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선황제 - 탕평정치와 규장각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탕평정치와 규장각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왕권의 회복을 위해 탕평책으로 신하들의 붕당적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영조조의 탕평책이 온건한 타협론자들을 중심으로 한 것에 대해 정조는 절개와 의리를 준절하게 지키려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탕평론을 폈다. 특히 정조는 영조조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붕당간의 갈등은 큰 부담이었다.

 세손 때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정조는 홍국영을 숙위대장으로 삼고 왕위 등극을 방해했던 홍인한 등을 제거하였다. 이들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세손을 모함하려하였는데, 그 때 정조가 어린 나이여서 그들의 간악상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있다가 왕위에 올라 처벌하였다. 한편 홍지해(洪趾海) 부자 등이 모의를 해가며 암암리에 국가 전복을 도모해 왔던 음모와 문서가 모두 드러나 차례로 국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조는 영조가 왕위 승계의 정통성을 천명한 <천의소감(闡義昭鑑)> 모양으로 책을 편찬하기 위하여 담당부서를 설치하도록 명하고 이듬해에 그 책이 완성되자 <명의록(明義錄)>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는 존현각(尊賢閣) 위치가 너무 노출되어 있어 간악한 무리들이 거침없이 들어오기 쉽다 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여러 신하들이 청해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처소를 옮기기도 하였다. 그 해 도둑이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담을 넘어 들어왔다가 수포군에게 체포되어 그를 심문했더니 원동(苑洞) 동임(洞任)인 전흥문(田興文)이 지난날 밤에 호위 군관(扈衛軍官) 강용휘(姜龍輝)와 함께 존현각 지붕 위로 잠입하여 난을 꾸미려고 했다가 못하고 지금 두 번째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추대하려고 했던 자는 바로 이복동생 은전군 찬(?)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속명의록(續明義錄)>을 찬집하여 그 해 역모 사건을 다스린 전말을 기록하였다.
정조선황제 - 탕평정치와 규장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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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건으로 정조는 홍국영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홍국영은 이것을 빌미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국영은 더욱 정권을 견고하게 하고자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정순대비(貞純大妃)가 효의왕후의 병환이 심해 후사를 둘 희망이 없으니 간택을 하자는 하교에 대해 몇몇 대신들이 훌륭한 의원들을 맞아다가 정성을 다해 치료해볼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이 빈어(嬪御) 간선에 응하고 있을 때라서 홍국영이 대신의 상소 내용에 화를 내면서 공식 석상에서 욕설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홍국영은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인 원빈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홍국영의 세도정치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홍국영의 위세는 등등했다.

 그러나 정조는 지나친 홍국영의 정권 집중을 경계하였고, 또 홍국영의 누이동생이 입궁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어 정조는 홍국영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홍국영은 처음에 을미년 이전부터 주연(胄筵)을 드나들며 특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아 4년 동안에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중요한 병권도 두루 맡았으므로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종하여 그 권세가 세상을 좌우하게 되었고 조정은 점점 문란해져 갔다. 왕은 그의 간악상을 훤히 알고서도 은인 자중하느라 티를 내지 않았었다. 그의 동생 원빈(元嬪)이 죽자 홍국영은 스스로 세(勢)가 다한 것을 알고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왕위를 바꾸어 보려고 앞장서서 주장하기를,
“저사(儲嗣)를 두기 위해 빈어(嬪御)를 또다시 맞아들여서는 안된다.”
고 하고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상계군(常溪君) 담(湛)의 군호(君號)를 완풍(完豊)으로 고치고는 우리 생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기도 하였다. 결국 홍국영은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효의왕후를 독살하려 하였고 이것이 발각되어 가산을 몰수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간의 세도정치 기간에 규장각(奎章閣)을 확대하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특히 정조는 우선 영조조에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고 소론, 남인, 노론 각 파 중에서 준론에 해당하는 계열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규장각과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여 정치의 새로운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다. 왕권의 위상을 회복하는 실천적인 방법에서 할아버지 영조가 경연제도를 통해 성군정치(聖君政治)를 지향했던 것에 비해, 정조는 전각제도(殿閣制度)를 통해 학문을 연구하고 그를 지지할 수 있는 세력을 키웠다. 정조는 세종 때의 집현전과 비교할 수 있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황제의 어진, 어제, 어필 등을 보관하는 전각제도로써 아울러 왕권을 선양하려 한 것이다.

 전각제도는 세조 때 한차례 설립 건의가 있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숙종조에 처음으로 종부시에 소각을 짓고 규장각이라 한 적이 있었다. 숙종조의 규장각이 장소 마련에 그친 것에 비해 정조조에는 규장각 운영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였다. 특히 청나라의 문연각(文淵閣)과 같은 성격을 지닌 규장각은 내각이라 별칭되어지고 각신을 종1품의 재상급으로 하여 모든 왕정이 이곳에서 이루어 지도록 하였다. 규장각은 애초에 왕실도서관적 기능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文翰) 기능이 통합되면서 과거시험의 주관,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받아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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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먼저 과거제도의 폐단을 인식하고 창경궁 내원(內苑)에다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영종 어제(英宗御製)의 편찬 인쇄가 끝나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관방(官方)이 송(宋)의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있으면서 용도(龍圖) · 천장(天章)의 제도 같이 어제(御製)를 모셔두는 곳은 없다. 세조(世祖) 때 규장각이라는 명칭은 있었으나 미처 건립을 못했고, 숙묘(肅廟) 때도 규장각 칭호는 있었지만 역시 건립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그 열성조의 뜻을 이어 열성조 어제를 모두 모으고 후원에다 규장각을 지어 송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열성조 모훈(謨訓)을 그곳에다 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술한 것도 그를 편차(編次)하는 관(官)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선왕조 시대에는 그를 편차(編次)했던 사람이 설사 그 일만 하고 직함은 없었을지라도 지금 그 각을 건립한 이상 직관을 두고 맡아 지키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편차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제학(提學)이 송(宋)으로 치면 바로 학사(學士)이고, 직제학(直提學)은 곧 송의 직학사(直學士)이니 용도각(龍圖閣)의 학사 · 직학사처럼 규장각에도 제학 · 직제학을 두라. 그리고 또 직각(直閣) · 대교(待敎)를 두어 송의 직각(直閣) · 대제(待制)를 둔 것 같이하면 그게 모두 근거있는 제도가 될 것이다.”
하고, 이어 이조에 명하여 6명의 각신(閣臣)을 차출하도록 하였다. 제학은 일찍이 문형(文衡)이나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지냈던 사람으로 충용하도록 하고, 직제학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사람으로, 직각은 응교(應敎) 또는 이조 낭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대교는 한림 권점을 받은 사람으로 각각 충용했으며 직각 · 대교는 뒤에 모두 권점을 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전랑 선임에 있어 시끄럽게 다투는 폐단이 있다 하여 혁파한 전랑(銓郞) 임용에 있어 청관(淸官)이 될 자격을 얻는 통청(通淸)의 법을 부활시켰다가 얼마 후에 혁파하였다.

 정조는 강제(講製)를 익힐 문신(文臣)을 뽑아 아뢰는 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고, 나이 젊은 문관(文官)들이 과거에 급제만 하면 책이라고는 아예 덮어버리는 풍습이 점점 고질화되어 쉽게 바로잡혀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경(專經)이니 월과(月課)니 하는 규정들이 있기는 해도 하다말다 해 일정한 법도가 없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이를 고치기 위하여 의정부로 하여금 승문원의 문신들을 참상(參上) · 참외(參外) 할 것 없이 나이 37세 이하인 자들을 뽑아 아뢰고 내각(內閣)이 강제에 관한 절목을 만들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강(文講)과 무강(武講), 문제(文製)와 무사(武射)는 마치 수레바퀴나 새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된다 하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무강 · 무사 시험을 문강 · 문제하는 문신들 예에 준하여 실시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의 도총부(都摠府)를 이문원(?文院)으로 명명하고 어필로 편액을 썼다. 여기에서 정조는
“규장각에 임어하여 새롭게 정무를 볼 때 전직 각신(閣臣)들이 시강관(侍講官) · 강서관(講書官) 자격으로 모두 책을 끼고 당(堂)에 올라 경의(經義)를 강설하고 치도(治道)에 대해서도 각기 소견을 개진했으며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득실까지도 모두 거론했었는데 그들이 비록 논사(論思)의 책임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자리는 응지(應旨)의 자리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있으면 각기 다 털어놓도록 하라.”
하였다. 그날의 의식 절차는 대략 학궁(學宮)에 임어할 때의 의식을 모방한 것으로 경연의식과 같이 경사를 논의하고 현실의 정치를 논의할 만큼 정조와 대신간의 허심탄회한 정론이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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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3월 신축일에는 이문원에 행행하여 <근사록(近思錄)>의 도체편(道體篇)을 강했는데 그 때도 전임 각신들이 반을 나누어 당에 오르고 홍문관 영사(領事) 이하는 강(講)을 들었으며 강을 마치고는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 홍문관으로 행행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들과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영조와는 달리 경연을 하지 않았다. 정조는 재위 24년간에 5년 이후로 경연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정조는 위의 <근사록>, <심경>을 시범적으로 강연한 이후로 경연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에 정조는 자신이 신하들로부터 강론을 듣는 것보다는 신하들이 재수학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규장각이 부분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삼고 본각은 내각(內閣)에다 소속시켜 제학(提學) 이하는 겸직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강화도 어고(御庫)에 봉안되어 있던 책보(冊寶)와 서적들은 다시 각을 지어 간직해 두고 그 각을 외규장각(外奎藏閣)이라 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규장각(奎章閣)에 대제학을 두어 문형(文衡) 권내의 사람 중에서 왕지(王旨)를 받아 내각에 추천 임명하도록 했으며, 현직 제학(提學)이 재상 제수를 받으면 자연 올라가 대제학이 되고, 과거 직각(直閣)을 지낸 사람이면 전형 없이 자리가 나는 대로 곧바로 추천이 가능하며, 대교(待敎)를 지낸 사람은 역시 남상(南床)으로 곧바로 추천이 되도록 규정을 정했다.
 그리고 삼경(三經) · 사서(四書)를 새로 인쇄하여 관각(館閣) · 사고(史庫) · 태학(太學)에 각기 나누어 두게 하고 또 주합루(宙合樓)에도 두도록 명하고는 각신에게 이르기를,
“잘 지키도록 하라. 옛날 영릉(寧陵)에는 <심경(心經)>을 순장했었고 병신년 산릉(山陵) 때는 <소학(小學)>을 순장 했었는데 나도 장차 그대로 따르리라.”
하여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이렇게 규장각을 중심으로 문화정치를 하여 많은 서적도 간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책을 인쇄하게 하고, 뒤에 또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하여 정조 18년(1794) 겨울부터 창경궁 옛 홍문관(弘文館)에 인쇄소를 설치하고 어정(御定) 어명의 책들을 모두 거기에서 인쇄하고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고 안으로 대신과 전관(銓官), 밖으로 각 도의 방백(方伯)들로 하여금 조정 관료나 유생 할 것 없이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하는 자면 그를 각자 추천해 올리라고 명했다. 이러한 성과로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는데 그 대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조는 유학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그 최고의 가치체계인 지치(至治)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가 곧 조선이라 표방하고 왕정의 절대성을 확보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적인 왕실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세조 때 있던 보감과 선조 · 숙종의 보감 외에 새로이 12국조를 합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정조는 존주의 의리에 대해 숙종, 영조의 뜻을 이어갈 생각으로 언제나 황단(皇壇)에 망배를 하고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 영원사(寧遠祠) · 무열사(武烈祠) 등에 제를 올리게 하고, 삼학사(三學士), 칠의사(七義士) 등 열조(列朝)에서 존주했던 사실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조는 충절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하는 길이라면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 대해서는 그들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편집하고 충무공은 <전서(全書)>, 충민공은 <실기(實紀)>라 하여 인행(印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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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특히 주의를 기울였던 부분은 법제서의 정리 · 편찬이라 할 수 있다. 정조 2년에는 형방 승지를 명하여 법부(法府) · 법조(法曹)로 달려가서 법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각종 형구(刑具)들을 가져다가 규격에 맞게 바로잡게 하였다. 또 각 도 열읍(列邑)에도 유시를 내려 형구를 서울의 것에 준하도록 하게 했으며, 각영(各營)에도 명하여 곤장 규격을 바로잡게 하였다. <대명률(大明律)> · <경국대전> · <속대전>을 참고 절충하여 따로 알맞는 법전을 만들라고 하고 이 책이 완성되자 <흠휼전칙(欽恤典則)>이라 하고 유척(鍮尺)을 만들어 함께 반포하기도 하였다. 즉위 이후 받은 교령(敎令)으로서 장래 영식(令式)이 될 만한 것이면 유별로 모아 책을 만들어서 시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었다.

 왕의 수신서이자 일기로서는 <팔자백선(八子百選)>과 <일성록(日省錄)>이 만들어졌다. <팔자백선>은 정조가 문장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서 선발하여 간행한 것이고, <일성록(日省錄)>은 정조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하룻동안 한 일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증자(曾子)의 일삼성(日三省) 뜻을 따 <일성록>이라고 명명하였다.
 병제서로는 <병학통(兵學通)>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군제(軍制)는 오로지 <병학지남(兵學指南)> 만을 적용해 왔는데, 너무 소루하다하여 새로 조련에 관한 정식(程式) 등을 부류대로 모으고 또 강(綱)과 목(目)을 따로 세워 한 질의 책을 만들어 인쇄 반포하였다. 그리고 <무예도보(武藝圖譜)>가 완성되었다. 경모궁(景慕宮) 대리 청정 당시 척계광(戚繼光)의 곤봉(棍棒) 등 6기(六技)에다 죽장창(竹長槍) 등 12기(十二技)를 더 보태 18기(十八技)로 하였는데, 거기에다 또 기창(騎槍) 등 4기(四技)를 더 늘리고 원도보(原圖譜)와 속도보(續圖譜)를 합쳐 인쇄하여 쓰도록 명했다.

 정조는 주자서(朱子書)를 가장 좋아하여 <어류(語類)>와 <대전(大全)>에서 뽑아 <선통(選統)> · <회영(會英)> · <회선(會選)> 등의 책을 만들고 또 서독(書牘)에서 뽑아 묶어 <주서백선(朱書百選)>을 만들어 활자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주역> · <서경> · <시경> · <춘추> · <예기>에서 99편을 취하고 <중용> · <대학>은 <예기> 속에다 그대로 두었으며 주자(朱子)의 장구서(章句序)를 그 끝에다 붙여 두었는데 이는 마치 <맹자> 맨 끝에다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여놓은 것과 같은 뜻으로 판을 새겨 <오경백편(五經百篇)>을 간행하게 하였다.

 정조는 이와 같이 왕위에 오르고부터 규장각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내고 올바르게 계도할 방법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월강(月講) 순시(旬試) 제도를 실시하여 혹 그 자리에 나가 친히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시제(詩題)를 나눠주고 각자 재능을 재보기도 하였다. 혹은 경의(經義)를 강론하게 하여 학문의 깊이를 시험해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왕은 그 시권을 직접 살펴보고 대책 내용도 친히 열람한 다음 혹자에게는 급제를 내리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벼슬을 주어 권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령문(功令文)을 편집 인쇄까지 하기도 했으며 여러 하사품도 많이 내렸고 은총과 영광 또한 전대에 없을 정도였으므로 온 나라 전체가 모두 빈흥(賓興) 대상이 되어 1791년(정조 15)에는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이 만들어지고 1792년(정조 16)에는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1793년(정조 17)에는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 1794년(정조 18)에는 <탐라빈흥록(眈羅賓興錄)>, 1795년(정조 19)에는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과 <정시문정(正始文程)>, 1796년(정조 20)에는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이 각각 있게 되었다.

이밖에 옛것을 가져다 오늘을 밝히기 위하여 <대학유의>를, 민의 풍속을 올바르게 계도하기 위하여 <오륜행실(五倫行實)> ·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문장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팔가선(八家選)> · <두륙집(杜陸什)>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왕이 평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통한 저술들을 편집 교열한 것으로는 <홍재전서(弘齋全書)> 1백 권이 있다. 그 책 머리에다 어서(御書)로 기록하기를, “내가 세 살 때부터 수업하기 시작하여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에 대해 약간 들은 바 있으므로 애당초 나 자신이 수사(修辭)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기무(機務)를 살피고 모든 일들을 경륜하는 동안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고 찬란한 공업들을 근사하게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 내 어찌 문장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정조선황제 -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

 정조는 즉위초에 홍국영(洪國榮)의 보호 하에 홍인한(洪麟漢) 등 적대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러한 조치 이후에도 정조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홍국영(洪國榮)을 숙위대장으로 하여 궁궐 호위체계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숙위의 총책임자였던 홍국영이 점차 딴 마음을 품게 되자 정조는 정규 군사력 양성을 통해 호위체계를 새로이 하고자 하였다.

 1783년(정조 7) 정조는 생부(生父)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리는 조치를 취하고 이를 기념하는 과거시험을 보았다. 이 때 무과에서 뽑은 2,000명 가운데 우수한 자를 국왕 호위의 금군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이를 토대로 2년 후에는 장용위라는 새로운 금군을 조직하고, 점차 인원을 늘려 장헌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는 문제와 관련하여 장용위를 군영으로 확대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1782년(정조 6) 봄에 숙종(肅宗)조 고사를 본따 무예(武藝) 출신 및 일찍이 영의 교위를 지냈던 자 30명을 선발하여 번(番)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행랑채에 숙직하게 하였다. 1785년(정조 9)에 와서 이를 장용위(壯勇衛)라 칭했으며, 또 척계광(戚繼光)의 남군(南軍) 제도를 모방하여 5개 사(司)에 25초(哨)를 두고 그 해에 금려(禁旅)의 1번 50명을 감하여 장용위로 옮겼다. 그리고 액외 내금위(額外內禁衛) 규정을 준용하여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를 두고 10명은 사부(士夫)로 충원했으며, 또 선기대(善騎隊) 3초를 두어 훈련도감의 경기 지역 승호군(陞戶軍)을 그것에 이속시켰다. 기마병(騎馬兵) · 보병(步兵)을 합하여 경향(京鄕)의 군대가 3,450명이었는데 병조의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 규정을 준용하여 병방을 두고 군무(軍務)를 맡아보게 하고는 그를 이름하여 장용영(壯勇營)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장용영은 당초에 근위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나중에는 외영(外營)은 화성에 두고 장헌세자의 묘소를 이장할 때와 정조가 도성밖을 행차할 때 호위할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풍수가에서 한강 남쪽의 명당이라고 하는 수원을 새 묘소 자리로 정하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갈 곳으로 화성을 새로 설계하여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이곳을 외영의 본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정조선황제 -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 (2)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정조는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수원부(水原府)를 화성(華城)이라 이름했으며, 부사(府使)를 승격시켜 유수 겸 장용 외사(留守兼壯勇外使)라고 하고,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의 병방(兵房)을 장용사(壯勇使)로 고치고, 문첩(文牒)에는 대장(大將)이라는 칭호를 써 어영사(御營使)를 칭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이라고 했으며, 또 도제조를 두어 경리영(經理營) 도제조를 삼공(三公)이 으레 겸임하듯 하는 식으로 했다. 그리고 호위대장(扈衛大將)도 같은 청(廳)으로 소속시켜서 내영 · 외영 제도를 비로소 완비하였다.

 장용외영(壯勇外營)에 오위(五衛) 제도를 창설했다. 그 동안의 군제(軍制)를 보면, 처음에는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었다가 삼군부가 오위(五衛)로 바뀌면서 부(部)와 통(統)을 정하고 군대를 선출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민(民)과 병(兵)을 통합하여 군대를 농민에 붙이는 제도를 두었었다. 그러다가 그 후 군문(軍門)을 설치하고 영사(營司)를 두면서 위(衛) 제도는 폐지되었다. 화성(華城)은 원래 경기 관내의 중진(重鎭)이기에 마병(馬兵) · 보병(步兵)의 군대 편제가 그 규모에 있어 훈련도감과 비슷했었는데 1793년(정조 17)에 영(營)으로 승격된 후로는 국초에 함경도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했던 것처럼 친군위 3백 명을 두고 보군(步軍) 26개 초(哨)를 두었다가 뒤이어 용인(龍仁) 등 5개 읍의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정예하고 건장한 자를 뽑아 12개 초를 더 둠으로써 규모를 일영 오사(一營五司)로 만들었다. 그리고 또 본부 및 본부에 소속된 읍의 민병들을 뽑아 서로 번갈아가면서 성을 지키게 하는 제도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司) · 초(哨)의 명칭을 바꿔 위(衛) · 부(部)로 하고 1개 영을 5개 위로, 5개 위는 25개 부로 편성하여 내외 영군(營軍)이 총 5천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정조는 국조의 군영(軍營) 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병폐로 여겨 내외의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다시 옛날과 같은 위부(衛府)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든 무신은 모두 그 길을 통해 진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성질이 사납고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라도 모두 멍에와 채찍을 가해 통솔 범위 안에 있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한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대로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천 금려(宣薦禁旅)를 두어 무인들의 출세의 길을 열어놓았고, 서북인들에게 무예를 장려하여 뛰어난 재목을 구하려고 했다. 전영(前營)을 없애 쓸모없는 병졸을 도태시키고, 양진(兩鎭)을 두어 국토를 넓혔으며, 남쪽 교외에서 크게 사열을 하면서 노군(勞軍)의 예를 제정하고, 화성 초루에서 밤 조련을 시켜 성가퀴(성위에 낮게 쌓은 담)를 오르는 용감성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정조 스스로 <무예도(武藝圖)>를 증보하기도 했고 <병학통(兵學通)>을 편찬해서 척계광(戚繼光)의 병법을 통달하려고도 했다. 그리고 또 활쏘기는 신기에 가까왔다. 그러나 50발을 쏠 경우에 항상 그 하나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내원(內苑)에 나아가 조련하고 진법을 익히게 하면서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구경하고,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고기와 술을 두루 하사하여 장사들을 먹이면서 소무(昭武)의 악(樂)으로 여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영릉(寧陵)의 철장(鐵杖) 목마(木馬)와도 같은 뜻이었다. <역(易)>에 이르기를, “사(師)는 대중이란 뜻이요, 정(貞)은 바르다는 뜻이니 대중을 바르게 지도한다면 왕(王)이 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왕은 이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정조선황제 -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 (3)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정조 19년 봄에 정순대비(定順大妃) · 경모궁(景慕宮) · 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더 올리고 즉위 20년의 하례를 받았다. 문관은 시종(侍從) 이상, 무관은 절도사 이상, 음관은 준직(準職)이상으로 나이 61세인 사람에게는 모두 1급씩 가자(加資)했다. 자전 · 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예를 행하면서 곤전(坤殿)도 함께 참여했는데 그날이 바로 장헌세자의 환갑이었기 때문이다. 윤2월에는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華城)에 행행하여 현륭원을 배알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화성에 들려 성 내의 군사 훈련과 야간 훈련을 사열하고 봉수당(奉壽堂)에 나아가 찬(饌)을 올리면서 칠작례(七爵禮)를 행하고 이어 신풍루(新豊樓)로 옮겨 본부(本府)의 사민(四民)에게는 쌀을 내리고 기민들에겐 죽을 내렸다. 그리고 낙남헌(洛南軒)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뭇 노인들이 잔을 올려 수를 빌었다. 그리고 원(園) 밑에 사는 백성들은 복호(復戶) 2년, 화성 백성들은 복호 1년씩을 명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저술한 세 책을 엮어 펴냈는데 수집 · 교정을 모두 손수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애송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있었는데 왕은 손때가 묻어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내부(內府)에 간직해 두었다가 그때 와서 직접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차 열성(列聖)이 남겨놓은 교훈의 글과 함께 높이 모시고 오래 전하도록 하여 미처 못다한 효성을 거기에나마 표해 보려는 뜻이었다.
 정조의 화성(華城) 경영과 장용영(壯勇營)의 설치는 다목적이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 자체도 격을 높였지만 유수부(留守府)로서 화성을 새로이 건설하여 이를 관리하는 관부로 삼고 이곳에 행영(行營)과 군영(軍營)을 설치한 것은 그 지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화성은 정치적, 군사적 기능 외에 신도시로 이주하는 상공인에게 특전을 부여하여 경제적 비중도 높이고자 하였다.

 정조는 사실 전 · 현관직(前現官職) 관리 뿐만 아니라 유생들을 포함하는 광범위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의견을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새 묘소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자주 행차하면서 일반민의 정황을 살피기도 하였다. 정조 12년 가을의 경우, 정릉(靖陵)과 선릉(宣陵)을 배알하기 위해 서빙고(西氷庫) 나루에 머물러 있었을 때 밤 사이 강물이 불어 여러 신하들이 수레를 돌릴 것을 청하였다. 정조는 거가(車駕)가 이미 만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떴는데 어찌 작은 물줄기 하나에 막혀서 어가를 그냥 돌릴 수 있는가 하여, 여러 장신(將臣)과 호조 · 공조의 판서, 도신(道臣) · 수령(守令)들이 힘을 합하여 과천(果川) · 광주(廣州)의 백성들을 독려하게 하고, 거기에 대가 수행 군병(軍兵)과 좌우의 구경꾼들까지도 모두 앞을 다투어 부역을 하였으므로 날이 저물기 전에 부교가 완성되어 어가가 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처럼 정조의 능행은 백성들의 호응이 높았으며, 정조는 이것을 백성들과 직접 만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폐지하였던 신문고(申聞鼓)를 부활하고 미행(微行)으로 일반민과 접촉했던 것을 본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문고의 경우는 백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궁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조는 능행 중에 달려드는 수많은 백성들의 절실한 호소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어가가 쉬는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올리는 상언(上言)이나 어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징을 쳐 소원(訴췦)의 기회를 만드는 격쟁(擊錚)에 대해 약간의 벌을 주되 접수하여 그들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었다. 상언이 소장을 갖추는데 반해 격쟁은 구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낮은 신분에서 행한 경우가 많았다.
정조선황제 -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 (4)
제 22대조   이름(한글):정조선황제   이름(한자):正祖宣皇帝

정조는 이와 같이 규장각과 장용영을 중심으로 하는 성군정치(聖君政治)를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정치의 실제적인 주재자는 군주임을 명백히 강조하였다. 정조 초기에는 광나루에 이르러 용주(龍舟)를 타고는 하교하기를,
“임금은 이 배와 같고 백성은 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을 대하니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시고 사신(詞臣)을 불러 명(銘)을 지으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조 22년에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天明月主人翁自序)>에서는 군주를 하천에 비친 명월에 비유하였다. 역대 군주의 입장을 하늘의 뜻이나 인심의 피동체로 설명하거나 서인에 비유된 물에 실린 배에 간주되어 사공인 재상의 도움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정조는 비유의 대상을 물로 삼아서도 군주는 물, 신하는 그 물속의 고기로 설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황극편(皇極篇)> 어제서(御製書)에서도 이제까지의 붕당론을 부정하는 `파붕당(罷朋黨)\'론을 펴기도 하였다. 즉 지금의 붕당(朋黨)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뒤섞여 붕당의 구성 자체가 의미가 없으므로 붕당을 깨서 군주가 주도하는 정치의 개별적인 보필자가 되어야함을 역설하는 등 왕권(王權) 위주의 탕평론(蕩平論)을 전개하였다.
순조숙황제 - 생애(1)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생애

 순종 연덕 현도 경인 순희 문안 무정 헌경 성효 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의 휘(諱)는 공이며, 자(字)는 공보(公寶)인데, 정조의 둘째 아들이다. 모비(母妃)는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로 증 영의정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순조가 정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효의왕후를 어머니로 받드는 것이다. 친어머니는 수빈 박씨(綏嬪朴氏)로 증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딸이다.

 순조숙황제(이하 순조라 함)는 1790년(정조 14) 6월 18일 정묘(丁卯)에 창경궁(昌慶宮)의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 수빈 박씨가 임신 중에 있을 적에, 궁중의 사람들이 용꿈을 꾼 상서가 있었고 수빈의 몸에서 신채(神彩)가 밝게 발산되고 시선이 환히 빛나 보통때와는 너무도 달랐으므로, 이미 큰 경사가 있을 조짐임을 알았다. 그날로 정조는 효의왕후에게 명령하여 아기씨를 데려다 아들로 삼도록 하고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무럭무럭 자라고 용모가 준수(俊秀)하여 우뚝한 콧마루에 용의 얼굴을 하였고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이 정조와 똑같았다. 정조는 나와 살펴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이 아이의 복록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살되던 해 동지(冬至)에 정조가 나이를 더 먹게 된 것을 기뻐하여 새 역서(曆書)를 하사하니, 아기씨가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역서를 펴보다가 병풍의 큰 글자와 같은 글자가 있으면 번번이 지적하여 가리키곤 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이 특이한 것이 이와 같았다. 바야흐로 어린 나이 때부터 정조는 몽양(蒙養)을 엄격히 하여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상세히 가르쳤으며, 화려한 옷과 기름진 음식은 입과 몸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8세 때 사부(師傅) · 유선(諭善)과 상견례를 행하고 강독(講讀)에 과정(課程)을 두게 되었는데, 여가에는 반드시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정조가 독서의 과정을 더 부과하여 몸소 가르친 것이다.

 1800년(정조 24) 봄 정월 삭조(朔朝)에 왕세자에 책봉하였다. 이 때 정조는 원자(元子)가 이제 11세가 되었는데 책봉하는 예(禮)를 지금껏 미루어 온 것은 관례(冠禮) · 책봉례(冊封禮) · 가례(嘉禮)를 한 해에 아울러 거행함으로써 천년 만년토록 모유(謨猷)를 전해 주어 후손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관례 · 책봉례와 함께 가례도 이해 안에 거행하도록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