회인부령(懷仁副令) 수(綬)도 나이가 어렸기에 빈묘(嬪墓 : 화의군 생모)의 봉분도 만들지 못하였다. 또한 남은 가솔이 7명이라 해도 5명이 7세 미만이고 밀양박씨(화의군 부인)와 금산이씨(여흥군 부인)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장(藁葬)의 명을 세조에게 받은 후 익산감에게 기왕에 죽을 몸이므로 유훈(遺訓) 하기를 “나는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만 못하지만 백이숙제의 마음이 있으니 서산(西山)에 나를 장사지내 주시오”라고 하였다.

1534년(중종 29) 대신들의 상언으로 유배당한 지 74년만에 복관되었다. 그 후 1552년(명종 7) 자손에게 승습녹예(承襲祿裔)하고 유훈에 따라 금산 적소에서 진관(津寬)으로 이장을 윤허하여 1569년(선조 2) 묘에 비를 세우고, 1698년(숙종 24) 역명지전(易名之典 : 왕에게 시호를 받는 특전)을 받았다.

1719년(숙종 45) 임금의 헌릉 행차 시 “예장과 시호의 은전을 내려 주시옵소서.”하고 후손 여익(汝益)이 상언하기도 했다.

1734년(영조 10) 이조판서 김재로(金在魯)의 상계와 후손 전 현감 여익의 진언에 따르면 “그 선대조 화의군이 단종대왕 때의 일로 연좌되어 한남군(漢南君)과 함께 벌을 받았으나 중종 때에 두 분이 다 복관, 녹예의 은전을 입었고 그 후 숙종 때에 한남군은 그 자손들의 진언으로 예장과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화의군은 아직도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한남군의 예대로 은사를 입도록 앙청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복관한 사실이 중종 때에 있었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바르게 고치지 않고 폄사(貶死 : 관직을 깎아 유배지에서 죽게 함)로 기록되어 있는가? 만약에 복관이 사실이라면 시호를 내리는 일은 응당히 베풀어야 하는 은전이다.” 임금은 종부시(宗簿寺)에 명하여 “화의군의 일을 문적에 따라 자세히 상고하여 알리고 후에 이조판서 김재로에게 품의·처리함이 옳도다.”하였다.

별로 문적을 상고할 만한 것이 없고 화의군 자손 등이 제출한 화의군의 아들 금란수의 비명(碑銘) 인본(印本)에, 중종 때에 복관 녹예의 단어가 있고 그 상소문을 쓴 사람이 곧 중종 때의 명신 참판 이희보(李希輔)라, 복관 사실이 명백하므로 죄를 입은 것은 단종대왕을 위한 것이요 우국충절의 거사는 육신과 다를 바가 없고 이미 복관되었으니 시호를 내리고 예장을 허가함이 마땅하다 하여 1735년(영조 11) 임금이 윤허하였다.

1735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충경시장(忠景謚狀)을 작성, 봉상시(奉常寺)에 전달하자 동년 예장을 청한 대로 공사를 시작하다 공사 도중 리여적(李汝迪)의 사망으로 공사를 중지하였다가 아들 희원(禧遠)이 10월에 다시 시작해서 완공을 하였다.

1747년(영조 23) 율동(栗洞)에서 충경(忠景)이란 시호를 배명하였다. 1761년(영조 37)부터죽계서원(竹溪書院)에 화의군 위패를 모시고 매년 3월과 9월 말정일(末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충신단과 동학사 숙모전에 배사(拜賜)하고 매년 향사하고 있다.

화의군을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도록 어제문을 하사하였다. 1810년(순조 10) 홍살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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