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왕 - 생애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생애

 숙종대왕(이하 숙종이라 함)의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효종이 일찍이 꿈에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니, 바로 용(龍)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원손(元孫)을 얻을 좋은 징조이다\' 하고 미리 소자(小字)를 용상(龍祥)이라고 지어 기다렸는데, 과연 1661년(현종 2) 8월 15일 신유(辛酉)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숙종을 낳았다. 숙종의 효심을 행장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다섯 살 때 명성왕후(모후) 김씨가 산병(産病)이 있자, 왕이 매양 꿇어앉아 미음을 올리며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드러나니, 명성왕후가 억지로 드시며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 즉 우유를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지르자, 왕이 듣고 불쌍히 여겨 우락을 들지 않았으니, 그 인효(仁孝)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현종이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조신(朝臣) 중에서 선발하여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김좌명(金佐明) · 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다. 현종이 송준길을 인견(引見)하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원자를 불러 나오게 하니, 원자는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다. 송준길이 현종 에게 절하며 하례하기를,
“원자의 읍양(揖讓)과 궤배가 정확하게 법도에 맞으니 만약 하늘 이 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숙종을 1667년(7세) 정월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숙종은 1669년(9세) 정월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에 참배하고 8월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여 선성(先聖)을 전알(奠謁)하였다. 이어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는데, 예를 차린 용모가 씩씩하고 엄숙하며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에 둘러서서 보고 듣 는 자가 모두 기뻐하였다.

 숙종은 1670년(10세) 3월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1671년(11세) 4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이었다. 이 때 숙종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였는데 궁료(宮僚)를 자주 접견(接見)하며 부지런히 강마(講磨)하 여 문리(文理)가 크게 통달(通達)하고 예덕(睿德)이 날로 향상되었으며, 빈사(賓師)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다. 왕비는 현종 2년 9월 3일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671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행하고 1674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74년(14세)에 현종이 병환이 나자 숙종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애태우며 옷을 입은 채 띠를 풀지 않았고, 병세가 위독하게되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경건히 기도하게 하였다. 8월 18일 기유(己酉)에 현종이 승하하자, 우수(憂愁) 속에 상주(喪主) 노릇을 하며 수장(水醬)조차 들지 않고 반호(攀號)하 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니, 모시는 자가 차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못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2)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예관(禮官)이 왕위를 계승하는 절목(節目)을 올리니 도로 내리며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져 망극(罔極)한 가운데 또 이런 말을 들으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스스로 진정할 수가 없다.”
하며, 근신(近臣)과 삼사(三司)에서 여러번 청해도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大臣)이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며 세 차례 청한 뒤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23일 갑인(甲寅)에 여차(廬次)에서 걸어 나오는데, 울며 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으면서 곡하고 절하였다. 이어서 연영문(延英門)으로부터 걸어 나와 인정문(仁政門)의 계단 위에 이르러 오랫동안 서서 어좌(御座)에 나아가지 않았다. 승지(承旨)와 예관(禮官)이 달려가 나아가기를 권유하 니, 따르지 않고 소리내어 울 뿐이었다. 여러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간청하니, 어좌에 올라가 곡했는데, 눈물이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뜰에 가득한 신료(臣僚)들이 모두 다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고, 위졸(췾卒)이나 이예(吏隸)들까지도 눈물을 씻지 않는 자가 없었 다. 예(禮)를 마친 후에 걸어서 여차로 돌아왔는데, 울어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며, 언제나 신료로서 처음 보는 이를 대하면 곧 곡하였다.
 조용히 대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이런 대위(大位)에 올라 사리(事理)가 어 떠한 것을 알지 못하니, 무릇 여러 가지 정령(政令)에 있어 혹시라도 망령되고 그릇된 것이 있을까 두렵다. 다만 대신이 잘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숙종은 보위(寶位)에 오른 이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숙종은 흉년든 해에 민생(民生)의 고달픔을 깊이 진념(軫念)하여 더욱 심한 고을의 군포(軍布)의 절반을 경감해 주었다. 12월 임인(壬寅)에 현종을 숭릉(崇陵)에 장사지냈다. 발인(發靷) 때 숙종은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공경히 전송했고 반우(返虞) 때는 교외(郊外)에서 맞이해 곡하였다.

 1675년(15세)에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비 장씨)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라 경사전(敬思殿)의 삭망(朔望) 배제(陪祭) 때 신료(臣僚)들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백포(白袍) · 백모(白帽) · 백대(白帶)로 제례(祭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왕의 위상에 대해 일찍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제작하게 했는데, 친히 글을 짓고 그 위에 써서 좌석 옆에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어느날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뒤에 배가 편안 하고, 신하가 현명(賢明)한 뒤에 임금이 편안하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그림의 의미를 체득하여 보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백성과 직접 대하는 목민관으로부터 여러 도(道)의 방백(方伯)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나의 백성을 위하는 일념(一念)은 자나깨나 느슨해지지 않는다. 언제나 밥 한 술을 뜰 때마다 늘 쌀 한 알 한 알이 신고(辛苦)임을 생각하고, 옷 한 벌을 입을 때마다 늘 방적(紡績)의 노고를 생각한다. 근년의 기근(飢饉)은 8도(八道)가 모두 다 그러한데, 기전(圻甸) · 양서(兩西) · 영서(嶺西) · 영북(嶺北)이 더욱 시급하다. 반드시 미리 요리(料理)한 연후에야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거의 구렁에 떨어지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십행(十行)의 임금의 조서에 말뜻이 애절하니, 중외(中外)에서 그것을 듣고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대왕 - 생애 (3)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개성부(開城府)에 화재(火災)가 나서 5백여 가호(家戶)가 불에 타자, 특별히 주진하도록 하였다.
 8월에 현종의 대상(大祥)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8일에 산릉(山陵)을 전알(展謁)하였다. 10월에 담제(쩘祭)를 거행하고 12월에 친히 편전(便殿)에서 인사점검을 거행하였다.

 1678년(숙종 4)에 숙종은 병환을 앓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나았다. 예관(禮官)이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숙종은 말하기를,
“내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아 자성(慈聖)께 근심을 끼쳐 드려 마음이 몹시 황송했는데, 어찌 칭경(稱慶)하는 일에 안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이 극력 청하니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그래도 외방(外方) 에서는 단지 하전(賀箋)만 올리고 방물(方物)은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숙종은 연이은 자연 재해가 있자 말하기를,
“내가 왕위를 욕되게 한 후로 한재와 수재가 서로 연속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 보리와 밀이 타서 말라 죽고 온 들판에 푸른 식물이 없는데, 우박과 천둥, 얼음덩이의 변이 여름철에 계속 발생하니,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건대, 실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으나 쉬나 편안하지가 않다. 오늘부터 정전을 피하여 더욱 경외(敬畏)를 더할 것이니, 아! 그대들 대소(大小) 신공(臣工)들은 각각 서로 공경과 화합을 다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일상적인 음식을 감하고 음악을 중지하고 술을 금할 것을 명하였다. 또 양국(兩局)과 병조(兵曹)에 명하여 아약(兒弱)을 충정(充定)한 경우 물고자(物故者)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종류를 분명히 조사하여 변통하도록 하였다. 몸소 종묘(宗廟)에 기도하고 다시 하교(下敎)하여 직언(直言)을 구하기를,
“오늘의 이 한발(旱魃)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혹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천심(天心)에 합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도(公道)를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옥송(獄訟) 이 공정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궁금(宮禁)이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가? 언로(言路)가 막히고 수령(守令)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가 많은 것은 아닌가? 과매(寡昧)한 나의 득실(得失)과 백성들의 곤고(困苦) 를 각각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렇게 숙종은 자책과 정치적 성찰을 자주하였다.

 1680년(숙종 6) 10월 26일에 중궁(中宮)이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춘추 20세였다.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왕비의 시호(諡號)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다. 1681년 2월 병오(丙午)에 인경왕후(仁敬王后)를 익릉(翼陵)에 장사하고, 익릉이 있는 고양군 (高陽郡)의 춘수미(春收米)를 특별히 감해서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1681년 5월 2일에 민씨(閔氏)를 책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으로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이분이다. 왕비는 현종 8년 4월 23일 반송 방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어의동 본궁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대왕 - 생애 (4)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1683년(숙종 9) 11월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 이하는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이 해 12월 5일에는 왕대비가 승하하였다. 시호는 명성(明聖)이라 하였다. 이듬해 4월 명성왕후를 숭릉(崇陵)에 부장하고 양주의 대동미 2두를 감해 주었다.
 1685년 극심한 한발 때문에 궁인(宮人) 25명을 내보냈다. 가뭄이 더욱 혹독하여서 여러차례 기우제를 지냈다. 12월에 친히 명성왕후의 대상제를 행하였다.

 4월에 자의 대비전(慈懿大妃殿)에 풍정(豊呈)을 올렸다. 왕이 말하기를,
“삼가 상수(上壽)의 예(禮)를 거행해 자손들이 모두 모여 밤이 다하도록 잔치를 벌이고 술잔을 들어 장수를 경하하여 화기(和氣)가 무르녹으니, 이는 실로 보기 드문 행사이다. 어찌 기쁨을 금할 수 있으랴? 지존(至尊)의 주갑(周甲)보다 더 큰 경사가 있을 수 없으니 휘호(徽號)를 받들어 올리 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고, 5월에 `강인(康仁)\'이란 존호(尊號)를 올렸다.

 온왕(溫王 : 백제 온조왕)의 사당과 영창대군(永昌大君)과 명선(明善) · 명혜(明惠) · 명안(明安) · 숙정(淑靜) 네 공주(公主)와 여양(驪陽) · 광성(光城) 두 국구(國舅)와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증세가 위독해지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묘사(廟社)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를 드렸고,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계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수들까지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688년 8월 26일 자의대비가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휘호(徽號)는 정숙 온혜(貞肅溫惠), 전호(殿號)는 효사(孝思), 능호(陵號)는 휘릉(徽陵)이라 하였다.
 오랫동안 후사가 없다가 1688년에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경종)를 낳았다. 1689년(숙종 15) 정월에 원자(元子)의 위호(位號)를 정할 것을 명하였다. 장씨를 봉하여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1690년 6월에 면복을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였다. 10월에 장렬왕후를 종묘에 부제하였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사제(私第)에 물러가 있도록 하고, 희빈 장씨를 올려 왕비(王妃)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1694년(숙종 20) 서인 노론이 남인과 장씨에게 회의를 갖게된 숙종을 움직이어 서인 노론인사를 등용하자, 하교하기를,
“지난 기사년(기사환국)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도 모르게 절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진 보필을 잘못 의심하여, 급기야 은례(恩禮)가 쇠하고 답답한 마음을 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깊은 밤중에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궁구하던 끝에 환히 깨닫고 크게 후회하면서 자나깨나 고민해 온 지 어언 몇 년이 되었다. 이번에 윤음(綸音)을 환발(渙發)하여 곤위를 다시 바르게 하니, 이는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회복하고 종사(宗社)의 은밀한 도움에 힘입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6월 1일에 다시 중궁(中宮)의 책례(冊禮)를 거행하였다.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회태(回泰)하여 중곤이 복위(復位)되었으니, 백성들 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王后) 인수(印綬)를 회수하고 이어 희빈(禧嬪)이란 구작(舊爵)을 내려 세자(世子)에게 정성(定省)하는 예를 폐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5)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또 기사년에 죽음으로 간(諫)한 오두인(吳斗寅) · 박태보(朴泰輔) 등에게 관작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고, 뒤에 강가에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화란을 선동하고 명의(名義)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고 귀양보냈는데, 차등이 있었다. 그뒤 또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나라의 제도로 만들어 빈어(嬪御)는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에 왕비(王妃) 민씨가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35세였다. 시호(諡號)를 인현(仁顯), 능호(陵號)를 명릉(明陵), 전호(殿號)를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자식은 없었다.

 대신(臺臣)이 약(藥)을 의논한 여러 의관(醫官)들을 죄줄 것을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다.\' 하였다. 사람의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존귀함이겠는가? 지금 전적으로 여러 의관들만 책망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겠는가? 옛적에 당(唐)의 의종(懿宗)은 공주(公主)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의인(醫人)을 죽였고, 황 명(皇明)의 마황후(馬皇后)는 붕어(崩御)할 적에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일러 경계하였으니,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내가 일찍이 이것을 내전(內殿)에게 말했더니 나의 말에 깊이 감복(感服)하였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 10월 3일에 김씨(金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1720년(숙종 46)에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다 하여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6월에 숙종은 환후(患候)가 더욱 무거워졌다. 이에 세자가 재차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사(宗社) · 산천(山川)에 기도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8일 진시(辰時)에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 60세였다.

 이날 경성(京城)의 모예 · 여대들까지 궐하(闕下)에 달려나와 마치 부모처럼 곡(哭)하였고,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이르기까지 바삐 달려와서 호읍(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궁(中宮)이 원상(院相)에게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평일의 거룩한 덕행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오히려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 지 정무(政務)에 수응(酬應)하시느라 누차 침식(寢食)을 폐하셨고, 하늘을 공경히 섬겨 재앙을 만나면 공구(恐懼)하셨다. 사시(四時)의 기후가 간혹 고르지 못하거나 우설(雨雪)의 절기가 만일 시기를 잃어 무릇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곧 근심이 얼굴빛에 나타났고,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는가 하는 것 등을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여시(女侍)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하셨다. 백성에 대한 걱정과 나라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근로하심이 시종 하루와 같아 여러 해 동안 계속 손상된 나머지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게 된 것이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이르러서는 경비를 진념(軫念)하여 일찍이 조치한 바가 있었다. 모든 여러 가지 제 기(祭器)는 이번에 내려 주는 은자(銀子)로 만들도록 하고, 또 이 3,700금(金)은 대행대왕께서 진휼의 자금으로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인데, 이제 지부(地部)에 내려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한다. 습렴(襲殮)의 의대도 또한 대내(大內)에서 준비해 쓸 것이니, 만일 부족한 것이 있을 경우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써서 보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여보내도록 하 여 평일에 백성을 구휼하고 경비를 절약하던 지극한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습렴할 때는 대신(大臣) · 예관(禮官) · 승정원(承政院) · 삼사(三司)에서 입시(入侍)하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6)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숙종의 성품은 영명(英明) · 특달(特達) · 관홍(寬弘) · 근검(勤儉)하였으며, 효성(孝誠)의 돈독함은 천성에서 나와 시선(視膳)할 때부터 기쁜 낯빛으로 모시는 도리를 다하였다. 사복(嗣服)하자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여 자의(慈懿) · 명성(明聖) 두 동조(東朝)를 받들어 섬겼는데, 새벽과 저녁으로 승환(承歡)하여 화기(和氣)가 애연하였다.

 숙종은 말하기를,
“내가 평소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獄事)에 대해 마음속으로 항상 측 은하게 생각하였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나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앙(餘殃)이 있다\' 하였다. 임창군(臨昌君)은 소현(昭顯)의 혈손(血孫)으로서 그 자손들의 번연(蕃衍)함이 당(唐)의 분양(汾陽)에 비길 만하니,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과연 분명하다.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강석기(姜碩期)의 시장(諡狀)에 이르러 그가 어진 재상이었던 것을 알았고, 또 경덕궁(慶德宮)의 높은 곳에서 소현(昭顯)의 사당을 바라보고 그 신도(神道)의 외롭고 단출함에 서글픈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 건의 일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절구(絶句) 셋을 지었다. 작년에 수상(首相)이 관작을 회복해 주는 일을 진달(陳達)했을 적에 마음에 망설이는 바가 있어서 능히 다 말하지 못하고 단지 관작의 회복만을 허락했는데, 대개 강석기가 화(禍)를 입었던 것은 단지 그 딸에게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옛적 을미년에 연신(筵臣) 이단상(李端相)이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함을 남김없이 말하였을 적에 효묘(孝廟)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지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련된 것이라서 감히 의논할 수가 없다\'고 하교하였었다. 그런데 그 뒤에 마침내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해 주셨으니,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헌의(獻議)하는 여러 대신(大臣)들은 이 뜻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또 2품(二品)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원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공의(公議)도 크게 같으니, 신리(伸理)의 은전(恩典)을 조속히 거행하도록 명하라.”
하였다. 이에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그 묘소를 봉(封)하였다. 강석기와 김홍욱에게는 제사를 내리고 증직(贈職)하였으며,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숙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며,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였다. 한가로이 보내는 여가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經傳) · 사서(史書)와 제자 백가(諸子百家), 우리 동방(東方)의 문집(文集)까지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무릇 한 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날마다 세 번 경연(經筵)을 열어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 을리하지 않았고, 모년(暮年)에 이르러서도 자주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였으며, 글에 임하여서는 이치를 분석하여 견해가 분명하고 투철하였다. 일찍이 <심경(心經)>의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고 발동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주에게 신하가, 아비에게 아들이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 부소(扶蘇)가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이것을 부소의 과실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7)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慰安)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하늘을 공경히 섬기려는 정성이 위로 하늘에 이르렀고 여상(如傷)의 인덕(仁德)이 아래로 백성에게 미쳤다. 나라는 남북(南北)의 경보(警報)가 없어 경내(境內)가 편안했고 백성들은 하늘과 땅의 포용해 주는 은혜에 싸여 생업(生業)에 안락하였는데, 왕은 한(漢) · 당(唐)의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은 정치를 비루하게 여긴 나머지 개연히 삼대(三代)의 융성(隆盛)에 뜻을 두어 조처와 사업(事業)이 수신(修身) · 제가(齊家)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덕화(德化)가 이미 집안과 나라에 흡족하였고, 주관(周官)의 제도가 찬란히 다시 밝혀졌다.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열조(列祖)의 광휘(光輝)를 더하였고, 큰 계획과 큰 사업은 후사(後嗣)의 한없는 복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숙종은 말하기를,
“임진년에 재조(再造)한 은혜는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다.”
며 궁성(宮城) 북쪽 정결한 곳에 단(壇)을 설치하고, `대보단(大報壇)\'이라 명명(命名)하여 해마다 태뢰(太牢)로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였으며, 친히 `지감시(志感詩)\'와 서문(序文)까지 지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신종황제가 천하(天下)의 군대를 동원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황명(皇明)이 속히 망한 것은 반드시 동정(東征)에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이미 복수(復讐) · 설치(雪恥)를 하지 못하였고, 홍광(弘光)이 남도(南渡)한 후에도 또한 막연히 그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늘 개탄하며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종 황제가 선조에게 망룡의(?龍衣)를 하사하여 지금도 궁중에 보관되어 있는데, 때때로 꺼내 펼쳐보면 처참한 감회를 금할 수가 없다. 명(明)나라의 우리 나라에 대한 은혜가 한집안과 같은데도, 강약(强弱)의 형세에 구애되어 지금 저들을 복종해 섬기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제갈량(諸葛亮)의 일을 논하면서 왕이 말하기를,
“제갈량이 한(漢)나라를 회복(恢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몰랐던 바 아 니었으나, 그 마음을 다하였을 뿐이다. 신종 황제의 생사 육골(生死肉骨)의 은혜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병자년부터 지금까지 6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심(人心)이 해이해져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刊行)할 것을 명하고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한인(漢人)으로서 흘러들어와 우거(寓居)하는 자는 그 자신에게는 늠료(쬎料)를 주고 그 자손(子孫)은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성화(成化) 무렵에 하사한 인적(印跡)을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에서 얻자 숙종은 말하기를,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매양 청(淸)나라의 국보(國寶)를 쓰니, 마음이 아직까지 편안하지 않았는데, 이제 황조의 사본(賜本)은 전 획(篆劃)이 어제 쓴 듯하니, 이것으로 모각(摹刻)하여 금보(金寶)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숙종이 인조(仁祖) · 효종(孝宗) 양조(兩祖)의 뜻을 추념 (追念)하여 일생 동안 사모(思慕)하면서 차마 잠시도 잊지 못한 나머지, 또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금보를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며 황조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만들려 한 것이니, 그 지극한 정성과 애달파하는 뜻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숙종대왕 - 생애 (8)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단상(短喪)을 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최복(衰服)을 입는 제도가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그 뒤 수천 년 동안 예(禮)를 좋아하는 군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끝내 바꾸지 못하였다. 이에 숙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의 `오모(烏帽) · 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에 따라서 이미 개정(改正)하였으나 단령의(團領衣) · 포과모는 변경하지 못하여 고제(古制)에 미진한 바 있다.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君臣服)\'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이 일은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래 의심할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상(大喪)이 났을 때 여러 신하들이 유교(遺敎)를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고, 시사(視事)할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송유(宋儒) 정이(程쳶)가 말하기를,
“부자(夫子 : 공자)가 요순(堯舜)보다 낫다는 것은 사공(事功)을 말한 것이다. 요순은 천하를 다스렸는데 부자가 또 그 도(道)를 미루어서 만세(萬世)에 전하였으니, 요순의 도가 부자를 얻지 않았다면 또한 어디에 근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상제(喪制)는 인간의 대륜(大倫)이나 삼대(三代)의 제도가 천 년 동안 폐지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이것을 다시 시행하여 후세의 왕자(王者)로 하여금 의거하여 법(法)으로 취하게 하였으니, 이 일로 미루어 논한다면 비록 `삼대(三代)보다 낫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숙종은 병환을 앓은 지 10여 년이 되어 1720년 6월 초8일 계묘(癸卯)에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으니, 재위(在位) 46년이고 수(壽)는 60세였다. 시호는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였고 묘호(廟號)는 숙종(肅宗)이라 하였다. 시법에 `숙(肅)이란 강덕 극취(剛德克就)함을 뜻한다.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이라 하고, 능호(陵號)는 그대로 명릉(明陵)이라 칭하였다.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먼저 명릉(明陵)에 장사지냈는데, 12월 21일 갑인(甲寅)에 유명(遺命)에 따라 같은 영역(塋域)에 장사지냈다.
 처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장사를 지낼 때 우측(右側)을 비워두는 제도로 하도록 명하고, 장릉(長陵)을 모방해 곡장(曲墻)을 치우치지 않도록 쌓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중간에 위치하도록 하였으니, 재차 백성을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근심한 것이었다.

 숙종은 부왕 현종(顯宗)에 이어 독자로서 왕위에 즉위하였으므로 왕위 계승에서 경쟁자가 없다는 다행함이 있었으나 종실의 세가 너무나도 고단하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선원록을 정비하려는 노력과 이어 조종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의리를 들어 태조(太祖)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리고, 자수(字數)가 여러 묘(廟)에 비해 모자란다 하여 태종(太宗)의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다 하여 세실(世室)로 정했다. 공정왕(恭靖王)은 예전에 묘호(廟號)가 없었는데 추가로 올려 정종(定宗)으로 했고,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모사(模寫)하여 영희전(永禧殿)에 봉안(奉安)하였다. 1698년(숙종 24)에는 단종(端宗)의 대위(大位)를 추복(追復)하였다. 대개 정축년에 선양(禪讓)이 있고 난 이후 인정(人情)이 원울(寃鬱)하게 여겼으나 수백 년 동안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고, 열성(列聖)께서도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울러 그 사육신(死六臣)들까지 함께 제사지내 신하의 절개를 장려하였다. 중종의 신비(愼妃)는 예(禮)에 처리하기 곤란한 점이 있었으므로, 묘(廟)를 세워 제사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9)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숙종은 항상 스스로 기질(氣質)의 조급하고 사나운 점을 경계하여 혹은 윤음(綸音)을 내리고 혹은 시(詩)를 지어 보이며 항시 성찰(省察)의 공부를 더하였다. 질병이 있을 때는 심기(心氣)를 가다듬기가 가장 어려운 것인데, 10여 년 동안에는 일찍이 사기(辭氣)가 너무 지나친 적이 있지 않았으니, 만년의 조존(操存)의 유익함은 더욱 수명(壽命)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숙종은 말년에 정사의 격무에서 벗어나고파 하교하기를,
“나의 병이 고질이 되어 계복(啓覆)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할 수 없으니, 집마다 옥사(獄事)의 판결이 지체되어 유사(瘦死)할 뿐이다. 계복 역시 형인(刑人) 가운데 있으니, 변통(變通)의 방도가 없을 수 없다. 대벽(大?)으로 처단(處斷)할 즈음에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움이 있으면 세자가 스스로 마땅히 면품(面稟)할 것이며, 지금부터 이후로 무릇 형인(刑人)의 공사(公事)에 관계된 것은 일체 동궁(東宮)에 입달(入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기해년에는 태조(太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기사(耆社)에 이름을 올리고 노신(老臣)들에게 연회를 내렸다. 온 나라 안이 바로 북두(北斗)와 남산(南山)의 축수(祝壽)를 올렸는데, 하늘이 돌보지 않아서 끝내 수를 다 누리지 못하였다.

 숙종은 일찍이 `경계십잠(儆戒十箴)\'과 `권학문(勸學文)\' 등의 글을 저술하여 동궁(東宮) 즉 경종에게 내렸다. 1717년(숙종 43)에 대리(代理)의 명이 있었으므로, 동궁이 잇따라 장주(章奏)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답하기를,
“눈병이 또 극심하여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너에게 대리를 명하는 것은 바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의한 것이니, 네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부탁하는 바의 일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조심하여 감히 혹시라도 나태한 일이 없도록 하며, 시종 학문의 연구에 유념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답하기를,
“어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히 받들라.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니 백세(百世)에 의혹하지 않 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이니, 생각컨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특별히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동요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스승 · 문생[師生]에 관한 일이 한 시대의 쟁단(爭端)이 되었는데, 숙종이 비로소 시비(是非)를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런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도심(道心)으로 서로 전(傳)하는 것은 바로 왕의 가법(家法)이고, 십잠(十箴)의 경계는 이미 정일(精一)한 뜻에 근본하였다. 학문에 힘쓰라는 당부와 사문(斯文)에 대한 부탁이 간절하게 반복되었으니, 이연(貽燕)의 계책이 그 또한 지극하다 하겠다.

 숙종은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 절약하였고,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흐르듯 하였다. 곤의(袞衣)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침전(寢殿)은 자리가 떨어져도 갈지 않았으며, 위장(췾帳)은 모두 청포(靑布)를 사용하고 아침 저녁의 수랏상 반찬은 몇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근신(近臣)이 먼 지방의 진귀한 물건을 귀중히 여기지 말라고 말하자, 즉시 은서피(銀鼠皮)를 불살라 버리도록 명하였다. 또 대내(大內)로 낙타를 끌고 들어온 것을 간(諫)하는 자가 있자, 밤중에 궁문(宮門)을 열고 내쫓아 보냈고, 간신(諫臣)이 금원(禁苑)에 지은 소각(小閣)이 대로(大路)에 임한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니, 즉시 그날로 헐어버릴 것을 명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10)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숙종의 겸손한 덕(德)은 또 천성(天性)에서 나와 일찍이 성지(聖智)를 스스로 과시하지 않았다. 1713년(숙종 39)에 여러 신하들이 성덕(聖德)에 아름다움을 돌려서,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로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니, 굳이 거절하다가 오랜 뒤에야 마지못해 따랐으나, 속마음으로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왕의 원비(元妃)는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보사공신(保社功臣)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인데, 1680년(숙종 6)에 승하하였다. 계비(繼妃)는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인데, 1701년(숙종 27)에 승하하였다.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숙빈(淑嬪) 최씨(崔氏)는 연잉군(延휰君) 금(昑)을 낳았고, 명빈(?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훤(?)을 낳았는데, 일찍 서거(逝去)하였다. 연잉군은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연령군은 수찬(修撰) 김동필(金東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