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파 약사

의왕(義王) [1877(고종 14)∼1964]


휘는 강(堈), 호는 오산(吾山), 고종태황제의 2남이며 독립운동가였고 종약원의 초대 총재를 지냈다. 의왕(義王)은 1877년 3월 30일 북부 순화방 사재감(北部 順化方 司宰監) 상패게 자하동에 있는 범숙의(쮭淑儀:철종의 후궁이며 금릉위 박영효와 혼인한 영혜옹주의 생모)의 궁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귀인(貴人) 덕수장씨(德水張氏)이다.

명성태황후는 자신의 궁녀인 장상궁이 고종태황제의 애기를 낳은 것을 알고, 궁밖으로 내 쫓았고 이후 10여 년 후에 귀인 장씨가 별세하자 의왕은 외삼촌으로부터 학문과 서예를 배우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명성태황후는 왕세자(순종) 다음에 낳은 대군(大君)들이 모두 유아(幼兒)시절에 죽고, 왕세자 역시 몸이 허약해 후사(後嗣)가 걱정되자 당시 15세가 된 의왕을 궁궐로 데려다가 관례(冠禮)를 시키고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했다.

그리고 17세 되던 1893년 10월 29일, 당시 14세였던 김사준(金思濬)의 딸인 연안김씨(延安金氏)와 길례(吉禮)를 올렸다. 그러나 혼인한 지 1년도 채 못된 1894년 9월, 18세 나이에 보빙대사(報聘大使)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1895년 명성태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弑害)당한 같은 달 25일, 특파대사의 자격으로 영국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그로부터 4년뒤인 1899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 후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에서 모집한 이민에 합류,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03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그의 권고로 학업을 단념하고 안창호 · 정재관(鄭在寬) 등 동지들과 함께 1904년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 1905년 11월 그 기관지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07년 초에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여 먼저 안창호를 귀국시키고 뒤이어 귀국하여서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서울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몇달 뒤에 바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서 정재관과 함께 신민회 블라디보스톡지회를 설립하였다.

1909년 2월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에서 종래의 공립협회를 확대, 개편하여 재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조직되자 이에 보조를 맞추어 정재관과 함께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하여 편집 · 논설기자로 활동하고,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제호를 고친 뒤에 그 편집책임을 맡았다. 1909년 10월 이토(伊藤博文)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였으며,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포살을 특공대로 자원하여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의 의거가 성공한 뒤에는 안중근을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하여 북경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되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서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9월 러시아령에서 파견한 강우규(姜宇奎)의 일본총독 사이토(齋藤)에 대한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의 파견경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50일간 투옥당한 뒤 석방되었다. 1919년말 석방되자 바로 상해로 탈출하여 안창호를 만나서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議政院) 의원 · 부의장 · 의장을 역임하였다. 안창호가 중심이 된 흥사단운동에도 참가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양츠강일대에까지 뻗치게 되었으므로 상해를 떠나 남중국으로 가서 샤먼(廈門)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어 징역 3년 형의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출옥하자 다시 탈출하여 중국 푸젠성(福建省)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1945년 8 · 15광복을 맞았다.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대만에 있는 한국동포들에 대한 선무단(宣撫團)의 단장이 되어 대만에 갔다가 1946년 귀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의왕은 미국에 있을 때인 1900년 8월 17일에 의왕으로 진봉되었다.

의왕비는 연안김씨(延安金氏 : 1880∼1964)로 자녀가 없으며 수관당 정씨에게서 1남인 건(鍵)義王妃 延安金氏(1880∼1964)無子女을 비롯하여 13남 9녀를 두었다.

1964년에 승하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7-1 서삼릉 내 어머니 장귀인(張貴人)의 묘옆에, 6 · 25전쟁이 끝난 혼란시기 였기에 가매장 형태로 모셔졌고, 나중에 별세한 의왕비는 홍유릉 부속림에 홀로 묻히였다. 1973년 의민황태자비는 의왕 묘소 이장 허가를 정부에 요청, 당시 문화재 관리국에서 장례비 일체와 이장허가를 받았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장을 못하고 있던 중 미국에서 생활해 온 의왕의 5녀인 해경여사가 형제들과 함께 종약원의 협조로 1996년 11월 29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속림에 의왕비와 합장하였다.

<참고문헌>나의 아버지 義親王(이해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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