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천군파 약사

운천군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룩한 성종대왕의 14남으로서 휘는 인(썎), 시호는 소회(昭懷)이다. 운천군은 숙의(淑儀) 홍씨(洪氏) 소생의 7왕자 완원군(完原君) · 회산군(檜山君) · 견성군(甄城君) · 익양군(益陽君) · 경명군(景明君) · 운천군(雲川君) · 양원군(楊原君)과 3옹주 혜숙(惠淑) · 정순(靜順) · 정숙(靜淑) 중의 6남이다.

운천군은 1490년(성종 21) 11월 임인일에 태어나 1524년(중종 19) 5월 14일, 향년 35세로 별세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성종대왕은 빈천(賓天)의 호를 내리고 그 뛰어남이 남달라 9세에 운천군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난폭한 통치와 왕자들에 대한 박해로 날마다 근심걱정으로 세월을 보내다 중종반정으로 시름을 거두고 종사에 크게 공헌해 갈 즈음 장년의 한창 나이에 별세했다. 중종대왕도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천군은 형조참의 증 좌찬성 인손(仁孫)의 딸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4녀만을 두었다. 사위는 사헌부 감찰 이구(李嶇), 신천군수 이종효(李宗孝), 종묘서령 박순년(朴舜年), 선감주부(繕監主簿) 이경종(李慶宗) 등이고 후사가 없어 형인 완원군의 아들 수례(壽禮 : 후에 伊川君으로 봉함)를 계자(繼子)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의 운천군 후손은 혈통적인 측면에서는 완원군의 후손이기도 하다.

운천군의 계자인 가덕대부 이천군(伊川君)은 남달리 뛰어난 인품과 극진한 효심을 지녔다. 아버지 완원군과 어머니 허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1508년(중종 3) 12월 계유일에 태어나 1568년(선조 1) 6월 임진일에 별세하여 향년 61세이다.

특히 이천군은 종친의 어려운 일에 헌신적이었다. 중종 · 인종의 국상 집례자로 크게 공헌을 했다는 기록만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천군은 선릉참봉 황정복(黃廷福)의 딸(후일 韓山郡夫人으로 봉해짐)과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의령부정(義寧副正) 전(傳), 의흥부수(義興副守) 급(伋), 의양군(義陽君) 수(脩), 의신군(義信君) 비(備) 등 4남은 모두 출중한 인걸로서 국사와 종묘사직에 봉헌하였으며 그 손자 손녀들이 번창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천(伊川) 종실의 어질고 귀한 바가 끊임이 없으니 마장리(이천군 묘가 있는 곳) 현당(玄堂)의 음덕이 백세토록 넘치고 있는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천군의 장남인 의령부정은 1534년(중종 29) 8월 28일 태어나 신인(愼人) 진주강씨와의 사이에 7남을 두었으며 1595년 2월 4일에 61세를 누리고 별세하였다.

의령부정의 장남 청산부수(菁山副守) 서(瑞)는 1549년(명종 4) 10월 2일 태어나 숙인(淑人) 파평윤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1587년(선조 20) 2월 20일 38세의 수를 누리고 별세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가계(家系)의 번성을 누렸던 종가가 간난(艱亂)의 가시밭길과 몰락의 풍진에 휘말리는 불운을 맞게 된다. 그것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왕자와 비빈은 강화로 피난을 하였으나 인조대왕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호병(胡兵)의 포위속에 들게 되니 백성들의 병화(兵禍)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 중에서도 종가인 청산부수의 아들 시형(時亨)댁은 그 처참함이 더욱 비길 데 없었다. 마침 그 때 시형은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신부인 청송심씨와 5대손 훈련판관 원정(元禎)과 숙부인 거창신씨는 호병들의 난동과 노략질에 굴하지 않고 칼에 엎드려 자결하였으며, 6대손 충의위(忠義衛) 몽석(夢錫)과 어린 누이 동생은 나이가 겨우 8세 · 6세였음에도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 갔다. 다행히 연로한 노비 한 사람이 마니산(摩尼山)에 숨어 있다가 호군들이 철수한 후 세 분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운천군의 현손 시형은 병란 중에 북방 임지에서 귀가하였으나 가족도 집도 다 잃어버린 처참한 나그네에 불과하였다. 이런 사정을 전해 들은 인조대왕은 이를 애석히 여기고 토지와 은 백냥과 집을 하사하고 또한 심양으로 잡혀간 몽석 남매도 돌아오게 하였다. 시형은 이 망극한 천은(天恩)에 만의 하나라도 보답하고자 다시 스스로 압록강 수비를 위해 임지를 향해 떠났으나 도착하자마자 병을 얻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639년(인조 17) 3월 29일에 별세하였다.

아버지마저 잃게 된 몽석 남매는 의탁할 곳이 없어 연로한 노비가 보살폈으나 왕자의 세손답게 의젓하게 장성하여서 신부인 청송심씨, 훈련판관 원정, 숙부인 거창신씨를 강화로 모셨으며, 시형의 묘소도 압록강으로부터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운천군 묘 아래에 옮겨 모셨다.

이 후 종가는 원주 지방 금마촌(金馬村) 유동(柳洞)에서 살다가 다시 노성(魯城 : 현재 平昌)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 종가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노성사림(魯城士林)에서 이 슬프고 절의있는 사연을 숙종대왕에게 상소한 바, 숙종대왕은 즉시 세 분을 추앙하는 정문(旌門)을 세우고 조묘(?廟 : 조상의 묘를 멀리 옮겼다는 의미)를 짓도록 강원도백에게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3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퇴락한데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의 운천군 묘와 떨어져 있어서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제 후손들이 뜻을 합쳐 마장리로 옮겨 별묘로 모시고 단장을 새로 하였다.

현재 종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으나 종친회를 중심으로 일심협력하여 해마다 제를 지내는 등 조상을 받들며, 운천군 자손으로서의 긍지를 안고 멸사봉공 가화번창에 매진하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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