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거평군(居平君) 1420∼1495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복(復), 정종대왕의 손이며 진남군의 장남이다. 배위는 영평현부인(永平縣夫人) 남평문씨로 교리 송수(松壽)의 딸이다.
공은 처음에 부정(副正)에 제수되었다가 1467년(세조 13) 거평군으로 책봉되었다.
재질이 문과 무를 겸비하였고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겸하고 절도사(節度使)가 되었으며 1468년(세조 14)에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에 책록, 중의대부로 승진되었다.
1469년(예종 1) 예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들에게 반포하는 교서를 내리고 술을 하사하며 거평군 복에게 교시하기를 “경은 위험을 무릅쓰고 능히 충절을 다하여 이미 비상한 공을 세웠으니 그 포상의 시기를 넘길 수 없어 포상 은전을 내리는 것이요.” 하며 익대 2등공신을 책훈하였다. 또 부모와 처자에게도 2품을 봉작하고 적자에게는 작위를 세습케 하고 그 외 자손들에게는 정안(政案)에 따라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영세토록 사면할 것이라 하였다.
거평군은 반인(泮人) 8인, 노비 10인, 병사 5인, 밭 100결, 은 25냥, 표리(表裏) 1벌,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받았다.
1494년(성종 25) 우의정으로 제수되었다가 곧 개정(改定)되었다.
공은 처음에 부정(副正)에 제수되었다가 1467년(세조 13) 거평군으로 책봉되었다.
재질이 문과 무를 겸비하였고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겸하고 절도사(節度使)가 되었으며 1468년(세조 14)에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에 책록, 중의대부로 승진되었다.
1469년(예종 1) 예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들에게 반포하는 교서를 내리고 술을 하사하며 거평군 복에게 교시하기를 “경은 위험을 무릅쓰고 능히 충절을 다하여 이미 비상한 공을 세웠으니 그 포상의 시기를 넘길 수 없어 포상 은전을 내리는 것이요.” 하며 익대 2등공신을 책훈하였다. 또 부모와 처자에게도 2품을 봉작하고 적자에게는 작위를 세습케 하고 그 외 자손들에게는 정안(政案)에 따라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영세토록 사면할 것이라 하였다.
거평군은 반인(泮人) 8인, 노비 10인, 병사 5인, 밭 100결, 은 25냥, 표리(表裏) 1벌,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받았다.
1494년(성종 25) 우의정으로 제수되었다가 곧 개정(改定)되었다.
계원군(桂原君) 1469∼1554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의(艤), 자는 의지(艤之), 시호는 장민(長敏). 진남군의 증손이고 진례군의 손자이며 백성군 원의 차남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여흥민씨로 사인(舍人) 호(灝)의 딸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중후하였으며 4세에 능히 문자를 알고 독서하면서 쓰고 외움이 남들과 크게 달랐다.
1483년(성종 14)에 계림부수(桂林副守)에 제수되었고 1502년 (연산군 8) 시예(試藝)에 장원해서 명선대부에 올랐다.
1516년(중종 11) 도정(都正)에 오르고 1530년(중종 25) 성종대왕비 정현왕후가 별세하자시릉관(侍陵官) 집례(執禮)에 선발되어 정성을 다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1531년(중종 26) 정의대부에 승계되어 계원군에 봉해졌다.
1541년(중종 36) 중종대왕이 종실 중 경전에 능통한 자를 불러서 친히 강론할 때 또 뽑혔으니 그 때 나이 70이 넘었다. 대왕은 듣는 것을 염려해서 시신(侍臣)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문답하도록 하니 계원군이 글을 통해 응답을 물 흐르듯 하니 대왕은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중의대부에 승진시켰다.
1542년(중종 37) 중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왕세자를 입시(入侍)하라.”고 하여 종친과 의빈(儀賓)을 시험할 때 혹 글을 강하기도 하고 혹 글을 짓기도 하며 혹 투호(投壺)도 하였다. 그때 공이 강경(講經)에 우등을 차지하니 신분을 더해 주었다. 1554년(명종 9) 향년 86세로 별세하자 임금은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賻儀)와 제문을 보냈다.
비문은 예조참판 김계휘(金繼輝)가 찬하였으며 묘지명은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정유길(鄭惟吉)이 찬하고 묘지석은 화강암 옥석으로 제작되었으며 향토 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중후하였으며 4세에 능히 문자를 알고 독서하면서 쓰고 외움이 남들과 크게 달랐다.
1483년(성종 14)에 계림부수(桂林副守)에 제수되었고 1502년 (연산군 8) 시예(試藝)에 장원해서 명선대부에 올랐다.
1516년(중종 11) 도정(都正)에 오르고 1530년(중종 25) 성종대왕비 정현왕후가 별세하자시릉관(侍陵官) 집례(執禮)에 선발되어 정성을 다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1531년(중종 26) 정의대부에 승계되어 계원군에 봉해졌다.
1541년(중종 36) 중종대왕이 종실 중 경전에 능통한 자를 불러서 친히 강론할 때 또 뽑혔으니 그 때 나이 70이 넘었다. 대왕은 듣는 것을 염려해서 시신(侍臣)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문답하도록 하니 계원군이 글을 통해 응답을 물 흐르듯 하니 대왕은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중의대부에 승진시켰다.
1542년(중종 37) 중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왕세자를 입시(入侍)하라.”고 하여 종친과 의빈(儀賓)을 시험할 때 혹 글을 강하기도 하고 혹 글을 짓기도 하며 혹 투호(投壺)도 하였다. 그때 공이 강경(講經)에 우등을 차지하니 신분을 더해 주었다. 1554년(명종 9) 향년 86세로 별세하자 임금은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賻儀)와 제문을 보냈다.
비문은 예조참판 김계휘(金繼輝)가 찬하였으며 묘지명은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정유길(鄭惟吉)이 찬하고 묘지석은 화강암 옥석으로 제작되었으며 향토 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백성군(栢城君) 1448∼1504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원(源), 자는 자연(子淵). 진남군의 손으로서 진례군의 장남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진천송씨로 부승지 휘(텭)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말이 적으며 1462년(세조 8) 15세에 직함을 받아 백성수(栢城守)가 되니 품계가 선휘대부였다.
1457년(세조 3) 10세 때 어머니 현부인 문화류씨가 별세하고 아버지가 재혼하므로 계모 보령김씨(保寧金氏)를 효양(孝養)하기를 친어머니같이 하였다. 또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고 성품이 검소하여 번성하고 화려함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순박하며 화목하게 살았다.
1531년(중종 26) 차남 계원군의 은혜로 백성군으로 진봉되고 정의대부로 승계되었다.
비문은 세자 우빈객 성세창(成世昌)이 찬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말이 적으며 1462년(세조 8) 15세에 직함을 받아 백성수(栢城守)가 되니 품계가 선휘대부였다.
1457년(세조 3) 10세 때 어머니 현부인 문화류씨가 별세하고 아버지가 재혼하므로 계모 보령김씨(保寧金氏)를 효양(孝養)하기를 친어머니같이 하였다. 또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고 성품이 검소하여 번성하고 화려함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순박하며 화목하게 살았다.
1531년(중종 26) 차남 계원군의 은혜로 백성군으로 진봉되고 정의대부로 승계되었다.
비문은 세자 우빈객 성세창(成世昌)이 찬하였다.
봉성군(鳳城君) 1428∼1490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이(휎), 자는 평지(平之), 호는 지헌(智軒)이며 진남군의 3남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청주정씨로 예문관 수찬 즙(楫)의 딸이다.
공은 천자가 탁월하고 재조와 지혜가 출중하며 정학(庭學)을 이어받았다. 경서에 밝고 올바른 행실이 세상에 알려지매 세조대왕 때 종적(宗籍)의 예(例)로써 처음에 영(令)과 수(守)를 받았으나 시예(試藝)에 뽑히어 반열에 올라 정(正)이 되며 정의대부에 이르고 봉성군(鳳城君)으로 봉해졌다.
공은 부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임천(林泉)으로 돌아가 선현들의 글을 자신의 책으로 삼으며 수신 제가에 힘썼다. 도(道)로써 후학을 지도하며 모든 군자들과 산수 사이에 노닐며 읊조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은 천자가 탁월하고 재조와 지혜가 출중하며 정학(庭學)을 이어받았다. 경서에 밝고 올바른 행실이 세상에 알려지매 세조대왕 때 종적(宗籍)의 예(例)로써 처음에 영(令)과 수(守)를 받았으나 시예(試藝)에 뽑히어 반열에 올라 정(正)이 되며 정의대부에 이르고 봉성군(鳳城君)으로 봉해졌다.
공은 부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임천(林泉)으로 돌아가 선현들의 글을 자신의 책으로 삼으며 수신 제가에 힘썼다. 도(道)로써 후학을 지도하며 모든 군자들과 산수 사이에 노닐며 읊조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안정(富安正) 1453∼1509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증(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죽헌(竹軒). 진남군의 손이며 봉성군의 장남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의령남씨로 종부시 첨정 의(椅)의 딸이다.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글읽기를 좋아하며 책이라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467년(세조 13) 15세에 유사(有司)가 종부(宗簿)의 예(例)를 참작하여 병직랑(秉直郞)에 승계(陞階), 부안령(富安令)에 책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수(守)로 진봉(進封)되었으며 1489년(성종 20)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종친에게 학문을 권장키 위하여 한정된 인원의 품계를 폐지하고 세조대왕 · 예종대왕 때와 같이 회강(會講)에 합격하면 품계를 올려주고 가자(加資)하도록 하옵소서.” 하며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음 식년 회강부터 합격하면 가자하리라.”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고등 재조(才 )를 이루어 부안정으로 진봉되며 창선대부에 승계되었다.
1506년 (중종 1) 임금은 역수(曆數)에 응하여 원종공신을 논하며 명선대부로 진계하고 당상(堂上)의 품복(品服)을 내렸다.
비문과 묘지명은 남곤(南袞)이 찬하고 묘지석은 화강암 옥석으로 제작하였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의령남씨로 종부시 첨정 의(椅)의 딸이다.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글읽기를 좋아하며 책이라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467년(세조 13) 15세에 유사(有司)가 종부(宗簿)의 예(例)를 참작하여 병직랑(秉直郞)에 승계(陞階), 부안령(富安令)에 책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수(守)로 진봉(進封)되었으며 1489년(성종 20)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종친에게 학문을 권장키 위하여 한정된 인원의 품계를 폐지하고 세조대왕 · 예종대왕 때와 같이 회강(會講)에 합격하면 품계를 올려주고 가자(加資)하도록 하옵소서.” 하며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음 식년 회강부터 합격하면 가자하리라.”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고등 재조(才 )를 이루어 부안정으로 진봉되며 창선대부에 승계되었다.
1506년 (중종 1) 임금은 역수(曆數)에 응하여 원종공신을 논하며 명선대부로 진계하고 당상(堂上)의 품복(品服)을 내렸다.
비문과 묘지명은 남곤(南袞)이 찬하고 묘지석은 화강암 옥석으로 제작하였다.
수창군(壽昌君) 1487∼1560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평(枰), 자는 평지(枰之). 진남군의 증손이며 조부는 진례군이고 아버지는 황산군 문(汶)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전의이씨로 현령 승렬(承烈)의 딸과 현부인 의령남씨로 현감 인(麟)의 딸이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고 자라면서 어리면서도 지식이 있어 어른의 너그러운 마음과 생각을 가졌다. 정상국(鄭相國) 문익공(文翼公)이 사랑하며 일을 따라 훈계하기를 자기가 낳은 것같이 하며 칭찬하기를 “이 사람이 종실이 아니었다면 재상 반열에 들 것이다.” 하였다.
비록 종실이지만 조금도 방종하지 아니하며 부지런하였다.
중종 때 종적의 예에 따라 처음에 부수(副守)의 직을 받았으며 뒤에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막내아들 헌국(憲國)이 좌의정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자 1551년(명종 6)에 수창군(壽昌君)으로 추봉됐으며 1593년(선조 26) 증 현록대부 순충보조공신, 1602년(선조 35)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으로 승계 증직되었다.
비문은 전라도 관찰사 허성(許筬)이 찬했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전의이씨로 현령 승렬(承烈)의 딸과 현부인 의령남씨로 현감 인(麟)의 딸이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고 자라면서 어리면서도 지식이 있어 어른의 너그러운 마음과 생각을 가졌다. 정상국(鄭相國) 문익공(文翼公)이 사랑하며 일을 따라 훈계하기를 자기가 낳은 것같이 하며 칭찬하기를 “이 사람이 종실이 아니었다면 재상 반열에 들 것이다.” 하였다.
비록 종실이지만 조금도 방종하지 아니하며 부지런하였다.
중종 때 종적의 예에 따라 처음에 부수(副守)의 직을 받았으며 뒤에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막내아들 헌국(憲國)이 좌의정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자 1551년(명종 6)에 수창군(壽昌君)으로 추봉됐으며 1593년(선조 26) 증 현록대부 순충보조공신, 1602년(선조 35)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으로 승계 증직되었다.
비문은 전라도 관찰사 허성(許筬)이 찬했다.
익흥수(益興守) 1480∼1508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효원(孝源), 자는 희순(希舜), 호는 국재(菊齋). 진남군의 증손이며 조부는 봉성군이고 부안정 증(增)의 장남이다.
배위는 혜인(惠人) 여흥민씨로 참판 수건(帥騫)의 딸이다.
공은 타고남이 특이하고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알려지며 연산군 때의 통례에 따라 처음에 영(令)이 주어지고 뒤에 익흥수로 책봉되고 선휘대부에 승계되었다.
배위는 혜인(惠人) 여흥민씨로 참판 수건(帥騫)의 딸이다.
공은 타고남이 특이하고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알려지며 연산군 때의 통례에 따라 처음에 영(令)이 주어지고 뒤에 익흥수로 책봉되고 선휘대부에 승계되었다.
진례군(進禮君) 1426∼1498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형(衡), 자는 평중(平仲). 정종대왕의 손이며 진남군의 차남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문화류씨로 직장 복강(福剛)의 딸과 현부인 보령김씨이다.
공은 천성이 자혜하고 공검하며 재조와 도량이 탁월하고 흉금이 쾌활하며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선현(先賢)의 말씀을 도탑게 믿으며 성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냈다.
1456년(세조 2) 세조대왕은 이조에 전지하여 “형(衡)은 <경서>의 대의를 통하여 이미 면학을 하였으니 그 자서제질 중 원함에 따라 급을 올려 주라”고 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세조대왕이 중궁과 더불어 풍양(豊壤)으로 갈때 위장이 되어 추종하였다.
1467년(세조 13)에 진례군에 책봉되고 정의대부에 승계되었다. 1468년(세조 14) 진남군이 세조대왕에게 진언하기를 “아들 형(衡)이 경상좌도절도사로 있는데 그의 아들 백성군(栢城君) 원(源)이 어머니를 따라 전라도 광주에 갔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가서 구하고자 하오니 허가하여 달라” 하여 세조대왕이 허가하며 병조에 영을 내려 역마(驛馬)를 내려주고 포목(布木) 두 필을 하사하였다.
1469년(예종 1)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문화류씨로 직장 복강(福剛)의 딸과 현부인 보령김씨이다.
공은 천성이 자혜하고 공검하며 재조와 도량이 탁월하고 흉금이 쾌활하며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선현(先賢)의 말씀을 도탑게 믿으며 성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냈다.
1456년(세조 2) 세조대왕은 이조에 전지하여 “형(衡)은 <경서>의 대의를 통하여 이미 면학을 하였으니 그 자서제질 중 원함에 따라 급을 올려 주라”고 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세조대왕이 중궁과 더불어 풍양(豊壤)으로 갈때 위장이 되어 추종하였다.
1467년(세조 13)에 진례군에 책봉되고 정의대부에 승계되었다. 1468년(세조 14) 진남군이 세조대왕에게 진언하기를 “아들 형(衡)이 경상좌도절도사로 있는데 그의 아들 백성군(栢城君) 원(源)이 어머니를 따라 전라도 광주에 갔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가서 구하고자 하오니 허가하여 달라” 하여 세조대왕이 허가하며 병조에 영을 내려 역마(驛馬)를 내려주고 포목(布木) 두 필을 하사하였다.
1469년(예종 1)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철산수(鐵山守) 1484∼1555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효순(孝順), 자는 희민(希閔). 진남군의 증손이며 조부는 봉성군이고 부안정 증의 차남이다.
배위는 혜인(惠人) 안동김씨로 별제(別提) 언홍(彦弘)의 딸이다.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우러났으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경사(經史)와 자서(子書)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강서원에서 좌우 도서를 종일토록 읽되 단정하게 앉으며 모든 어른에게 공경함을 다하였다.
친척이 병에 걸려 간병하지 못하는데 특히 앞장서서 들어가서 구하고 또 형수가 병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이 전염될까 두려워하여 홀로 문을 닫고 시신을 거두었다.
종적의 통례에 따라 중종조에 영(令)이 주어지고 차례로 선휘대부의 위계에 오르고 진봉하여 철산수가 되었다.
배위는 혜인(惠人) 안동김씨로 별제(別提) 언홍(彦弘)의 딸이다.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우러났으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경사(經史)와 자서(子書)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강서원에서 좌우 도서를 종일토록 읽되 단정하게 앉으며 모든 어른에게 공경함을 다하였다.
친척이 병에 걸려 간병하지 못하는데 특히 앞장서서 들어가서 구하고 또 형수가 병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이 전염될까 두려워하여 홀로 문을 닫고 시신을 거두었다.
종적의 통례에 따라 중종조에 영(令)이 주어지고 차례로 선휘대부의 위계에 오르고 진봉하여 철산수가 되었다.
황산군(黃山君) 1450∼1489 파명:진남군(鎭南君)
  휘는 문(汶), 자는 유청(有淸), 진남군의 손이며 진례군의 차남이다. 배위는 증 군부인 배천조씨로 군수 원우(元祐)의 딸이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종사해서 경서에 통달하였으며 종적의 통례에 따라 황산수에 책봉되었고 1593년(선조 26) 손자 헌국(憲國)이 이미 태사(台司)에 서며 나아가 좌의정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그 은혜로 3대에게 벼슬을 더하니 1593년(선조 26) 증 소덕대부 황산군(黃山君)으로 책봉되었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종사해서 경서에 통달하였으며 종적의 통례에 따라 황산수에 책봉되었고 1593년(선조 26) 손자 헌국(憲國)이 이미 태사(台司)에 서며 나아가 좌의정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그 은혜로 3대에게 벼슬을 더하니 1593년(선조 26) 증 소덕대부 황산군(黃山君)으로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