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군파 약사

인흥군 영(瑛 : 1604∼1651)


선조대왕의 12남으로 어머니는 정빈(靜嬪) 민씨(閔氏)이다. 인흥군은 48년을 사는 동안 충효를 다하여 부모를 모시고 나라를 위했다. 멀리 연경까지 사은사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고, 종부시 · 종친부 · 사옹원 제조도 맡아 종사와 국사에 공헌했다.

인흥군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낭선군 우(1637∼1693)이다. 낭선군은 7, 8세 때 이미 한묵(翰墨)에 뜻을 두어 각체(各體)에서의 명필이 되었으며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 차남 낭원군 간(? : 1640∼1699)도 전서와 예서를 잘 써 오늘날까지 여러 곳에 필적을 남기고 있다. 시조 일곱 수도 남아 있으며 <열성어제(列聖御製)>의 편찬자이기도 하다.

낭선군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적자가 없어 조카 전평군 곽(?)을 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전평군도 아들이 없어 밀양군 완(梡)을 계자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후손이 퍼져나가 손자 원(遠), 원의 아들 서구(書九)가 태어나 인흥군파를 빛내게 되었다. 한편 낭원군은 9남을 두었는데, 장남이 형님 댁으로 양자 가고 막내 청녕수가 후사가 없었지만 나머지 아들들의 후손이 번창하고 있다.

인흥군파는 문과 급제자 6명, 사마시 급제자 18명, 무과 급제자 17명, 문집을 남긴 분이 6명으로 비교적 작은 파종이면서도 출세한 현조가 많다. 특히 강산공(薑山公) 서구(書九)는 우상(右相)으로 정조대왕의 개혁정책 실현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으며 순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공은 후기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정조 때 규장각 4대 검서(檢書)에 들었고 또 예언자로도 유명하여 공에 얽힌 일화도 많다. 오늘날 후손들은 5백여 세대 2천명을 밑돌지만 사회 각층에서 맡은 바 직책에 최선을 다하여 공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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