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군파 약사

영풍군


세종대왕의 8남으로 1434년(세종 16) 8월에 문혜대빈(文惠大嬪) 청주양씨(淸州楊氏)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1441년(세종 23) 7월에 세손(후의 단종)이 태어났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승하하니 혜빈 양씨가 유모가 되어 양육하였다.

1452년(문종 2)에 단종대왕이 왕위에 오를 때 단종은 보령 12세였는데 재위 3년, 상왕위 2년만에 참화가 발생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후에 성삼문 · 박팽년 등의 사육신이 몰래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였는데 영풍군이 참여하였다가 모의가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사육신과 공의 모자가 동시에 화를 입어 함께 순충사절(殉忠死節)하였다. 1456년이었으며 공의 나이 23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없어졌고 사위(祠位)는 수진궁(壽進宮)에 있었으나 자손이 잔약하여 향사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때에 신원되어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고 1791년(정조 15) 2월에 `정렬(貞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현록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는 품계가 내려졌다.

배위는 군부인 순천박씨로 이조판서 박팽년의 딸이다. 1녀를 낳아 만호(萬戶) 이양손(李陽孫)에게 혼인시켰으나 공을 따라 함께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동면에 있다 하나 미상이다. 계자에 양녕대군 손자 취성군(鷲城君) 빈(頻) · 계림군(鷄林君) 탄(坦) · 하계군(河溪君) 진(캹)이 있는데 이들은 아들 · 손자 · 증손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나머지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다. 전해져 오던 문헌들은 여러 번의 병란을 겪으며 모두 소실되었고 남은 것은 단종 때의 기록 몇 가지 뿐이라, 공의 모자가 함께 희생되었던 충절은 알려지지 않았다. 공의 15대손 근식(根植)이 더 오래 지나면 모든 것이 민몰될까 두려워 그 아들 영진(榮珍)에게 명하여 [장덕문(狀德文)]을 종인(鍾仁)에게 보이게 하니, “돌이켜보면 부박하고 천박한 필치로 어찌 감히 감당하리오. 굳이 사양하다가 피하지 못하고 이제 공의 덕을 발휘코자 한 즉 세대가 침원(浸遠)한지라 공의 풍렬(風烈)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그 대개를 들어 장의(狀儀)를 조성하여 후세에 남기노라.”고 하였다.

그 후 중종대왕은 특명으로 “양녕대군의 증손 계림군의 차남인 하계군으로 봉사하라.” 하였다. 1872년(고종 9)에는 공의 적중증손(嫡衆曾孫)에게 봉작 · 봉군(奉君)하여 승전(承傳)케 하였다.

고종태황제 갑자보(甲子譜)에 특명으로 계양군파(桂陽君派) 10대손 정화(正華)로 하여금 봉사케 하였으나 그 후 후손이 잠적, 궐사하므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이성산(尼城山)하에 모신 영풍군의 후손이 봉사하고 있다.

배위는 군부인 순천박씨로 묘역은 충북 충주시에 있다 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던 중, <이화보>를 통하여 충북 중원군 기준(基俊) 분원장의 희첩(喜牒)을 통하여 묘소를 발견하였다. 누차에 걸쳐 왕래하다가 1991년 3월에 비 · 지석 · 망주석 · 장군석 일체를 전남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이성산하에 모시고 또한 설단하였다.

또한 영풍군 이하 15대손의 묘를 한 묘역 안에 모셔 재각을 건립하였다. 그 재각의 명칭을 영모재(永慕齋)라 하고 종합묘비를 건립하여 봉향하고 있다.

영풍군의 2세는 취성군 빈이요,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성주이씨이다. 3세는 계림군 탄이며 배위는 현부인 교하노씨이며, 4세는 하계군 진으로 배위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이다.

5세는 덕령(德齡)이요, 배위는 증 숙부인(叔夫人) 파평윤씨이다. 6세는 장길(長吉)이요, 호는 어은(漁隱)인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행(行)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지냈고 광해군 때에 해불(解쯮)로 남하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하동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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