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군파 약사

안양군(安陽君)


1480년(성종 11) 음력 2월 19일 성종대왕의 3남으로 태어나서 1504년(연산군 10)에 별세하였다.

휘는 항(쐪), 자는 성의(聖儀),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공회(恭懷).

어머니는 귀인 초계정씨이다. 초계정씨는 봉안군(鳳安君) · 정혜옹주(靜惠翁主) 등 3남매를 두었는데 안양군은 이 중 장남이다.

배위는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능성구씨로 정국공신(靖國功臣) 판서 능천군 수영(壽永)의 딸인데 1480년(성종 11)에 태어나 1556년(명종 11)에 별세하였다.

공의 성품은 온량 · 강직하였으며 성인(聖人)의 교훈을 본받아 실천하였다.

부왕인 성종대왕이 병환이 나면 크게 근심하여 의원에게 약재에 정성을 다하도록 분부하며 부왕 곁을 떠나지 않는 등 효행을 다하였다. 환후가 회복되면 평상시와 같이 경연에서 경서의 뜻을 연마하고 <사기>를 두루 읽었다.

공은 부왕의 환후가 마침내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예감하고 밤낮없이 눈물로 천지신령에게 기원하기를, 자신의 신명과 바꾸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성종대왕은 겨우 베개에 의지하여 좌우의 시종을 물리치고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세상에 피할 수 없는 것은 인명이로다. 병이 이미 점점 더하니 오직 바라는 바는 너희들 15형제가 우애와 효도하는 것 뿐이다. 연산군이 적장자로 가장 연장자이니 왕통을 계승하는 것이 왕실의 법도이므로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대통을 이을 것이니 너희들은 진력하여 보좌할 것이며, 만약 법도에 어긋나고 정치가 문란하거든 지극히 간하며 정광필(鄭光弼 : 1462∼1538)과 상의함이 옳을 것이며, 열성조 존령(尊靈)께서 도와주시리라.”고 하였다. 공은 머리를 조아리고 유명(遺命)을 받았으니 실로 왕실의 중추지신이었다.

성종대왕은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창경궁 대조전에서 춘추 38세로 승하하였다. 공은 졸지에 천붕지통(天崩地痛)을 당하여 그 애절함이 비할 바 없었다.

국장예제에 의하여 광주군 서학당리(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에 국장을 마쳤는데, 애통망국한 심정으로 회산군과 함께 내시 5, 6인을 거느리고, 능침을 모실 때 효성이 극진함에 세인들은 효공자라고 찬양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궁정에서 길들인 사슴을 쏘아 죽였다. 공은 이 일을 알고 대궐에 들어가 말하되,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면 그 자손들도 사랑하여야 될 것이어늘 선왕께서 가장 사랑하던 동물을 무슨 까닭에 쏘아 죽였으며 아직도 선왕께서 빈소에 계시거늘 어찌 차마 살생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사냥을 일삼았다.

막중한 종묘사직의 안위가 염려되어 누차 극간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봉안군 · 회산군 두 아우와 상의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차마 목숨이 아까워 부왕의 하교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며 함께 연산군 앞에 나가 울면서 간하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나아가신 이래 실덕하신 소문이 드러나, 나라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선왕대의 중신들을 물리치니, 조정이 텅비고 백성들의 불평불만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서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안으로 음란하고 밖으로 사냥만 일삼으며 정사에 태만하면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고 하니 왕자가 삼가야 할 귀감입니다. 옛날에도 초장왕이 연락(宴樂)을 끊고 한무제가 분수(汾水)에서 뉘우침이 있었으니, 전하는 신들의 간언을 들으시어 회개하시고 옛날에 태갑(太甲 : 夏나라의 어진 임금)과 같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충언을 듣지않고 공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그 후 충언은 끊어지고 왕실에는 임사홍(任士洪 : ?∼1506)의 무리들이 현량한 조신(朝臣)을 비방하며 임금에게 무고하기를 “생모 윤씨가 쫓겨난 것이 오로지 엄(嚴) · 정(鄭) 두 귀인(貴人)의 성품이 편협한 데다가 선왕의 은총이 지나쳐 서로 시기함이 쌓여 한을 품게 하셨다.” 고 하였다. 연산군은 시각을 다투어 두 귀인을 전정(殿庭)에서 사사코자 하자 선비(先妃)가 듣고 대경하여 급히 머리의 비녀를 빼고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 소리 높여 울면서 간하기를, “엄 · 정 두 마마는 성품과 언행이 정숙하고 엄숙하므로 선왕께서 가장 중히 여기셨거늘, 이제 전하는 누구의 참소를 들으시고 차마 못할 일을 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변고입니다. 설령 두 분 마마가 사소한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내전에 물으시고 후일에라도 원망이 없도록 하심이 옳은 도리이거늘 잔인하심이 어찌 이와 같으시며 또 시숙 안양군은 종실의 지주로서 선왕의 고명이 계시었거늘 어찌 차마 모자간의 윤리와 형제간의 정의를 생각치 않으십니까. 신첩 또한 죽을 곳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이같은 충간도 연산군은 듣지 않고 1504년(연산군 10) 음력 6월 21일 두 귀인을 죽이고 공도 적소(謫所)에서 동시에 원사(寃死)를 당하였다. 그 후 1506년 중종대왕은 나라를 바로잡고 공에게 작위를 복귀시켜 `공회(恭懷)'라는 시호를 내렸다.

당시 상주가 너무 어림으로 외구(外舅) 구공(具公)이 운장하여 구씨 선산인 경기도 양주군 진관면 군장리 묘좌에 면천군부인 능성구씨와 쌍폄하여 예장하였다. 1864년(고종 2) 고종태황제 능지로 예정되었으므로 당시 시흥군 남면 광정리, 지금의 군포시 산본동 수리산하 건좌에 합장 면례하였다. 1990년 4월 3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22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양군이 제주도 적소에서 향년 25세로 참화를 당하였을 때 서울에 있던 공주주씨가 유자인 당시 8세 된 종남도정(從南都正) 억수(億壽)와 함께 지금의 군포시 산본동 수리산하 광정동에 숨어 살아 이곳을 고향과 선영으로 정하게 되었다.

490여 년이 지난 오늘에는 안양군 묘소만 현지에 남아있고 나머지 전체 선영은 1993년 2월 국가 개발정책에 의하여 부득이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상기리 산74번지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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