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그러자 공양왕이 전문을 보고 태종(芳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중(侍中)의 전문을 보니 진술한 것이 모두가 나의 생각 밖에서 나왔다. 내가 무능한 사람인데도 외람되이 왕위에 있는 것은 오직 시중이 추대한 힘에 의한 것이므로, 나는 시중을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는데 시중이 어찌 나를 저버리려 하는가? 우왕을 세우고 창왕을 맞이할 때에 윤이 · 이초와 함께 모의한 사람들은 그 모의한 흔적이 명백하지 않다고 여겨져서 이미 전년에 특별히 사면했으며 시중도 그렇게 여겼었다. 지금 대간이 다시 사면 전의 일을 들어서 죄 주기를 청한 까닭에 경으로 하여금 시중에게 고하여 시중이 만약 대간을 보게 되면 그렇게 타일러 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는데, 경이 시중에게 어떻게 말하였기에 시중이 고사하려 하는가?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내가 또 어떻게 감히 이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겠는가?”

 이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보고 맹세했는데 말의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끝내 정사를 보지 않았다. 태조가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 조인옥(趙仁沃)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대들과 더불어 왕실을 도왔는데도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이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두렵다.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 피하겠다.”
하고 집사람들에게 행장을 재촉하여 떠나려 하였다. 그러자 정도전 등이 아뢰기를
 “공의 한 몸에 종사와 백성이 매여 있는데 어찌 그 거취를 경솔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실에 남아 있으면서 현인을 등용시키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서 기강을 진작시킨다면 참소하는 말이 저절로 그칠 것이오니 그렇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 만일 시골에 물러가 있게 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극성할 것이므로 재앙이 반드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옛날에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고 하자 고조(高祖)가 이를 죄 주지 않았다. 나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는데 왕이 어찌 나에게 죄를 주겠는가?”
하므로 서로 의논했으나 결정이 나지 않았다. 가신(家臣) 김지경(金之景)이 신덕왕후 강씨에게 사뢰기를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공에게 권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이 두서너 사람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신덕왕후는 그 말을 믿고 태종에게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대답하기를

 “공께서 참소에 시달리시어 가실 뜻이 있으셨으나, 정도전과 남은 등은 이해(利害) 문제를 가지고 힘써 진달하여 가시려 하는 것을 중지시킨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김지경을 책망하면서,

 “그 두서너 사람은 공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한 사람들이니 너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7월에 공양왕이 태조의 사저에 거둥하여 주연을 베풀고 음악을 울리며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태조가 신덕왕후와 더불어 공양왕께 나아가 술을 대접하자 공양왕이 태조에게 의대(衣팿) · 입자(笠子) · 보영(寶纓) · 안마(鞍馬)를 하사하니, 태조가 즉석에서 입고 배사하였다. 밤이 되자 류만수(柳曼殊)가 문을 잠갔다. 태종이 몰래 태조에게 아뢰어 나가기를 청하니, 태조의 금직(金直)에게 명하여 문을 열게 하고 태조를 모시고서 사저로 돌아왔다. 마상에서 태조가 태종에게

 “갓끈은 참으로 진귀한 물건인데 내가 훗날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이튿날 왕이 노하여 금직(金直)을 가두었는데, 태조가 대궐에 나아가 `술을 견디지 못하여 금직에게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하고 사과하니 왕이 금직을 놓아 주었다.

 12월, 공양왕은 태조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더 내렸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3)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392년(공양왕 3) 임신년 정월, 밀직사(密直司) 이염(李恬)이 술에 취하여 왕에게 예절을 차리지 않으니, 간관이 극형에 처할 것을 청했다. 태조가 아뢰기를
 
“이염이 죄가 있을지라도 그 말이 솔직한데서 나온 것이오니 용서하소서.”
하니, 마침내 곤장을 쳐서 귀양 보냈다.

 태조가 공이 높은데다가 또 민중의 마음을 얻게 되자 공양왕은 그것을 꺼렸다. 한편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은 사전(私田)을 혁파한 것에 대해 원망을 하고 있던 터에 공양왕이 태조를 꺼리는 것을 알고는 온갖 방법으로 태조를 모함하고 헐뜯었다. 우왕과 창왕의 당여(黨與)들이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조석으로 참소하니, 공양왕은 마침내 그 참소하는 말을 믿고 좌우의 신하들과 더불어 몰래 태조를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태조의 휘하 인사들이 그들의 행위에 분개하여 글을 올려 모함임을 변명하려고 글을 작성했으나 올리지 못했다. 태조 이복형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중간 위치에서 변고의 전개를 관망하다가 공양왕의 시기와 혐오가 극에 달한 사실을 알고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평소 동갑계를 맺었던 공민왕의 사위 익천군(益川君) 왕즙(王緝)에게 태조의 휘하 인사가 쓴 글을 알려 후일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공양왕이 그 까닭을 알게 되었으므로 태조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경의 휘하 인사가 글을 만들어 우현보 등을 논죄하려고 한다는데 경도 알고 있는가?”
하니, 태조가 몹시 놀라면서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서 휘하 인사들을 불러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고 중지시켰다.

 3월, 세자 석(奭)이 중국에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황주(黃州)에 마중나가서 말을 타고 그곳에서 사냥을 하였다. 길을 떠나려는데 무당 방올(方兀)이 신덕왕후에게 말하기를

 “공의 이번 행차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백척의 높은 다락에 오르다가 실족하여 떨어져 거의 땅에 닿았을 때 만인이 모여서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신덕왕후는 매우 근심이 되었다. 태조가 활을 쏘아 사냥을 하면서 새를 쫓다가 말이 진수렁에 빠져 넘어지니 마침내 낙마하여 몸을 다치시어 견여(肩輿)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자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연달아 보내어 문병하였다.

 그 때 정몽주는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대하여 조정과 백성들의 마음이 태조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시기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는 기색이 완연하였다. 그리고 기회를 타서 태조를 제거하려고 대간을 사주하여 말하기를

 “먼저 우익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가 친근히 믿는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과 전 정당문학(前政堂文學) 정도전, 전 밀직부사 남은, 전 판서 윤소종(尹紹宗), 전 판서 남재(南在), 청주목사 조박(趙璞)을 탄핵하니, 공양왕이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렸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4)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정몽주가 중간에서 이를 선동하여 조준 등 6인을 모두 먼 곳에 귀양보내고, 자기 편인 김귀련(金龜聯) · 이반(李蟠) 등을 조준과 정도전 · 남은이 귀양간 곳으로 보내어, 그들을 국문하여 죽이게 하려 하였다. 김귀련 등이 길을 떠나려 할 무렵, 태종은 내우(內憂 : 신의왕후 한씨의 상사)를 당하여 속촌(粟村)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하고 계셨는데, 이제(李濟)가 차와 과일을 준비하여 갔을 때 태종이 이제에게 말하였다.
 
“정몽주가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
그러자 이제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가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유숙할 때 태종이 달려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태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또 고하기를
 “즉시 서울로 들어가셔야 마땅합니다. 유숙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태조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몇번을 청한 다음에야 비로소 태조가 병을 참고 밤에 행차하였다. 태종이 태조를 부축하여 저택에 이르렀다.

 태종이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 이달충(李達衷)의 아우 밀직제학 이성중(李誠中)이 자기 집안에 있는 대대로 전해져 오고 있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을 아들을 시켜 바치게 하였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 같이 앉아서 이를 받았다. 원경왕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보검을 보낸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군요.”
하였다. 이튿날 태종이 이성중의 집에 가서 사례하기를
 “나는 유학(儒學)을 닦는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보검을 보냈는가?”
하니, 이성중이 대답하기를
 “보검은 저의 소용이 아닙니다. 나으리께서 당연히 쓰실 것이기에 감히 바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간을 사주하여 연명으로 글을 올려 조준 · 정도전 등을 주살하자고 청하자 태조가 아들 정종[芳果]과 아우 화(和), 사위인 이제와 휘하 황희석(黃希碩) · 조규(趙珪) 등을 대궐에 보내어 아뢰기를
 “지금 대간은 조준이 전하를 왕으로 세울 적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을 하자 신이 이 일을 저지시켰다고 논핵했는데, 조준과 함께 의논한 사람은 누구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켰다고 하는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라건대 조준 등을 불러와서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고 이일에 대해 두세 번 왕복하며 아뢰었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았다. 여러 소인배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심하여 화가 언제 닥칠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태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이 나가서 정종과 리화 · 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정몽주의 무리가 사람을 보내어 정도전 등을 국문하여 그들이 공초한 말을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세가 이미 급하게 되었사온데 앞으로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5)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라고 하면서, 태종에게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 상사를 마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태종이 남아서 병환 시중들기를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이 할 수 없이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으로 가서 사랑에 앉아 신근한 마음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말하기를

 “백성의 이해가 이 시기에 결정되었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이 저와 같은데 공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와 장상이 어찌 혈통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하게 말을 하였다. 이에 태종이 즉시 태조의 사저로 와서 정종과 리화 · 이제와 의논, 이두란으로 하여금 치게 하려 하니 이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태조)이 모르시는 일을 내가 어떻게 감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정몽주를 죽이지 않을 수는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휘하 인사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왕실에 공로가 있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인데 지금 소인배들의 모함을 당했다.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두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배들은 반드시 우리에게 나쁜 평판을 뒤집어 씌울 것이니 후세에 누구인들 이 사실을 알겠는가? 휘하의 인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힘을 쓸 사람이 없단 말인가??br>? 하니 조영규가 개연히 말하기를

 “어찌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영규 · 조영무(趙英茂) · 고여(高呂) ·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에 들어가서 정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이 그 계획을 정몽주에게 누설하였다. 정몽주가 그 계획을 알고 태조를 사저로 찾아와 병을 위문하였다. 물론 사실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정몽주를 평소와 같이 대접하였다. 리화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정몽주를 죽이려면 지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미 계책을 정하고 나서 리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께서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이 말하기를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노상에서 격살하기로 모의하였다. 태종은 조영규에게 명하여 정종의 저택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 정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서 정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다시 고여(高呂) · 이부(李敷) 등 두서너 사람에게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하였다. 정몽주가 집에 들어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태종은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직접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서 있는지라 즉시 이 말을 타 고 달려 정종의 저택으로 갔다. 그곳에서 정몽주가 지나갔는지 아닌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않았다\'고 하므로, 다시 방법과 대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그 때 마침 전 판개성부사(前判開城府事) 류원(柳源)이 죽었는데 정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들러 조상하느라고 지체하게 된 것이었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6)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이 때문에 조영규 등은 무기를 준비한 채 기다리게 되었다. 정몽주가 다가오자 조영규가 달려가서 내리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조영규를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조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지게 되었다. 정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급히 달아났으나 고여 등이 쫓아가 마침내 그를 죽였다. 조영무가 돌아와서 태종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 태종은 들어가 그 사실을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을 견디며 일어나서 태종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져 있다. 지금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하겠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것은 그 자식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기를 원해서인데 네가 감히 이와 같이 불효한 짓을 하고 있으니 나는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에 태종이 대답하기를

 “정몽주 등이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그냥 앉아서 당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정몽주를 살해한 것은 그것이 바로 효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태조의 노기가 대단하여 신덕왕후가 곁에 있으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태종이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러자 신덕왕후가 노기 띤 얼굴로 고하기를
 “나으리께서는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하셨으면서 어찌 이렇게도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하였다. 태종은 휘하의 병사들을 불러 모아 뜻밖의 일에 대비하여야겠다고 생각하여 즉시 장사길(張思吉) 등을 불러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집을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태조가 마지못하여 황희석(黃希碩)을 불러 이르기를,

 “정몽주 등이 죄인과 한편이 되어 대간을 몰래 꾀어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하여 처형되었으니, 마땅히 조준 · 남은 등을 불러와서 대간과 변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경은 가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황희석이 의심을 품고 두려운 기색으로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가 곁에 있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니, 황희석이 대궐에 가서 상세히 고하였다. 공양왕이 이르기를,

 “대간을 탄핵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대간을 밖으로 나가게 할 것이니 경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노여움으로 인해 병환이 도져서 말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태종은 일이 급하다고 말하고는 몰래 이자분(李子芬)을 보내어 조준과 남은 등을 소환하자고 타이르고, 또 정종과 리화 · 이제 등과 의논하여 정종을 공양왕에게 보내어 아뢰기를

 “만약 정몽주의 무리를 문죄하지 않는다면 신 등에게 죄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대간을 순군옥에 내려 가두고 말하기를
 “마땅히 외방에 귀양 보내야 하니, 국문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7)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그리고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주동(金湊同), 순군제조(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아뢰기를,
 
“정몽주 · 이색 · 우현보가 이숭인 · 이종학 · 조호(趙瑚)를 보내어 신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리성계가 공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그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먼저 제거하고 다음에 리성계를 도모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숭인 · 이종학 · 조호를 순군옥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 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 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 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 사헌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무(金畝) · 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 · 이신(李申)과 이숭인 · 이종학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형률을 다스 리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진양 등의 죄는 참형에 해당됩니다.”
하였으나,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이다. 김진양 등은 정몽주의 사주를 받았을 뿐인데 어찌 함부로 형벌을 쓰겠는가?”
하였다.
 “그러면 마땅히 곤장을 쳐야 합니다.”
하니, 태조가 다시 이르기를,
 “이미 이들을 용서했는데 어찌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진양 등은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준 등을 소환하고 태조를 문하시중으로 삼았으나 태조가 사직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6월에 공양왕이 태조의 사저에 거둥하여 병을 위문하였다. 남은이 위화도 회군 때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로 비밀리에 의논하였으므로, 돌아온 뒤에 태종에게 그 뜻을 알렸다. 그러나 태종은,
 “이것은 대사이니 경솔히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편 그때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태조를 추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도 공공연히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돌아간 곳이 있는데 어찌 빨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지 않습니까?”
하기도 했다. 이 때에 이르러 태종은 마침내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다. 남은이 평소 서로 진심으로 따르는 조준 · 정도전 · 조인옥 · 조박 등 52인과 함께 태조를 추대하기로 비밀리에 모의를 했으나, 태조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들어가 신덕왕후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그 뜻이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신덕왕후도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이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이르기를
 “즉시 의식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실 것을 권고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당시 공양왕이 태종과 사예(司藝) 조용(趙鏞)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장차 리시중(李侍中)과 동맹하려고 하니 경 등이 내 말을 시중에게 가서 전하고, 시중의 말을 듣고 나서 맹서(盟書)를 초안 잡아 오도록 하라.”
하고, 또,
 “반드시 이에 관련된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br>? 하였다. 이에 조용(趙鏞)이 대답하기를
 “맹세는 귀한 것이 아니며 성인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열국의 동맹 같은 것은 있었으나 임금이 신하와 동맹하는 것은 경적(經籍)의 고사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양왕은 다만 이를 초안잡아 오라고만 하였다. 그리하여 조용과 태종이 함께 나아가서 왕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네가 임금의 명령대로 동맹의 글을 초안 잡아 보아라.”
하였다. 이에 조용이 물러가 다음과 같이 초안을 잡았다.
 “경이 있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지금에 이르렀겠는가?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감히 잊겠는가? 황천과 후토가 위에 있고 곁에 있으니 우리의 자손들은 대대로 서로 해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맹약이 있는데 내가 어찌 경을 저버리겠는가?”
 조용이 태종과 함께 초한 맹약을 공양왕에게 올리니, 공양왕이 보고 `좋다\'고 하였다. 조용이 사관을 겸직하게 되었는데
 “시중이 자기를 도와 왕으로 세워 준 공에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해칠 마음이 임금의 가슴 속에 생겨났으니, 천명은 이미 가 버리고 인심 또한 떠난 것이므로 구구한 맹약 따위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썼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8)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392년(공양왕 3) 임신년 7월 17일에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7월 12일, 공양왕이 태조의 사저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동맹을 하려고 의장을 갖추었다. 그 때 시중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게
 “지금의 왕이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었고 인심도 이미 떠났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폐하기를 청합니다.”
하였고,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결정하였다. 남은이 문하평리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였다. 공양왕이 부복하여 명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으나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세워 왕으로 삼았다. 나의 성품이 민첩하지 못하여 사세를 알지 못했으니 신료들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는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왕위를 물려 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에 두고 모든 정무를 왕대비께 여쭈어 결재하였다.

 13일 임진에 대비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 을미에는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 · 김사형 · 이제 · 리화 · 정희계 · 이지란 · 남은 · 장사길 · 정총 · 김인찬 · 조인옥 · 남재 · 조박 · 오몽을(吳蒙乙) · 정탁(鄭擢) · 윤호(尹虎) · 이민도(李敏道) · 조견(趙죺) · 박포(朴苞) · 조영규(趙英珪) · 조반(趙?) · 조온(趙溫) · 조기(趙琦) · 홍길민(洪吉旼) · 류경(劉敬) · 정용수(鄭龍壽) · 정담(鄭湛) · 안경공(安景恭) · 김균(金鈞) · 류원정(柳爰廷) · 이직(李稷) · 이근(李懃) · 오사충(吳思忠) · 이서(李舒) · 조영무 · 리백유(李伯由) · 이부(李敷) · 김로(金輅) · 손흥종(孫興宗) · 심효생(沈孝生) · 고여(高呂) · 장지화(張至和) · 함부림(咸傅霖) · 한상경(韓尙敬) · 황거정(黃居正) · 임언충(任彦忠) · 장사정(張思靖) · 민여익(閔汝翼) 등의 대소 신료, 한량(閑良) · 기로(耆老) 등과 더불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으로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길을 꽉 메우고 있었다. 대사헌 민개(閔開)만이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머리를 숙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그를 격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의리상 죽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힘써 말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여러 신료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가 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리천우(李天祐)가 태조를 부축하여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매우 두려워하면 서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배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태조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9)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려는 시조가 건국한 이 후 지금 5백년 가까이 되었는데, 공민왕대에 이르러 아들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뜨니 권신이 권세를 잡고 임금의 총행을 견고히 하려고 거짓으로 요승 신돈의 아들 우를 공민왕의 후사라 일컫고 왕위를 훔쳤습니다. 그런 지가 이미 15년이나 되었으니 왕씨의 제사는 이미 끊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우는 포악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이 앞서서 대의를 주장하여 천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여겨 회군을 하니, 우가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서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이색 · 조민수 등이 신우왕의 장인인 이림에게 가담하여 그의 아들 창을 왕으로 삼았으니, 이로 인하여 왕씨의 후사는 두 번 끊어진 셈입니다.

그 때가 바로 하늘이 공에게 왕위를 명하는 시기였는데, 공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사직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날 신우의 악행은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무리인 이색 · 우현보 등은 고집스럽고 미혹되어 깨닫지를 못하고 신우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죄를 모면하려고 그 무리인 윤이(尹彛) · 이초(李初) 등을 몰래 중국으로 보내어 본국이 이미 배반하였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본국을 소탕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일 그 계 책이 행해졌다면 사직은 폐허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고 백성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간관과 헌사가 글을 올려 이색과 우현보 등이 사직에 죄를 지었고 백성에게 화를 끼쳤으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정창군(定昌君 : 공양왕)이 그들과 인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법을 굽혀 감싸 주고 언관에게는 장형(杖刑)을 행하여 축출하였습니다. 이에 간사한 무 리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종연(金宗衍)은 도피중에 있으면서도 무리를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였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난리에 응하려고 도모하니, 화란(禍亂)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창군은 사직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획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을 얻으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죄를 주고 아첨하고 참소하는 무리는 감싸 주고 있습니다. 이에 하늘이 성상(星象)을 여러 번 변하 게 하고 요얼(妖孼)이 번갈아 일어나는 견책의 징조를 내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정창군이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그는 임금의 도리를 잃었고 백성들의 마음 역시 이미 떠났으니, 정창군은 사직과 백성을 주재할 자격을 상실하고 사저로 물러나 있습니다.

 생각건대 군국(軍國)의 정무는 지극히 번다하고 중대한 것이므로 하루라도 통솔자가 없어서는 안 되오니, 왕위에 즉위하시어 신명과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그러나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예로부터 천명이 없으면 제왕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며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대소 신료와 한량 · 기로 등이 부축하고 호위하여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더욱 간절하게 권고하니, 마침내 이날,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던 것이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10)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백관이 궁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각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를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다. 육조의 판서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이 되었더라도 오히려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을 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런 일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를 타고도 적봉(賊鋒)을 피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병들어 손과 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자리에 올랐으니, 경 등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과덕한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렴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으며, 도통(都統) 최영은 강직하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르게 할 사람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밖에 와서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다.”
하였는데, 그 글에
 “목자(木子 : 李)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
되어 있었고
 “비의(非衣 : 裵) 주초(走肖 : 趙) 삼전삼읍(三奠三邑 : 三鄭)” 등의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그 글을 바친 사람을 맞이해 들이게 하였으나 이미 가 버려 찾지 못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간직된 비기(秘記)에는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설이 있었고, 또 `왕씨가 멸망하고 리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고려 말년에 이르기까지 숨겨진 채 발표되지 않더니, 이 때에 이르러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또 `조명(早明)\'이란 말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했었는데, 뒤에 국호를`조선(朝鮮)\'이라고 한 뒤 에야 `조명(早明)\'이 `조선(朝鮮)\'을 가리킨 것임을 알게 되었다.
태조고황제 - 4대조(四大祖)를 추존(追尊)하고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내림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4대조(四大祖)를 추존(追尊)하고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내림

 1392년(태조 원년) 7월 28일 정미, 4대(四代)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였다. 고조부는 목왕(穆王)이라 하고 그 비 이씨는 효비(孝妃)라 하였으며, 증조부를 익왕(翼王)이라 하고 비 최씨를 정비(貞妃)라 하였다. 조부는 도왕(度王)이라 하고 비 박씨를 경비(敬妃)라 하였으며, 아버지는 환왕(桓王)이라 하고 비 최씨를 의비(懿妃)라 하였다. 왕은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와 한량(閑良) · 기로(耆老) · 군민(軍民)에게 교서를 내려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 었던 사정을 말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였다.

 1.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를 세우고 동쪽에는 종묘(左廟), 서쪽에는 사직(右社)을 세우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전조(前朝) 때에는 소목(昭穆)의 차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경(經)에 맞지 않았다. 또 사직이 서쪽(右)에 있기도 했지만, 성밖에 있어 그 제도가 옛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예조에서는 자세히 연구하고 의논해서 일정한 제도를 만들도록 하라.

 1. 왕씨의 후손인 우(瑀)에게는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다.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에서 편한 대로 거주하도록 하고 처자와 동복(童僕)이 전처럼 모여 살게 하되, 소재 관사에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보살펴 주어서 처소를 잃지 않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