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왕 - 민생 안정책 (4)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 삼사(三司)를 부르라고 명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계책을 하문(下問)하였다. 하교하기를,
“<천원옥력(天元玉曆)>의 글은 하늘과 땅, 해와 달, 바람과 구름, 별 등의 재앙과 상서에 대해서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기상(氣象)을 관측하고 점(占)을 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시대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이점이 있으니, 똑같이 운대(雲臺)에 비치(備置)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한 건(件)을 내리니, 혹은 사들여 오고 혹은 잘 베껴 써서 보관해 두라.”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죄수를 소결(疏決)하였으며,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기도하였다. 숙종은 계속되는 재해에 대해 말하기를,
“최복(衰服)을 벗고 임시로 길복(吉服)을 입은 채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기도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조처에서 나온 것인데, 성의(誠意)가 천 박(淺薄)하여 천심(天心)을 돌리지 못하고 대단한 가뭄은 갈수록 심해져 논밭이 텅텅 비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허둥지둥하며 고통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니, 이제 막 직접 기도했다 하여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하고,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남교(南郊)와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하게 하였다. 제문(祭文)은 대제학(大提學)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했는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책망하는 뜻을 각별히 덧붙여 넣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번 가뭄은 옛날에 없던 것이다. 만약 며칠이 더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곡식조차 장차 다 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애타게 근심한 나머지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몰라 구언(求言)의 교지(敎旨)를 내린 지 이미 30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잠잠하게 있을 뿐이다. 진언(進言)을 해도 써 주지 않는다면 군상(君上)의 잘못이지만, 구언을 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책임이 군하(群下)에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내가 기쁘게 받 아들이는 도량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미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고,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내가 함께 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몹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라고 하였듯이 숙종의 백성에 대한 민생의식은 곧바로 구체적인 구휼정책으로 나타났다.
민충단(愍忠壇) 및 전사(戰死)한 사람과, 경신년 · 신유년에 굶어 죽은 사람 등에게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폐문(閉門) · 천시(遷市) 등의 일 또한 즉시 거행하였다. 경기(京畿) · 공홍(公洪) · 강양(江襄) · 황해(黃海) · 함경(咸鏡) 5도(道)의 세태(稅太)의 절반을 제감(除減)해 주고, 여러 도(道)의 춘수미(春收米)를 재실(災實)을 구분하여 차등있게 면 제해 주거나 경감해 주었다.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한 궁방전의 폐단을 낱낱이 성찰하여 즉시 폐지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숙종대왕 - 민생 안정책 (5)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경상감사(慶尙監司) 이담명(李聃命)이 보리 이삭이 두세 갈래 혹은 너댓 갈래로 난 것을 아름다운 상서라 하여 봉진(封進)하니,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삼남(三南)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호조(戶曹)에 바칠 세태(稅太) 1만 2백여 석과, 쌀 9,560여 석, 선혜청(宣惠廳)에 바칠 쌀 3만 4,560여 석을 탕감해 주고, 삼남(三南)에 줄 진곡(賑穀) 10만여 석을 이전(移轉)하여 주었다.
“옛날 우리 선조(宣祖)께서 계사년 · 갑오년 두 해의 흉년 때 어공미(御供米)를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셨다. 지금도 또한 참작해 어공미를 덜어내어 율도(栗島)의 굶주린 백성을 먹이는 물자에 보태게 하라.”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관서(關西)의 굶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1690년에 서흥현(瑞興縣) 일대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니,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관(禮官)을 보내 본현(本縣)의 사단(社壇)과 경내(境內)의 명산(名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혹심한 한해가 있었던 1699년에 숙종은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4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고, 죽을 뻔하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전에 없던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다. 서쪽 변방에서 시작하여 8도(八道)에 두루 번져, 마을에는 온전한 집이 없고 백 명에 한 명 도 치료되지 못했다. 살아남는 백성이 없다면, 나라는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근심스럽고 조급하여 먹어도 쉬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렸으나, 신(神)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신령한 감응은 더욱 까마득하기만 하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으니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 난로(鸞輅)를 타고 봄을 맞이하니, 화창 한 기운이 애연하여 초목과 곤충이 모두 우로(雨露)의 은택에 휩싸여 있는데, 온 동토(東土)의 억만(億萬) 백성들은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져 있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안으로는 경조(京兆)와 밖으로 도(道)를 다스리는 신하들은 각별히 칙유(勅諭)를 더하여 약품을 공급해 구료(救療)하고 시신(屍身)을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라.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내되,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민망하고 측은히 여김을 보여주어 조금이나마 번민하고 원통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 해에 약 25만여명이 병사하고 있다.
1703년에는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여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차출(差出)하고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을 관장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급히 할 만한 것은 급히 하고, 늦게 할 것은 늦게 하여 완급(緩急)에 각기 차례가 있게 하라. 일을 혹시 너무 급히 하면 폐단(弊端)이 생기지 않을 수 없으니, 생각을 두고 게을리하지 않으며 점차 다스려 나간다면 저절로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하였다. 1699년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와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1만 1천여 구(口)의 도고(逃故) 공포(貢布)를 탕척(蕩滌)해 주었다.삼남(三南)에 전염병이 극심하게 번졌으므로 약물을 보내 구료(救療)하라고 명하였다. 여 름에 가뭄이 들자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하고, 감선(減膳)하고 음악을 거두었다.1711년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1717년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에게 하교하여 권농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병으로 앓는 동안에도 오로지 생각은 모두 백성에게 있다. 이 말은 입에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심복(心服)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숙종대왕 - 왕실 위상의 존승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왕실 위상의 존숭
왕은 왕실 스스로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조치로서 종실혈연을 정리하는 선원계 편찬작업으로 선원보를 정리한다. 한편으로 왕실에 충성을 표하였던 역사상에서 표창할 신료를 찾고 신료들의 당색을 조정하였다.
1679년 가을에 왕은 노량진(露梁津)에 나아가 대열(大閱)하고, 강(江)가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묘소(墓所)를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 소위 사육신 묘소를 수리한 것이다. 왕실의 정치력 강화를 위한 조처는 유림의 정치력을 유교 예제의 틀속에서 정돈하는 것이다.
1700년에는 종묘 안에 현종(顯宗)의 배향공신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의논하게 되었다. 하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의 묘정(廟庭)에 대신(大臣)을 배향(配享)하는 일이 없었던 세대가 없었다. 그런데 선왕(先王)의 묘정에만 유독 대신이 없으니, 선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생각컨대 반드시 불만족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인들 마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세종조에 태종(太宗)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셨는데, 남은(南誾) · 조준(趙浚) · 조인옥(趙仁沃)을 태조(太祖)의 묘정에 배향하려고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남은은 국가 자 손 만세(萬世)의 원수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를 빼버렸다가 뒤에 태종의 하교(下敎)로 인해 결국 추배(追配)하였다. 고려(高麗) 시조묘(始祖廟)의 네 신하도 또한 추배하였는데, 그 때 당 태종(唐太宗)의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이 일은 비록 고례(古例)가 없다 하더라도 의리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미 선조(先朝) 때 시행한 성전(成典)이 있고, 또 당 조(唐朝) 고사(古事)의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빈청(賓廳)으로 하여금 권점(圈點)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빈청에서 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로 권점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들이 정태화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 ·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좌명(金佐明)으로 배향을 의정(議政)하였는데,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정태화를 빼버렸다가 이때에 와서 추배하였다. 뒤에 또 대계로 인해 조경을 빼버렸다.
함흥(咸興)에는 본궁(本宮)이 있는데, 이는 바로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서 익조(翼祖) 이하 네 분 대왕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영흥(永興)도 또한 그러했으니, 대개 한(漢)나라 원묘(原廟)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증(追贈)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두 궁(宮)에는 미처 다 봉안하지 못했는데, 왕이 연신(筵臣)의 아뢴 바에 의하여 즉시 거행하라고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려보냈다. 그리고 본관(本官) 본전(本殿)의 참봉(參奉)을 제관(祭官)으로 차정(差定)하고, 별감(別監) 차지(次知)가 제사지내던 관례를 폐지시켰다.
숙종대왕 - 왕실 위상의 존승 (2)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단종(端宗)을 추복(追復)하여 제주(題主)할 때 왕이 장차 친림(親臨)하려고 하니, 부제학(副提學) 조상우(趙相愚)가 전염병이 극심하다며 친히 거둥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청하였다. 왕이 특별히 그를 파직시키고, 정원(政院)의 복역(覆逆)에 답하기를,
“나의 소신(所信)이 사리에 통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왔는데, 무식한 말이 논사(論思)하는 곳에서 나왔으니, 경계하고 꾸짖는 조처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답하기를,
“옛 사람 중에 전염병이 아주 극성을 떨어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데도 혼자 남아서 떠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부로(父老)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능히 감염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주는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국가(國家)의 막대 막중한 의례(儀禮)에 당면하여 전염병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이에,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개 필부(匹夫)의 소신보다도 못한 것이다. 조상우는 도리어 아녀자나 하는 짓을 본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리에 통한 군자(君子)가 조용히 살펴본다면 반드시 나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대신(大臣)이
“문종조(文宗朝)의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는 단종(端宗)의 상복(喪服)을 입고, 제수(除授)하는 명령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충의(忠義)가 육신(六臣)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아뢰니, 특별히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시습(金時習)의 절의(節義)는 지금의 백이(伯夷)입니다.”
하니, 즉시 증직(贈職)하고 제사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1701년(숙종 27) 하교하기를,
“지금 내가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世子)를 위해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즐거이 하겠는가?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세자의 정사(情事)를 내가 어찌 염려하지 않겠으며, 여러 신하들의 세자를 위한 간곡한 정성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처분을 버리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에 나의 뜻으로 좌우(左右)에 유시(諭示)한다.” 하였다.
선계(璿系)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왕실에 대한 선대(先代)의 충성의 역사를 정리 복원한 일련의 작업은 막강하였던 사림당색의 정치력을 조절하고자 하였던 숙종의 정치적 의지라고 하겠다. 그 결과 1700년 <선원보략(璿源譜略)>이 편찬된다.
숙종대왕 - 왕실 위상의 존승 (3)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역사책에서 읽은 교훈의 내용을 병풍으로 만들어 항시 자성의 표지로 삼고 있음을 행장은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옛날 태종조(太宗朝)에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일을 벽(壁) 위에 그려 놓을 것을 명하였고, 성종(成宗)은 역대(歷代)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고 경계로 삼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병장(屛障)에 그리도록 명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 저녁으로 관람(觀覽)하여 권선 징악에 대비(對備)하려고 하였던 것이니, 어찌 자손이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나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선(善)으로 제요(帝堯)가 어진이를 신임하여 선치를 도모한 것과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칙명한 것과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방울을 매달아 놓고 간언(諫言)을 구한 것과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것과, 중종(中宗)이 덕으로 상상(祥桑)을 없앤 것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 것과,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계칙을 받은 것과, 선왕(宣王)이 간언(諫言)에 감동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을 뽑아서 8폭(八幅) 병풍을 모사(摹寫)해서 만들고, 또 경계할 만한 악(惡)으로 태강(太康)이 사냥하며 즐기다가 덕망을 잃은 것과,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시리(市里)에 미행(微行)한 것과, 애제(哀帝)가 아첨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어진이를 죽인 것과, 영제(靈帝)가 서저(西邸)에서 관직을 판매한 것과,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양거(羊車)를 타고 잔치에서 노닌 것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재물을 긁어모아 사치한 것과, 의종(懿宗)이 성내어 간하는 신하를 유배시킨 것과,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간적(奸賊)을 임용(任用)한 것 등을 뽑아서 또한 8폭 병풍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놓아 두고 성찰(省察)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주문(主文)의 신하에게 각각 율시(律詩)를 지어 병풍 머리에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 말년 여러 해동안 편치 않았는데 눈병과 다리의 마비 등의 증상으로 가장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장차 온천(溫泉)에 목욕하려고 호서(湖西)의 수신(守臣)에게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묻고 행재(行在)에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온천에 거둥하여 경기(京畿) · 호남(湖南) 두 도(道)의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 사족(士族)과 일반백성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감사(監司)와 차원(差員) · 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물었다.
1719년에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왕의 춘추가 예순이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이명(李쳶命)이 아뢰기를,
“태조대왕(太祖大王)의 향년(享年)이 일흔을 넘긴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인데,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은 없으나,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와 김육(金堉)이 찬(撰)한 서문(序文)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모두 그 일을 기록하고 있고, 또 본소(本所) 서루 (西樓)의 제명(題名)한 곳에 사롱(紗籠)을 설치하여 봉안(奉安)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이번에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여 청한 일은 이미 고사(故事)에 근거하고 있고, 왕세자(王世子)의 희구(喜懼)하는 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아 쉰을 스스로 기약할 수 없었는데, 이미 쉰을 넘었으 니, 항상 `태조께서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으니, 나도 만약 그 나이가 되어 성조(聖祖) 아래에 제명(題名)한다면 또한 거룩한 일이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세자(世子)가 이 일을 누차 청하니, 내가 그 희구하는 정을 생각하여 이에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에 기로소에 영수각(靈壽閣)을 세워서 어첩(御牒)을 봉안(奉安)하였다.
숙종대왕 - 왕실 위상의 존승 (4)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숙종 즉위초부터 예설에 근거한 첨예한 당쟁은 재위년간 3차례나 정국의 전환을 있게 한 당쟁의 심화기로 이해되고 있다.
인선왕후(장대비)의 복제설로 서인이 타격을 받고 남인이 진출한 것은 갑인년(1674) 7월이고 8월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14세인 숙종은 허목을 대사헌으로 하고 윤휴를 장령으로 하여 송시열을 덕원으로 귀양보낸다. 남인의 세가 조정을 지배한 것이다.
1680년(경신년) 숙종이 남인의 세력에 염증이 있을 때 복선군(福善君) 남(쨲)과 남인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을 고발(告發)하니, 자백을 받아 허견이 처형되었다. 허적과 유혁연이 차례대로 처형되었다. 또 이원성(李元成)이 추가로 고발한 것으로 인해 흉얼(凶孼) 중에서 법망(法網)을 빠져 나갔던 오정창 · 최만열(崔晩悅) · 정원로 등이 복법(伏法)되었다. 책훈 (策勳)하여 김석주(金錫胄) · 김만기(金萬基) 등에게 보사 공신(保社功臣)의 칭호(稱號)를 하사하였다. 이때는 왕의 후계가 미정된 상황이었다.
처음에 빈신 오시수(吳始壽)가 통관(通官)의 거짓 공갈로 인해 거기에 구어(口語)를 더 보탰는데, 말이 선조(先朝)를 침범했다.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수상(首相)에게 명해 통관(通官)의 말이 나온 곳을 힐문하도록 하자, 빈신이 빙자해 환혹(幻惑)시킨 단서가 모두 폭로되었다. 또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이 리정(李楨) · 리연(李?)이 궁인(宮人)과 교란(交亂)한 정상을 소론(疏論)하니, 흉당(凶黨)이 급히 구대(求對)하여 캐물으며 반좌(反坐)하려고까지 하였다. 명성왕후는 대신(大臣)을 발[簾] 앞으로 불 러서 엄하면서 절사하게 타이르니 유사(有司)가 비로소 정 · 연의 죄상을 신문하였으나, 반드시 동조(東朝)를 동요시켜 간계(奸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윤휴(尹?)가 이에,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한다.”
는 말을 경연에서 공공연히 말하니, 나라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왕이 오시수와 윤휴를 죄주고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서인의 정권이 조정에 다시 등장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인 것이다.
서인 정국하에서 노소론의 대결이 진행되는 가운데 무진년 숙원 장씨가 왕자를 낳고 이듬해 기사년 왕은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장희빈이 경신옥에서 귀양간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였으므로 서인들이 못마땅하게 여겨 왕에게 추방을 상소하자 노소론 모두 왕의 미움을 샀다. 이 때 원자의 책봉을 비판한 송시열의 상소가 결정적인 사단이 되어 송시열은 삭탈관직 문외출송하고 영상 김수흥도 파직하고 이이 ·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한다. 이어 남인을 좌우상 및 승정원과 삼사에 모두 제수하여 정국을 남인에게 넘기고 있다. 이른바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장희빈을 남인의 편으로, 민비는 서인편으로 갈라서 인식하고 5월 민비를 폐출하면서 서인을 형벌하고 6월 송시열 또한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민비가 폐출되고 서인이 화를 당하자 김춘택등이 은화를 모아 민비의 복위를 모색하게 된다. 이를 고발하는 사람이 있어 다음날 행형을 앞두고 숙종은 남인 대신을 삭관 귀양 극형으로 정국을 전환시키고 있다. 물론 다시 서인 노론과 소론의 정국이 된 것이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하룻밤 사이 사태가 급변하여 죄인을 다스리던 자가 죄인이 되고 자복한 죄인들이 도리어 무죄로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춘택(金春澤)은 숙종의 전비 김씨의 종손이다.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요 김진구(金鎭龜)의 아들이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이 김씨의 집과 친밀한 때문에 이 환국에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하여 숙빈(淑嬪) 최씨(崔氏)와 연락을 취하여 남인의 나쁜 것을 숙종에게 알리어 이번의 환국이 이루어 졌다\' 하였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어머니로서 기사환국(장희빈이 왕비가 된 해) 후에 숙종의 사랑을 받았는데 장씨에게 모진 질투를 당하여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 다.
숙종대왕 - 왕실 위상의 존승 (5)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1689년(숙종 15)에 쫓겨나갔던 남구만(南九萬)을 이때에 다시 불러 영의정(領議政)을 삼고 노론(老論) · 소론(少論)이 모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이미 죽은 송시열(宋時烈) · 김수항(金壽恒) · 김석주(金錫胄) 등에게 관작(官爵)을 추복(追復)하였다. 기사년에 서인(西人)과 함께 폐출되었던 민씨(閔氏)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고 왕비 장씨(張氏)는 다시 희빈으로 강봉(降封)되었다.
민비복위(閔妃復位)로 다시 집권한 서인들은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게 되었다. 그 쟁점의 하나는 은화를 사용하여 민비복위를 비밀히 도모한 김춘택 · 한중혁 등을 치죄하느냐 아니하느냐에 관한 문제이고 또 하나는 장희빈을 아주 역적으로 몰아 준엄히 처단하여 버리느냐 세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장빈(張嬪)에게 관대히 할 것인가 여부였다. 이것은 후일 경종(景宗)에게 충한다는 파와 영조에게 충한다는 파로 분립되어 참혹한 살육을 예견케 한 당쟁의 내용이 되었다.
이같은 정국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왕은 탕평을 위해 하교하기를
, “국가(國家)가 불행하여 동인(東人) · 서인(西人)을 표방한 이래 백 년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고질이 되고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門閥)을 숭상하여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협소하다. 그런데 한쪽이 진출하면 한쪽은 물러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대부분 막혀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그 근원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실은 내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 로 위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하여 이렇게 된 것이므로, 내가 나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제 바야흐로 따스한 봄이 돌아와 화기(和氣)가 애연(촩然)하니, 시절과 함께 모두 새로와질 때가 어찌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그대들 여러 신하들은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 하던 것처럼 하지 말고 함께 나라를 다스려 나갈 계책에 힘쓰도록 하라.”
는 왕의 의지를 밝히고 있음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경종대왕 - 생애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생애
숙종(肅宗)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현종(顯宗)조에 이어 예송논쟁(禮訟論爭)이 계속되어 전국의 유생들 역시 여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 경종대왕(이하 경종이라 함)이 태어나자 그를 원자(元子)로 확정하는 문제로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나고, 중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중전에 오르는 등 조정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1694년(숙종 20)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면서 남인이 축출되고 중전인 장씨가 다시 빈으로 강등되며, 폐비 민씨가 복위된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면서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게 된다.
이처럼 전국이 당쟁에 휩싸여 소란스러운 가운데 희빈 장씨 소생의 경종, 숙빈 최씨 소생의 영조(英祖)를 둘러싸고 왕위계승 갈등과 당권의 장악이라는 문제를 놓고 조정이 양분된 상황에서 경종은 즉위하였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윤(?)이고 자(字)는 휘서(輝瑞)이다.
숙종은 28세가 되도록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종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며 여러 대신들에게,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못해 인심(人心)이 모일 곳이 없었더니 오늘의 큰 계책이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며 1689년(숙종 15) 정월 15일 태어난 지 석달여 된 아기씨를 원자로 정하였다. 이 때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좀더 기다려 적자를 원자로 삼을 것을 서인(西人)측에서 간했지만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인의 노론을 대거 유배하고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였다. 1690년(숙종 16) 10월 3세의 경종은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이 때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생모인 희빈 장씨가 왕비에 올라 경종은 자연스럽게 적장자(嫡長子)가 되어 세자로서의 정통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4세 때인 1691년(숙종 17)에 처음으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숙종은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주며 학문에 힘쓰도록 하였다. 1695년(숙종 21) 8살의 나이로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는데 몸가짐이 절도가 있었고,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아서 듣는 이들이 모두 크게 기뻐했다. 같은 해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이어 <효경(孝經)> · <소학(小學)> ·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여러 책을 강하였다.
경종대왕 - 생애 (2)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한번은 강관(講官)과 사부(師傅) 등이 왕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기를 청하자 `효제충신(孝悌忠信) · 예의염치(禮義廉恥) · 경이직내(敬以直內) ·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열 여섯 글자를 써 보였는데 필세(筆勢)가 힘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워 신하들이 서로 돌려가며 완상(翫賞)하였고, 이로부터 학문이 더욱 발전하였다. 서연(書筵)에 나아가서는 의심나는 것은 모두 질문하였는데, 질문에 남다른 점이 많았다.
“상(商)나라의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쳤을 때 끝내 과오(過誤)를 고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였을 것인가?”
를 물었고, 또
“서문(序文)에 이른 `사람의 명(名)자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한 명(名)자는 무슨 뜻인가?”
를 물었다. 또
“한(漢)나라 때 사단(史丹)이 청포(靑蒲)에 엎드린 것이 왕씨(王氏)의 화(禍)에 기틀이 되었고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 물러났는데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사단이 소광과 소수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라고 물었다. 이처럼 학문이 날로 발전되어 가니 모두 하늘이 내린 분이라 따를 수 없다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강관(講官)이 일찍이
“<맹자(孟子)> 일곱편[七篇] 중에 어느 부분에 더욱 착력 (着力)하십니까?”
하고 묻자,
“양혜왕장(梁惠王章)에서부터 진심장(盡心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지 않음이 없는데, 어찌 어느 한 부분을 끌어내어 더욱 착력을 한다고 하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또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기약하십니까?”
하고 묻자,
“능히 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곧 원하는 바는 순(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신을 직접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인현왕후를 섬김에 있어 자애(慈愛)와 효도(孝道)에 빈틈이 없었다. 1701년(숙종 27) 8월 왕후의 병환이 위급하여지자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가까운 친척으로 입시(入侍)하였는데, 왕후께서 유언을 남길 때 민진후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으나 경종은 유독 슬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경종은 문을 나와서는 갑자기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왕후가 승하(昇遐)하는 날에는 인현왕후를 붙잡고 울었으며, 가슴을 치며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발인(發靷)할 때에는 상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길에서 바라보며 애통해 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신주(神主)를 모시고 올 때에는 멀리 교외(郊外)까지 나아가 맞이하고 궁중(宮中)에 이르도록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같은 해 10월 생모인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 하여 역시 죽임을 당한다. 연이은 상(喪)과 그에 따른 옥사가 이어지자 14세의 어린 나이의 경종은 괴로움을 쉽게 이겨낼 수 없었다. 세자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희빈 장씨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숙종 역시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延휰君 : 영조)에 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보존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이 때부터 경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경종대왕 - 생애 (3)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1705년(숙종 31)에는 숙종이 즉위한지 30년이 지났다 하여 세 번이나 상소(上疏)하여
“전의 역사(歷史)에 의거(依據)할 만한 문헌이 있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꼭 행하여야 할 예(禮)입니다.”
라 하며 존호를 올리고 이를 축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숙종은
“소장의 말이 비록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에서 나왔으나, 다만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안락을 즐기는 큰 일을 일으키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숙종은 몸이 불편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해 10월에 장차 경종에게 전위(傳位)하려 하자, 경종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숙종이 명을 거두어들이지 않자 세자궁(世子宮)의 신하들을 불러
“밤새도록 울면서 청하였으나 끝내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오직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절히 진달(陳達)함이 있을 뿐이다.”
하며 추운 날씨에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장과 장막을 제거하라고 명하니, 그제야 숙종은
“너의 정사(情事)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마침내 전위의 명을 거두어 들였다.
1716년(숙종 42) 숙종은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 다음 해에는 세자가 병약한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좌의정이던 노론의 이이명(李쳶命)에게 숙빈 최씨(淑嬪崔氏) 소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한다. 이어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할 것을 명한다. 이에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 측은 세자를 바꾸려 한다며 강하게 반대하였고, 이로부터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1717년(숙종 43) 숙종의 병환이 크게 위독해지자 세자인 경종은 크게 걱정하며 묘사(廟社)와 산천(山川)에 기도하도록 명하였고, 숙종이 죽어 예관(禮官)이 사위(嗣位)의 절목(節目)을 올리자 답하기를,
“하늘이 무너진 망극(罔極)한 속에서 인자(人子)의 정리에 어찌 차마 이를 하리오.”
하며 거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연이어 간하였지만 계속 거절하다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모두 숙종에게 품한 뒤 행하며 결코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봄에는 팔도(八道)에 유시(諭示)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였고, 백성들 중에 굶주리는 자에게는 진대(賑貸)해 주도록 하였으며, 일정한 주거가 없이 방랑하는 백성들에게는 생필품 등을 보조하여 원래의 마을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병을 앓는 자에게는 양식과 약품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고, 병으로 죽은 자가 있으면 곧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였다. 백성들 중 의술을 알아 목숨을 구하거나, 개인의 재산을 들여 길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 준 사람이 있으면 계문(啓聞)하여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또 어버이가 모두 병으로 죽고 아이들만 남았을 경우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마을에 수재(水災)와 화재(火災)를 만난 사람이 있으면 부역(負役)을 덜어주고 꾸어준 곡식의 상환을 연장해 주며, 곡식을 주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화재로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경우 및 호랑이 등에게 화를 입어 죽은 사람들에게도 구휼(救恤)하여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서(關西) 지방이 메뚜기로 인해 농사를 망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향(香)을 내려 공경히 빌도록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