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약사

영해군


세종대왕의 9남이며 어머니는 신빈(愼嬪) 청주김씨(淸州金氏)이다. 어렸을 때부터 너그러웠고, 자라면서는 덕의와 절의가 있어 스승과 공부할 때는 화려함을 기뻐하지 않았다.

후손들에게 관인대도(寬仁大道)와 검소질박(儉素質朴)의 본을 보여 주었다.

영해군은 평산신씨를 부인으로 맞아 영춘군(永春君) · 길안도정(吉安都正) 2남과 딸 하나를 두었다. 43세에 별세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안도(安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서울 도봉산 무수동에 있고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소덕사(昭德祠)에는 영해군의 위패를 모셨다. 소덕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5월 5일 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사당명은 공의 관계(官階)가 소덕대부(昭德大夫)이기 때문에 소덕사라고 일컫게 되었다.

장남 영춘군은 부친의 인덕을 바탕으로 효행이 지극해 왕실의 은총을 받았다. 영춘군의 차남 강녕군은 알뜰하게 가꿔진 꽃밭과 정결한 집을 가졌었는데 연산군의 내폐(內嬖)가 이 집을 탐내어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강녕군은 불응하자 내폐의 고자질로 연산군은 크게 노해 주인과 가노를 붙잡아 가두고 문초했다. 이런 연유로 강녕군 부자와 여러 형제는 남해 섬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두어 달 뒤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고, 중종대왕은 특별히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공훈록과 비문에 그 사적을 표기케 하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도 기록토록 지시했다.

영춘군은 완천군(完川君) · 강녕군(江寧君) · 순성부정(蓴城副正) · 덕녕부정(德寧副正)의 4남과 딸 둘을 두었다. 품계는 승헌대부이고 시호는 화목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목성(穆成)'이다.

영해군의 산소 국내(局內) 오른쪽 묏부리 기슭엔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쓴 신도비(서울특별시 문화재 제106호)가 서 있다.

차남 길안도정은 시산군(詩山君) · 청화수(淸化守) · 송계군(松溪君) · 은계군(銀溪君) · 벽계도정(碧溪都正) · 옥계군(玉溪君) 등 6남을 두었으나 옥계군은 외아들 운천군(雲川君)을 둔 뒤 후사가 없었다.

영해군의 장손 완천군의 동생인 강녕군과 종형제간 되는 시산군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도학(道學)으로써 의리를 맺어 친히 사귀었다.

송나라 때 정자(程子) · 주자(朱子)가 왕에게 올렸던 글을 간행하여 중종대왕에게 봉사하였으며, 또 숭선정(嵩善正) · 장성수(長城守) 등과 연명으로 상소해 억울하게 수감된 문신 박상(朴祥) · 김정(金淨)을 석방시켰다. 그리고 문란한 여악(女樂)을 고쳐 주도록 극간도 했다.

시산군은 기묘사화로 두번째 수난을 겪으면서 신사무옥(辛巳誣獄)사건에 휘말려 살신성인하였다.

이렇게 영해군으로부터 3대손까지 큰 피해로 말미암아 생졸연대를 알 수 없고 묘소까지 실전되었다.

영해군파 문중에서 학문에 전념한 선조는 37명이다. 시산군파의 4대손인 경여(景輿)는 시산군과 강녕군의 학통을 이어받아 조광조의 후학인 활계(活溪) 이대병(李大?)과 친히 사귀어 도학에 전념하였다.

7대손인 도(燾)도 대곡(大谷) 최상문(崔象文)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부사(府使) 이구징(李耉徵)의 추천으로 임금의 하명을 받아 <여지승람>을 수찬하여 올렸다. 또 선조의 행적이 실린 <용성지(龍城誌)> 3권을 남기는 등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지파로는 영춘군파와 길안도정파로 나뉘고 분파로는 9개파가 있다.

직계 종손의 세계(世系)는 1994년 현재 19대손 민구(敏九)까지 이르렀고 방계 중 가장 빠른 후손으로 덕녕부정파의 23대손 한진(漢鎭)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영해군파의 문관직으로 총 107명 중 정3품 이상이 29명, 무관직은 68명 중 정3품 이상이 21명이 된다.

특히 4대 종손인 덕일(德一)은 학덕이 뛰어난 숨은 선비로 인정받아 과거시험 없이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발탁되어 공적을 쌓은 뒤 예조판서까지 이르렀다.

벼슬길에서 과거출신만도 26명인데 영해군파에서는 4대째 또는 3형제 모두 내리 등과하였다. 그 선조는 8대손 정린(廷麟), 9대손 언경(彦經), 10대손 춘제(春濟), 11대손 창유(昌儒), 창급(昌伋), 창임(昌任)이고 친형제와 부자가 등과한 선조는 11대손 창의(昌誼), 창수(昌壽), 12대손 병정(秉鼎) 등이다.

효행한 선조는 32명인데 손가락을 베어 아버지에게 수혈해 드려 시호를 받은 선조는 영해군파 9대손 언강(彦綱)이다. 언강은 증강문과 을과 1등으로 과거급제 후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한성판윤을 11회(543회, 549대, 553대, 556대, 562대, 598대, 600대, 607대, 614대, 625대, 632대) 역임하였다. 손자는 좌의정 창의(昌誼), 이조판서 창수(昌壽), 증손자 이조판서 병정(秉鼎)이다.

열행(烈行)으로 정려(旌閭)를 표창받은 선조에는 시산군파의 5대손 부인 합천이씨, 영해군파의 9대손 부인 안동권씨, 11대손 부인 파평윤씨, 시산군파의 12대손 부인 성산이씨 등이 있다.

3 · 1운동으로 희생된 선조는 시산군파 15대손 석기(奭器) · 형기(炯器) · 용기(龍器) · 성기(成器), 16대손 명수(明壽) · 광수(光壽) · 범수(範壽) 등 7명이다.

형우제공(兄友弟恭)으로는 시산군파 14대손교항(敎恒) · 교상(敎爽) 형제로 아침저녁 떨어지지 않고 50년간 동고동락한 일은 초등 교과서에 나오는 실화 `의좋은 형제' 이야기나 다름없다.

6 · 25전쟁 때 18대손 용철(容澈) · 동철(東澈), 21대손 길녕(佶寧)은 순국하여 나라에 충성해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영해군파 13대손 조묵(祖默)은 이조판서 창수의 손자이고 이조판서 병정의 아들이며, 시서화 삼절 (三絶)로 이름났다. 현대에 와서 박사 출신은 17명, 사법고시 출신은 2명이다.

영해군파 12대 손녀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는 이조판서 이창수의 딸로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실학자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순수 우리말 한글로 된 규합총서라는 백과사전을 저술하였다.

영해군파 11대손 문헌공(文獻公) 창수(昌壽)는 알성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하고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24회 순환 역임하였고 입조 40여년동안 문무를 섭렵하는 50여가지 직책을 역임하였다.

영해군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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