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대왕 - 생애 (4)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감사(監司)가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때면 반드시 직접 대면하여 인사(人事)를 엄정하고 분명히 하도록 권하였으며, 이조와 병조에 여러 번 명하여 수령의 간택을 신중히 하도록 하였다. 날씨가 특별히 춥거나 더우면 신하들을 보내 옥에 갇힌 죄수를 살펴보게 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방면시켰다. 한번은 궁궐의 담장이 비에 허물어져 백성들 중 함부로 궁궐에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이는 법에 의하여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하는데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는 이유로 용서해 주었다. 또 형조의 한 관리가 술김에 서계(書啓)를 찢고 파괴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모두들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사람에겐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라며 특별히 사형을 감해 주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경종이 백성을 사랑으로 대하고, 항상 백성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 한 결과인 것이다.
신하들을 예로써 대우하였고, 종친은 은혜로써 대접하였다. 대신이 죽으면 반드시 곡(哭)하였고, 신하들의 상사(喪事)에도 역시 관가(官家)에서 상장(喪葬)을 갖추어 돕도록 하고 아울러 3년상을 마칠 때까지 녹(祿)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한번은 60세 이상의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려 하였는데 영의정의 장사를 아직 지내지 않았다고 아뢰자 즉시 정지하였 다. 1719년(숙종 45) 10월 이복 동생인 연령군(延齡君)이 일찍 죽자,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막막하게 소리가 없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이 났는데 공연히 의형(儀形)만을 생각하네. 세월이 흐르는 물 같아 산으로 떠날 기약만 있구나. 금양(衿陽)으로 가는 것은 하룻밤 뿐인데 저 달빛은 천추(千秋)토록 비치겠지.”
라는 제문을 손수 지어 간절한 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항상 종묘를 배알(拜謁)하였는데 비나 눈이 와도 폐하지 않았으며, 조묘(?廟)는 태묘(太廟) 뒤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꼭 걸어서 갔으며, 신하들이 소여(小輿)를 타도록 청하여도 허락지 않으며
“엄숙하고 공경히 해야 할 자리에 감히 스스로 편리함을 취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숙종이 몸이 불편했던 십수 년 동안 경종은 약 시중을 들며 숙종의 병을 간호하였다. 숙종이 온천(溫泉)에 가게 되었을 때에는 경종에게 도성(都城)에 머물러 국사(國事)를 돌보게 하였는데, 예를 갖추어 전송하고 모습이 멀어졌는데도 여전히 해가 지도록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며 걱정하는 빛을 감추질 못하였다.
1724년(경종 4) 8월 25일에 경종은 즉위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아 창경궁(昌慶宮) 별전에서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724년 9월 3일 시호(諡號)를 `덕문 익무 순인 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로, 묘호(廟號)를 `경종(景宗)\'으로 하였다. 전호(殿號)는 `경사(敬思)\'로 하였다가 다시 경소(敬昭)로 고쳤고, 능호(陵號)는 `의릉(懿陵)\'이다.
경종에겐 2명의 비가 있었는데, 몸이 약해 후사는 얻지 못하였다. 첫 번째 비는 단의왕후(端懿王后)이다. 단의왕후는 1686년(숙종 12) 5월 21일 회현동(會賢洞) 우사(寓舍)에서 우의정에 증직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와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의젓하면서도 유순하였으며, 첫돌이 지나기 전에 능히 말을 하였다고 한다. 놀이를 하더라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고 섬돌 아래로 내려와 마당을 밟는 일이 없었다. 3세에 할머니를 공양하는데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였다. 말은 항상 단정하고 조심스럽게 하였다. 물건을 처음 보면 희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어른에게 먼저 바쳤다.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어른이 먹으라고 명하지 아니하면 멋대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가 계신 곳에서부터 증조모가 계신 곳과 할머님이 계신 곳까지 문안하였다. 5세 때에는 관찰사가 여름에 술에 취하여 자면서 그로 하여금 부채를 잡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명령을 따라 저녁이 되도록 곁을 떠나지 않으니, 관찰사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家人)들에게 이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고 호화로운 옷을 입는 것을 보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또 좋은 것을 얻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 이 없었다.
경종대왕 - 생애 (5)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1696년(숙종 22) 11세의 나이로 간택(揀擇)에 참여하였는데, 집에 돌아간 후 손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 여러 사람들에게 먹였다. 두 번째 간택하던 때에는 종일토록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였다. 그때 마침 본집을 피하여 떠나게 됨에 사묘(私廟)에 하직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부모에게 청하여 사묘에 가서 하직하려 하였다. 하지만 집안이 부정(不淨)하였기 때문에 끝내 소원대로 할 수가 없었다. 별궁(別宮)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자 하루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양을 짓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을 청하여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 혼인하는 날 갑자기 배가 아파 모두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자 “어찌 제 병 때문에 대례(大禮)를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태연히 혼인을 치렀다. 혼례가 파하자 복통의 증세가 여전하였지만 대전과 중궁 양전(兩殿)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조금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1701년(숙종 27) 병이 위독했는데, 병이 조금 나아지자 인현왕후의 장례 때 병 때문에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해 하였다. 1714년(숙종 40) 숙종의 병이 위독하여 모두가 황급해 했을 적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밤낮으로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원했다. 1718년(숙종 44) 33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1720년 단의왕후에 추봉되었으며, 전호를 `영휘(永徽)\'라 하였다. 이어 1726년(영조 2) 다시 `공효 정목\'(恭孝定穆)의 휘호를 받았으며, 능은 혜릉(惠陵)이다.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는 1705년(숙종 31)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와 이하번(李夏蕃)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법도에 맞았으며, 말수가 적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늘 해진 옷을 입고 지냈으며, 성품이 효성스럽고 순하였다. 1712년(숙종 38) 7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슬 퍼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 속에 자랐지만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단의왕후가 죽자 숙종께서 경종을 위하여 명가(名家)의 현숙(賢淑)한 이를 간택케 하였다. 간택 때 선의왕후는 14세에 불과하였는데 폭풍우 속에서도 엄숙하게 앉아 조금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았다. 숙종이 이를 보고 기특하게 생각하여 세자빈으로 결정하 게 되며, 9월 16일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왕후에 올랐고, 1722년(경종 2) 가을 왕비에 책봉(冊封)되었다. 1724년 경종이 승하한 후 항상 경종이 돌아가신 달을 당하면 그 달 초하루부터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평일에 즐기던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경종의 상이 끝난 후인 1726년(영조 2) 2월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에 올랐다가, 1730년 (영조 6) 6월 29일 26세의 나이로 어조당(魚藻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학을 좋아하여 별궁(別宮)에 있을 때에 <소학>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는데, 쉽게 외웠다고 한다. 숙종은 늘 책을 읽게 한 뒤에 읽는 소리를 듣고 음운(音韻)이 맑고 명랑(明朗)한 것을 자주 칭찬하였다. 또 평소에 옛날 현비(賢妃)들의 가언미행(嘉言美行)을 즐겨 읽어서 아버지에게 <효경(孝經)> · <예기(禮記)> · <서경(書經)> · <시경(詩經)> 중에 본받을 만한 글을 골라 베껴 오게 하여 항상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읽었다.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한 성격이었으며, 경종이 몸이 약한 탓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죽은 후 경종과 함께 의릉(懿陵)에 묻혔다.
경종대왕 - 시대상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시대상
경종은 왕위에 오르자 일을 처리함에 있어 숙종이 지켜보며 대리(代理)할 때와 같이 열심히 하였다. 백성 중에도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봉양하게 하고 벼슬을 주도록 하였다.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묘소에 의물(儀物)의 결함이 있으면 신하들에게 명하여 개수(改修)케 하였고, 신라 왕묘에 사전(祀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니 그 후손에게 벼슬을 주어 받들도록 하였다. 양녀(良女)를 뽑아 궁인(宮人)에 충당하는 영(令)을 정지하도록 하였고, 공물(貢物)을 바칠 때 본래 부과된 이외의 물품을 걷어들이는 폐단을 혁파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기내(畿內)와 호서(湖西) 지방에 재해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특별히 세금을 감해 주었고, 서읍(西邑)이 황폐해 졌을 때에는 3년 동안 전세(田稅)를 감면 해 주었다.
가뭄이 계속될 때에는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풍악을 정지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을 피하였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소여(小輿)를 타고 친히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기도하였는데, 햇볕이 너무 뜨거워 신하들이 상승(常乘)을 쓰도록 청하나 듣지 않고 밖에서 계속 기도하였다. 돌아와서도 전전(前殿)에 앉아 밤늦도록 자신이 혹 백성들에게 잘못한 점이 있 는지를 반성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비가 오지 않자
“가뭄의 기운이 매우 심하니 이 마음이 타고 지지는 것 같다. 날을 가리지 말고 다시 교단(郊壇)에 나아가 비를 빌도록 하라.”
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그만두기를 계속 간하였지만 듣지 않다가 비가 내린 뒤에야 그만두었다.
신하들의 의견에는 모두 귀기울였다. 그러나 사리에 합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가까운 종친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분수와 한계를 넘으면 반드시 배척해 끊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백성에게 가렴주구하는 풍습을 개혁하였고, 관사(官司) · 도로의 요소 등지에 상점을 설치하고 차인(差人)을 두어 사사로이 교역하는 것도 일체 혁파하였다. 그리고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중하게 여겨 훌륭한 선비를 포상하였으며, 공경(公卿) · 재상(宰相) · 시종(侍從)과 제로(諸路)의 사신(使臣)에게 명하여 인재를 천거해 올리도록 하였다.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겼거나 백성들의 역사(役事)가 번거롭고 과중할 경우에는 신하들로 하여금 참작하여 고치고 바로잡으려 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 7월 용인 유생(儒生)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경종의 생모(生母)인의 명호(名號)를 높일 것을 진청(陳請)하였다. 이는 장희빈이 인현왕후 시해죄로 사사(賜死)되어 희빈 작호가 삭탈되었지만 아들인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니 `모이자귀(母以子貴)\'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거론하면서 희빈의 작호를 빨리 회복시켜 국가의 체모(體貌)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아들이 왕위에 있는데 그 생모에게 작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노론 측의 언관(言官)인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 등은
“장 희빈에 대한 거조(擧措)는 선대왕(先大王 : 숙종)께서 이미 엄중히 결정을 내린 일이니 지금에 와서 신자(臣子)들이 어찌 감히 무망(誣妄)한 말로써 함부로 발언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간흉(奸凶)의 무리는 당연히 엄중 처벌해야 합니다.”
라고 계청(啓請)한다. 경종은 조중우 등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아직 자신의 세력보다는 노론의 입김이 더 강하였으므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조중우에게 사형을 내리고 연루자인 박경수(朴景洙) 등은 귀양을 보내었다.
경종대왕 - 시대상 (2)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성균관 유생(儒生) 윤지술(尹志述)은 글을 올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이 지은 숙종의 묘지문에 희빈이 인현왕후 시해죄로 처단된 사실을 명백히 기재하지 않은 것을 들추어 공박하였다. 이것은 분명 경종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에 대해 소론에서는 윤지술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고, 경종 역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론에서 윤지술을 비호(飛護)하였다. 이처럼 노론과 소론이 사사건건 대립하니 경종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오히려 신하들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8월에는 정언(正言) 이정소(李廷핈)가 세자를 세울 것을 주청한다. 이 때 경종은 나이가 이미 34세인데도 자녀가 없기 때문에 후계자를 미리 선정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종이 대신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빈청(賓廳)에 나와서 시 · 원임(時 · 原任) 대신, 육조(六曹) · 삼사(三司) 장 관(長官) 등을 불러 회의를 열 것을 청했다. 하지만 이조판서 최석항(崔錫恒) 이하의 소론들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저녁 김창집 · 이건명 · 판중추 조태채(趙泰采),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등 노론 10여 인이 함께 시민당(時敏堂)으로 경종을 찾아와 세자를 세울 것을 강력히 권하니, 경종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은 경종에게
“왕대비(王大妃) 김씨(金氏)의 수필(手筆)을 받아 이를 봉행(奉行)하겠습니다.”
고 아뢰고는, 합문(閤文) 밖에서 기다려 새벽녘에 경종을 낙선당(樂善堂)에서 뵙고 봉서(封書) 2통을 받아 뜯어보게 된다. 한 통은 경종의 친필해서(親筆楷書)로서 `연잉군\'을 썼고, 하나는 김대비(金大妃)의 언찰(諺札) 교지로서
“효종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과 선대왕(先大王 : 숙종)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主上)과 연잉군만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나의 의사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교지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이건명이 사관(史官)을 시켜 해자(楷字)로써 언문 교지를 고쳐 쓰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경종 앞에서 직접
“연잉군 금(昑)으로써 저사(儲嗣)를 삼는다.”
라는 전지(傳旨)를 썼다. 그리하여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게 된다.
이에 대해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류봉휘(柳鳳輝)가 이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소(疏)를 올린다. 그 내용은 첫째, 세자를 세우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일인데도 현직 대신 및 전임(前任) 재상과 상의도 없이 서둘러 결정한 것, 둘째, 주상의 나이가 아직 젊고 중전이 15세가 지났으니 자녀의 탄생을 조금 기다려야 할 것이며, 셋째, 이 일의 결정에 있어 주상의 교지 (敎旨)는 청하지 않고서 왕대비(王大妃)의 수필(手筆)을 얻어 선지(宣旨)를 했으니 이것은 왕권의 침범이므로 죄를 바로잡아 백성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류봉휘의 상소를 보고, 김창집 · 이건명 이하의 노론들은 류봉휘가 국본을 동요시키려는 뜻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극형에 처하기를 주청(奏請)하니,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는 차자(箚子)를 올려,
“나라에 처분이 이미 결정된 후에 류봉휘가 이런 말을 올린 것은 유망 (謬妄)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마는, 그 마음만은 나라를 위하는 적성(赤誠)일 뿐이지 결단코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설사 류봉휘의 말이 광망(狂妄)할지라도 엄형(嚴刑)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결정났으므로 경종은 자신을 위해 상소를 올린 류봉휘를 귀양보낼 수밖에 없었다.
경종대왕 - 시대상 (3)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연잉군을 후계자로 정한 지 2개월 뒤인 10월 노론에서는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을 시켜 왕세제(王世弟)에게 국정(國政)을 참청(參聽)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상소(上疏)하게 했다. 이는 이전까지 없었던 이례적인 일로, 자신에게 왕위를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하지만 경종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종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신병이 있어 정무를 청단(聽斷)하기가 피로하니 모든 국사는 다 왕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케 한다.”고 허락하였다.
이 때 소론인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은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대궐로 들어가 경종에게
“주상께서는 한창 젊으신 나이로 뚜렷이 나타난 병환이 없는데도 이러한 거조(擧措)를 하시니, 신(臣) 등은 우황(憂惶) 망극(罔極)할 뿐입니다. 곧 세제(世弟) 청정(聽政)의 명령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고는 간절히 만류하였다. 이같은 소론의 반발에 힘입어 경종은 대 리청정의 명을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언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같은 해 12월 김일경(金一鏡) · 박필몽(朴弼夢) · 이진유(李眞儒) · 윤성시(尹聖時) · 정해(鄭楷) · 서종하(徐宗廈) 등 7인이 김창집 · 이건명 · 이이명 · 조태채의 사흉(四凶)이 왕권교체를 기도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이러한 김일경 등의 상소를 받자 경종은 곧 상소에 서명(署名)한 박필몽을 지평으로, 이명의(李明誼)는 헌납으로, 이진유는 정언으로, 김일경은 참판으로 특별 제수하고, 노론의 예조판서 이의현(李宜顯),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등의 중신(重臣)을 개체(改遞)시키고, 소론의 최석항(崔錫恒)을 병조판서로, 이광좌(李光佐)를 예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잇달아 비망기를 내려 지난해 숙종 묘지문의 개찬문제(改撰問題)를 거론하여 경종을 모욕했던 윤지술을 극형에 처하도록 하고,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린 김창집을 거제부(巨濟府)에, 이이명을 남해현(南海縣)에, 조태채를 진도군(珍島郡)에 위리안 치시켰다.
이어 1722년(경종 2) 3월에는 노론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하였다는 `목호룡(睦虎龍) 고변사건(告變事件)\'이 일어난다. 목호룡은 그전에는 김용택(金龍澤) · 이천택(李天澤) · 이희지(李喜之) 등과함께 노론의 모의(謀議)에 참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론이 정국을 운영해 나가자, 소론에게 붙어 역변(逆變)을 고발한 것이었다. 고변의 내용은 1720년(숙종 46) 숙종이 승하할 때부터 세 가지 방법을 통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첫째, 용사(勇士)를 시켜 칼을 가지고 궁중에 들어가서 왕을 시해하는 `대급수\'(大急手), 둘째, 환약을 궁녀에게 주어 음식물에 타서 왕을 독시(毒弑)하는 `소급수\'(小急手), 셋째, 선왕(先王)의 전교를 위조하여 왕을 폐출시키는 `평지수\'(平地手)였다. 이 고변서가 들어가자, 경종은 곧 국청(鞫廳)을 열어 이 사건에 관련된 정인중(鄭麟重) · 김용택 · 이기지(李器之) · 이희지 · 이천기(李天紀) · 심상길(沈尙吉) · 김성행(金省行) 등을 모두 처형시켰다.
경종대왕 - 시대상 (4)
제 20대조 이름(한글):경종대왕 이름(한자):景宗大王
이처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하자 경종은 이를 걱정하여
“붕당(朋黨)의 고질적인 화근(禍根)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한 집안 사이에도 방패와 창으로 서로 침해하니, 인정(人情)과 지기(志氣)의 막힘이 어찌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경(卿) 등은 모두 대대로 녹(祿)을 받아 온 신하로서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하는데, 이 판탕(板蕩)한 때를 만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왕실(王室)을 협보(夾輔)해서 조종(祖宗)의 오르내리는 영령(英靈)을 위로한다면 그대 할아버지 그대 선조가 반드시 기쁨을 이룰 것이니, 어찌 모두 그 복을 받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는 경종이 당시의 정치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종은 당쟁의 폐단을 정확히 진단하고 이를 근절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경종으로서는 어느 한 당을 선택해야만 했다. 노론에서 연잉군과 밀착하여 자신을 왕위에서 밀어내려 하니, 경종은 자신을 옹호하는 소론에게 더욱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종은 당쟁의 피해자이면서도 당쟁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종은 평상시 말과 웃음이 적어 사람들이 왕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매사에 엄격하여 옆에서 모시는 이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경우 언사에 용서함이 없어서 모두 공경하여 겁내며 두려워하였다. 가까운 종친에게도 사사로운 은택(恩澤)이 있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병환 중에 있을 때 신하들이 침소에 들어가 병 문안을 하였을 때 보니, 병풍과 장막이 모두 질박하고 검소하며 옷과 이불은 비단이 아니었으며 곤복(袞服)은 여벌이 없었다. 이는 바로 경종이 사치를 싫어하고 소박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경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변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었다. 이는 모두 자신과 자신의 생모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자연히 의기소침해지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종은 생모 때문인지 몰라도 몸이 약해 후사가 없었다. 이는 그에게 있어 큰 약점이었다. 이로 인해 노론과 연잉군에게 왕위계승에 대한 빌미를 주었다. 경종이 어머니의 문제나, 후사가 없는 것으로 인해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있을 때, 연잉군은 점점 그의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모든 일이 연잉군과 비교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경종은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경종은 붕당정치를 근절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 는데, 이는 약화된 군주권을 확립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경종의 노력은 짧은 재위기간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미 당쟁은 현종 대를 넘어서면서 절정에 달했고, 왕권은 그에 비해 약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국속에서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은 붕당을 조정하는 능력이나 아예 당색을 가리지 않고 정사를 돌보는 것이었다. 경종은 그 시행을 위해 노력한 군주였던 것이다.
영조대왕 - 생애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생애
영조대왕(이하 영조로 함)은 조선왕조에 있어서 재위기간(1724∼1776)이 가장 오랜 왕이다. 그의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다. 숙종대왕(肅宗大王)의 넷째 아들로 숙빈(淑嬪) 최씨(崔氏)와의 사이에서 숙종 20년 9월 13일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영조가 태어나기 사흘 전에 홍광(紅光)이 동방에 뻗고 백기(白氣)가 그 위를 덮었다. 이날 밤 궁인(宮人)이 꿈에 흰 용(龍)이 보경당(寶慶堂)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보경당은 바로 영조가 태어난 집이다. 영조는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 잇따라 용이 서린 듯한 무늬 아홉 개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른바 무수리로 천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숙종과의 관계에서 연잉군(영조)을 낳았기 때문에 숙빈으로 승계하되었다.
영조에게는 희빈 장씨 소생의 이복 형 경종이 있었고, 아래로 이복 동생 연령군이 있었다. 연잉군은 장남도 아닌, 또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연령군과는 달리 무수리 출신의 평범한 왕자로서 자랐다. 왕은 6세에 연잉군(延휰君)으로 봉해졌고, 9세에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딸과 혼인하여 19세에 출합(出閤)하였다.
경자년에 숙종이 승하하자 첫째 아들인 경종(景宗)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경종은 몸이 약하였고, 또 후사도 없었기에 자연히 연잉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연령군은 숙종 말기에 젊은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후사가 없는 경종 다음에는 연잉군이 왕자의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소론에 의해 열악한 정세를 면치못하던 노론측에서는 연잉군을 내세워 정세를 바로 잡으려 하였다.
이듬해 정언(正言) 이정소가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저위(儲位)를 미리 세우기를 경종에게 청한 것을 계기로, 경종은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판부사 조태채 등 대신(大臣)들과 의논하고, 결국 “효종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이며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주상(主上)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하면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군부인 서씨를 세제빈(世弟嬪)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소론측의 반발이 있었다. 즉 류봉휘(柳鳳輝) · 조태구(趙泰耉) ·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측은 경종의 나이가 아직도 젊은데 벌써부터 왕위를 논하는 것은 무뢰한 것이라고 하여 왕세제 결정을 제의했던 신하들의 처벌을 청하였다.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노론측은 나아가 주상이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고 정령(政令)을 재결할 때에는 반드시 왕세제(王世弟)를 불러들여 옆에서 참관하고 일에 따라 익히기를 청하였다. 이에 경종은 4대신과 논의하고 하교하기를, “나는 10여 년 동안 기이한 병이 있거니와, 정유년에 청정(聽政)을 명하신 것은 선조에서 정섭(靜攝)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등극하고부터는 증세가 더욱 깊어졌다. 세제는 장년이고 영명하므로 청정하게 하면 국사를 맡긴 데가 있어서 내가 안심하고 조섭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국사를 세제를 시켜 재단하게 하라.” 하였다.
영조대왕 - 생애 (2)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그러나 최석항 등 소론 측에서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세제를 시켜 임조(臨朝)하게 하기를 직접 청하지는 않았더라도 참여하여 듣는 것은 임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하로서 감히 남몰래 천위(天位)를 옮길 생각을 품었으니, 죄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여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경종에게 상소하였다. 이어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의 관리, 성균관과 각 지방의 유생들까지도 상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이에 연잉군도 4번의 상소를 올려 청정 명령을 회수하도록 극구 간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노론측에서도 대리청정의 회수를 3차례나 간하였으나 경종이 계속 허락하지 않자 왕의 확고한 의지라 생각하여 왕명을 따른다는 명분 하에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를 급히 올렸다. 이러한 노론측의 태도에 당황한 경종은 소론측의 조태구를 불려들어 이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하였다. 조태구는 숙종조의 세자대리청정은 숙종이 나이가 들고 병이 심하여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처인데 경종은 불과 34세로 즉위한 지도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은 부당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에 노론측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였고, 또 종전에 대리청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차서도 잘못임을 인정하고 다시 청정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론측의 일관되지 못한 행동은 소론측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이 일로 소론측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 곧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쳶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 등을 탄핵하여 귀양보내는 신축옥사(辛丑獄事)를 일으켰고, 또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해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일으켰다. 이에 노론 4대신을 비롯하여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 보내었다. 이 사건에는 왕세제 연잉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잉군은 연잉군 이외에 왕통을 이을 왕자가 없다는 경종의 배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잉군은 지지기반이었던 노론측 인사들이 대거 축출되고, 자신이 부리던 장제상(張齊尙)마저 소론측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의 모함으로 쫓겨났고, 연잉군 자신마저 경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당하는 등 궁궐내의 행동이 제약되었다.
경종 4년에 경종이 병환으로 승하하자, 이에 왕세제인 연잉군이 왕대비(王大妃)의 수찰(手札)로서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러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어 영조는 왕대비 김씨를 대왕대비(大王大妃)로 높이고 왕비 어씨(魚氏)를 왕대비로 높이고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로 올렸다.
한편 연잉군의 등극은 결국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의 여지를 남기었다. 그런 까닭에 영조가 책보(冊寶)를 받으려 할 때에 환시 · 궁인 중에서 방자하게 헐뜯는 것이 많았고, 옥새를 넣는 궤를 섬돌 모퉁이에 던지는 소리가 어좌(御座)까지 들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험난하게 왕세제로서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 있어서 왕이라는 지위는 힘들고 또 힘과 지혜가 있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
영조대왕 - 생애 (3)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왕위 등극 이후로도 조선왕조 최대의 사건인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 발생하였고, 계속해서 왕위 등극을 꾀하는 역모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하는 등 아버지로서 영조는 결함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붕당을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하였고, 한편으로는 역대 왕 중에 가장 많은 경연을 행하여 경연의 군주가 될 정도로 학문에 집중함으로써 성인으로서 위상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것을 사림들과의 정치력에서 왕실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영조의 노력으로 보아야 하겠다. 사회적으로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민생의 고통을 덜고자 하였다. 1776년 3월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는 그의 정치상을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줌으로써 조선왕조의 중흥기를 마련하게 하였다.
영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2남 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에게서는 적출이 없었고,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화순옹주를,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귀인 조씨가 화유옹주를,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를 낳았다.
영조에게는 불행하게도 적출이 없고, 또 직접 왕위를 받은 왕자도 없었다. 두 아들이 모두 영조의 재위 때에 죽어, 손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두 아들인 진종(眞宗)과 장조(莊祖)는 둘다 후에 추존되었다.
첫째인 효장세자(孝章世子)는 1719년(숙종 45, 26세)에 정빈 이씨에게 얻은 맏아들로 휘는 행(쐱)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다. 효장세자는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영조 원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영조 4년에 별세하였다. 당시 세자는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빈(嬪)으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었다. 갑신년에 영조의 유명(遺命)으로 정조를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았고, 영조가 태묘(太廟)에 부제(쯊祭)될 때에 효장세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이라 추존(追尊)하고 효순 현빈(孝純賢嬪)을 효순왕후(孝純王后)라 추존하여 태묘에 같이 부묘(쯊廟)하게 하였다. 고종 광무 연간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둘째인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 11년에 영빈(暎嬪) 이씨에게서 얻은 둘째 아들로, 휘는 선(챶)이고 자는 윤관(允寬)이다. 영조 12년에 효장세자가 졸함에 따라 선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영조 20년에 세자를 홍봉한의 딸 홍씨(궁호 혜경, 추존 헌경의황후)와 가례를 올리게 하고 별궁에 거처케 하였다. 영조 25년에 영조가 세자에게 서정을 대리케 하였는데, 세자는 친 남인 소론 정치를 행하였다. 영조 28년에 세자의 아들로 손자인 산(후에 正祖)이 태어났는데, 영조 35년에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 38년에 세자의 정치에 위협을 느낀 노론 세력이 `나경언(羅景彦)의 고변(告變)\'을 통해 세자의 비행을 상소함에 따라 부왕인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시호는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나중에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고, 고종 광무 연간에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영조대왕 - 이인좌의 난 과 탕평정치
제 21대조 이름(한글):영조대왕 이름(한자):英祖大王
이인좌의 난과 탕평정치
왕위에 오른 영조는 우선 숙종 말년부터 경종 4년에 이르기까지 행하지 못하였던 경연(經筵)과 차대(次對)를 경종의 삼년상이 끝나자 마자 행하였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언로를 넓히고, 호피(虎皮) 대신 바치는 면포(綿布)를 폐지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하였으며, 민가를 함부로 차지하는 일을 엄히 금하고 옥에 갇혀 지체되어 있는 자를 석방하며, 서울과 지방의 관원을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하는 등 새 시대에 맞는 새 희망을 갖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영조는 김일경(金一鏡) ·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킨 소론측의 인사들을 국문(鞫問)하여 처형하고, 노론측의 잇따른 소론에 대한 논핵에 의거해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우의정 조태억(趙泰億) 등 소론 대신을 축출하였다. 이에 다시 정권을 잡은 노론측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밖의 관련자에 대한 신원문제를 제기하여 4대신을 복관하고 시호를 받아냈다. 그리고 노론계의 송시열(宋時烈)을 도봉서원(道峰書院)에 다시 향사(享祀)하고, 권상하(權尙夏)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노론측에서 계속 임인옥사(壬寅獄事)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영조는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고자 하여 노론측의 정호, 민진원 등을 파직시키고 초년에 파직시켰던 소론측의 이광좌, 조태억을 다시 정승으로 삼았다. 이에 정권을 다시 잡은 소론측은 다시 임인년(壬寅年)의 사건을 들고 나와 4대신의 잘못을 논하니 영조는 4대신의 죄명만을 씻어주고 관작은 삭탈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세력에 규합하여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교체를 기도하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정치권으로부터 소외받기 시작했던 소론측의 영남 이인좌 · 정희량(鄭希亮) 등이 모반한 사건으로, 무신난(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앞서 처벌된 소론측의 김일경(金一鏡) · 목호룡(睦虎龍) · 박필몽(朴弼夢) 등의 친인척과 그들의 심복인 심유현(沈維賢)이 숙종 15년(기사년)에 죄로 죽은 사람 민종도(閔宗道) · 이의징(李義徵)의 아들 · 손자 등과 모의하고 이인좌 · 정희량을 추대하여 원수(元帥)로, 이유익(李有翼) · 이하(李河)를 모주(謀主)로 삼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은 관서에서 앞장서 난을 일으키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 ·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은 안에서 화응(和應)하기로 약속하여 3월 20일에 서울을 침범하여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4세손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당시 영조의 즉위에 대해서 일부 소론과 남인측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을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되고 있었다. 경종이 승하할 당시 가장 왕위에 근접한 사람은 연잉군이었고, 경종의 시신 역시 독에 중독된 형태였다고 하였을 정도이었다. 이에 일부 과격 소론측에서는 소현세자의 4세손인 밀풍군을 추대하여 정치권에 소외된 것을 만회하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었다.
이 난의 모의는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용인(龍仁)에 물러가 사는 중에 이웃 사람 안박(安?)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영조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로 삼고 박문수(朴文秀) · 조현명(趙顯命)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경영(京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성(安城) · 죽산(竹山)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