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건석(建奭) 1852∼1906    파명:선성군(宣城君)
  보명은 필화(弼和), 자는 한경(漢卿 또는 漢京), 호는 성석(醒石)이다. 선성군의 15대손이며 생부는 상영(象榮)이나 황간면 용암리의 상일(象一)에게 입계했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계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높고 글과 글씨에 뛰어났다. 약관에 큰 뜻을 품고 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한때 궁내부주사 통훈대부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로 나라 안이 뒤숭숭해지고 5흉7적이 조정을 활보했으며 잔악한 왜인들은 1895년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태황후 민씨를 시해했다. 또한 왜구는 더욱 기승을 부려 청 · 일전쟁의 승리의 여세로 대륙침략 야욕은 더욱 거세어져 또다시 러 · 일전쟁을 일으키니 이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이에 공은 비분강개하여 매국노를 참수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1898년(광무 2) 고종태황제의 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安?壽)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오자 이를 엄중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나자 하루 속히 호국대책을 세울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 유생의 소수(疏首)가 되어 궁궐 앞까지 나가 조약취소를 상소하였다. 또 역적을 토벌코자 통문을 경향사림에게 긴급 발송하였다. 이로써 민족정기를 고무시키고 항쟁을 직언하고 부월(斧鉞)로써 궐내에 복소(伏疏)를 무려 14차례나 하였다.
 1905년 10월 11일 잠시 고향에 들렀다가 20일에 평안도의 자객 20여 명과 함께 역도를 처단할 약속을 하고 이를 결행하기 위해 급거 상경하려고 했으나 도착 전날 이 사실이 폭로되어 소유(疏儒)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날 공은 비서원에 봉장을 올리고 대안문을 빠져나오는 도중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자 별실 천씨가 정성껏 사식을 넣었건만 일체 거절하고 물 한 방울 목을 적시는 정도였다. 감시하는 일본헌병은 갖은 유혹과 협박 및 추태를 부렸지만 “나는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일본 헌병을 심히 꾸짖었다.
 공은 감금된 지 6개월만에 토혈하고 기절하곤 했다. 이때마다 일본헌병은 공을 소생시켜 놓았다.
 1906년 5월 9일, 아들 응수(應洙)가 면회 와 눈물을 흘리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살기를 꾀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바로 돌아가 노모를 잘 모시고 선조에 대한 봉사에 각별하라.”하고 고향에 돌려보냈다.
 다음 날 공이 또다시 토혈, 기절하니 일본헌병은 소생시켜 놓고 주사와 시약을 투여하려 했지만 공은 한사코 불응하고서 목을 졸라 자진했다. 향년 55세로 일본헌병사령부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일본헌병이 문 밖으로 내다버린 시체를 별실 천씨와 공의 동지 이학래(李鶴來) · 윤상필(尹相弼)이 협력하여 노량진 전록(前麓) 이문화(李文和) 소유 산하에 임시 권폄하였다. 권폄한 공의 묘 앞에 친구 안병찬(安秉瓚 : 1854∼1921)은 “관작은 1품을 받았으나 `의사\' 두 자만은 못하다.”라고 하고 `대한의사 전주리공건석지묘(大韓義士 全州李公建奭之墓)\'라고 손수 쓴 목비(木碑)를 세웠다.
 다음 해 1907년 이곳 노량진에서 황간 고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풍운의 반세기가 지난 1963년 10월 10일 의사의 공적이 재조명되어 경부선 황간역 광장에 `대한의사 리건석선생기념비\'가 세워졌다. 옥중에서 순국한 의사의 버선목에서 발견된 `계자유서(戒子遺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애국애족의 명문이다.

嗚呼死矣 人誰無死 死雖其所 吾死而不能瞑目者 恨不斬賣國之賊而復我國權者也 嗚呼 應洙汝勿以汝父之死 爲痛而 痛汝父不能誅賣國之賊而死也 嘔血遂死 數字爲訣 我死之復 幸勿以哀爲孝 以禮爲葬 能繼汝父之意眞吾子也
아! 슬프도다. 죽음이여.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겠는가마는 내가 편히 눈을 감고 죽지 못하는 것은 매국노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서이다. 아! 응수야 너는 네 아비의 죽음을 원통해 하지 말고 네 아비가 매국노를 죽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원통히 생각해라. 피를 토하고 죽더라고 몇 글자로써 나의 원통함을 말하노니 슬픔을 효도로 여기지 말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지 말고 네 아비의 뜻을 잇는 것만이 진정한 나의 자식이니라.”<대한매일신보 광무10년 5월 16일에 게재되었다. 원본은 손자 종신(宗信)이 소장하고 있다.>

 196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으며 배위 벽진이씨와 같이 선열묘역 3호에 안장되었다. 다시 1987년 5월 1일 대한민국은 공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그 공적을 기렸다.
교년(喬年) 1718∼1788    파명:선성군(宣城君)
교신(喬臣) 1711∼1793    파명:선성군(宣城君)
구경(龜慶) 1561∼?    파명:선성군(宣城君)
규로(奎老) 1612∼1674    파명:선성군(宣城君)
규석(奎錫) 1826∼1895    파명:선성군(宣城君)
긍민(兢民) 1664∼1755    파명:선성군(宣城君)
능화(能和) 1869∼1943    파명:선성군(宣城君)
만용(만용) 1804∼1863    파명:선성군(宣城君)
만장(萬長) 1617∼1720    파명:선성군(宣城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