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군파 약사
낙선군은
이름 숙(潚). 시호 정헌(靖憲). 인조의 여섯째 아들.
어머니는 귀인(貴人) 조씨(趙氏). 형 숭선군(崇善君) 징()과 누이동생 효명옹주(孝明翁主)와는 동복형제이며, 인조의 막내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낙선군에 봉해지고, 1649년 둘째 형 효종이 즉위하자 동복형제와 함께 노비 150구를 하사받았다.
1651년(효종 2)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와 관련하여 생모 귀인 조씨가 사사(賜死)되고 그와 숭선군, 김자점의 손자며느리인 누이동생 효명옹주는 유배되고 관작이 삭탈되었다. 1656년 석방, 1659년 관작이 회복되었다. 1673년(현종 14) 행중추부판사(行中樞府判事)가 되었다. 현명하고 행실이 좋아 숙종 때는 더욱 우대받았다. 1772년(영조 48) 그의 사우(祠宇)를 수진궁(壽進宮)에 두었다.
1641(인조19)∼1695(숙종21). 조선 중기의 종실. 휘는 숙(潚). 자는 자숙(子淑). 인조와 귀인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 형인 숭선군 징 과 누이 효명옹주와 동복형제. 인조 26년(1648) 낙선군에 봉하여졌다.
효종이 즉위하고 인조 말년에 세력을 떨치던 김자점이 유배되자, 낙선군이나 그의 형을 왕으로 추대하여 재기를 노리던 공서파들의 모의가 발각되어 벼슬과 녹을 삭탈당하였다.
1651년(효종2) 이 사건에 관련된 그의 어머니는 사사되고, 김자점도 정형(正刑)되었다. 이듬해 해도에(섬) 귀양갔다가,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되었다.대간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의논으로 1656년 여름에 풀려나 서울에 돌아왔으며, 1659년 정월에 작록을 회복받았다.
1673년(현종 14) 행판중추가 되었으나, 다른 종친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궁중 출입에 있어서는 대간들의 논척을 받기도했다. 어릴때부터 당파싸움에 휩쓸렸으나 현명하고 행실이 좋아 숙종대에는 우대받았으며, 1772년(영조48) 그의 사우(祠宇)를 수진궁(壽進宮)에 두었다.
청산면 궁평리 궁평초등학교 남쪽 잦나무 숲속에 호젖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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