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구(經九) 1763∼1818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숙전(叔典), 서구(書九)의 아우이며 원(遠)의 차남으로 인흥군의 6대손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교관(官)을 거쳐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청풍김씨로 성규(聖)의 딸과 숙인 함안조씨로 중구(重九)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율길리 서파 유좌이다.
배위는 숙인 청풍김씨로 성규(聖)의 딸과 숙인 함안조씨로 중구(重九)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율길리 서파 유좌이다.
관구(觀九) 1760∼1826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우빈(于賓), 호는 일구재(一邱齋). 훈(塤)의 장남이고 낭원군의 5대손이다.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정랑(正郞)을 지냈다.
배위는 신창맹씨 의대(義大)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선영 내 축좌이다.
배위는 신창맹씨 의대(義大)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선영 내 축좌이다.
국응(國應) 1839∼1907 파명:인흥군(仁興君)
  초휘는 신국(愼國), 자는 치관(穉觀), 복인(復仁)의 아들이다. 생부는 진안대군파 의곤(義坤)이며 인흥군의 9대손이다. 1866년(고종 3) 병인년 별시 병과에 급제, 교리(校理)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진황(鎭璜)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권가리 산 서록 하 인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진황(鎭璜)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권가리 산 서록 하 인좌이다.
명구(命九) 1810∼1870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여과(汝果), 소(素)의 차남으로 낭원군의 5대손이며 생모는 제주고씨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강씨로 환(煥)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무림리 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강씨로 환(煥)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무림리 간좌이다.
명환(明煥) 1718∼1764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사회(士晦) 또는 사휘(士輝), 호는 해악(海嶽). 낭원군의 증손이고 인흥군의 현손으로 익녕군(益寧君) 제(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만태(安萬泰)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일찍부터 왕족 가운데서 학문에 능한 자를 찾고 있던 영조대왕을 기쁘게 하였다. 문학 · 정언 · 사서를 지낸 뒤 충청도 경차관으로 나아갔는데, 경시관(京試官)을 겸하였으나 부모의 병환으로 그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다시 기용되어 경연의 시독관으로 재임 중이던 1762년(영조 38), 경현당(景賢堂)에서 행해진 주강(晝講)에서 <중용>을 시강하다 실수가 있어 다시 파직되었다. 1763년 재 서용되어 부교리 · 교리 · 부수찬 · 수찬 등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번갈아 역임하였으며, 암행어사로 해미현(海美縣)을 안찰하기도 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어사로서의 임무 수행이 철저하여 영조로부터 “리명환의 일성(一聲)에 묵리(墨吏)들이 담장을 넘어 도망치니 진실로 어사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어 북쪽 변방에 가서 시장을 감독할 때 조정에서 처음으로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했는데 그 금지령이 북방 변두리 백성들에게까지 아직 반포되지 않아 그 법령을 범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가르치지도 않고 죽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공의 소원대로 따랐다. 저서로는 문집인 <해악집> 4권 2책이 전해지고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남양홍씨로 군수 계흠(啓欽)의 딸과 증 숙부인 전주최씨로 창주(昌柱)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자좌에 3합폄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어사로서의 임무 수행이 철저하여 영조로부터 “리명환의 일성(一聲)에 묵리(墨吏)들이 담장을 넘어 도망치니 진실로 어사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어 북쪽 변방에 가서 시장을 감독할 때 조정에서 처음으로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금했는데 그 금지령이 북방 변두리 백성들에게까지 아직 반포되지 않아 그 법령을 범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가르치지도 않고 죽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공의 소원대로 따랐다. 저서로는 문집인 <해악집> 4권 2책이 전해지고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남양홍씨로 군수 계흠(啓欽)의 딸과 증 숙부인 전주최씨로 창주(昌柱)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자좌에 3합폄이다.
서구(書九) 1754∼1825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쾩齋) · 강산(薑山) · 소완정(素玩亭) · 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받은 원(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을 증직받은 평산신씨로 부사 사관(思觀)의 딸이다.
1758년(영조 34) 그의 나이 5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계비(繼쯼)는 진주류씨로 한복(漢復)의 딸이며 역시 정경부인이 되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으며, 외숙으로부터 당시(唐詩)와 <사기><통감>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영조 41) 아버지에게 돌아와 여러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다. 16세부터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문장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770년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잃었다. 이 때까지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시문과 금석(金石) · 육서(六書) 등을 읽다가, 21세 되던 1774년 가을에 정시(庭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고, 10월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첫 벼슬을 받았다.
22세 때인 1775년부터 5, 6년간은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는데 특히 사서를 탐독하였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 사서, 1786년에 홍문관 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 · 5도관찰사 · 형조판서 · 판중추부사 · 우의정 등의 벼슬을 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마침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는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 뛰어났다. 사가시인(四家詩人) 중에서는 제일 어리고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외로움이 일생 동안 영향을 미쳤고,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으며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과 벼슬을 한 일, 이 세 가지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는 한번도 연행(燕行) 길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리덕무(李德懋) · 류득공(柳得恭) · 박제가(朴齊家) 등 실학파 문사들과 사귀며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고 시국을 논하였으므로 자연히 독창과 개성, 현실 문제, 조선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22세 때에 리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시인\'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공의 시는 공의 개인적 성향으로 인하여 혁신적이거나 현실에 치우치기보다는 온유돈후하고 사색적이며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고묘(高妙)한 정신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많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 세계와 고귀한 내면의 깊이를 아울러 그려냄으로써 시의 격조를 높이는 데 힘썼다. 정조대왕의 명으로 <존주휘편(尊周彙編)>과 <장릉사보(莊陵史補)> ·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편찬했고, 문집으로 <척재집>과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해진다.
한편 공은 예언가이기도 했으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순조 때 다시 전라감사가 되어 묵은 폐단을 다스리니 도 전체가 평안했다. 하루는 천강성(天죃星)이 나주(羅州)지방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불러 말했다. “너는 급히 나주 아무개네 집으로 가서 그 부인이 아들을 낳거든 반드시 죽이고, 딸을 낳거든 살려주고 돌아오라.” 그래서 아전이 급히 가보고 와서 딸이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약에 아들을 낳았다면 나라의 운명을 어지럽힐 것인데, 여자라니 그리 근심될 것이 없다. 그러나 후일 반드시 귀한 사람의 첩이 되어 한때 세력이 막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과연 후에 하옥(荷屋) 김좌근(金左根)의 첩이 되어 요란했던 나합(羅閤)이었다 한다.
공은 아들이 없어 아우 경구(經九)의 아들을 양자해 왔다. 공이 임종시에 봉서(封書) 하나를 아들에게 주면서 “이 봉서는 우리 집에 가장 긴박한 화가 닥쳤을 때 열어보라.”고 하였다. 그 뒤 공의 증손자가 살인죄로 관가에 잡혀가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 때 가족들이 그 봉서를 뜯어보니 또 한 장의 봉서가 그 안에 들어있고 다른 종이쪽지에 “이 봉서를 부사(府使)에게 가져다 바쳐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급히 부사에게 그것을 바쳤는데 부사가 그것을 열어보니 “이 봉서를 개봉하는 즉시 부사 이하 모든 관원은 급히 뜰 아래로 내려가라.”고 씌여있었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곧 `우지직\'하고 대들보가 꺾어지며 집이 무너졌으나 부사 이하 모든 관속은 생명을 구했다. 따라서 공의 증손자도 사람을 살린 공로로 방면되었다고 한다.
배위는 정경부인 평산신씨로 경한(景翰)의 딸이다. 묘소는 춘천시 남면 박암리 부친 원(遠)의 묘하에 있다.
1758년(영조 34) 그의 나이 5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계비(繼쯼)는 진주류씨로 한복(漢復)의 딸이며 역시 정경부인이 되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으며, 외숙으로부터 당시(唐詩)와 <사기><통감>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영조 41) 아버지에게 돌아와 여러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다. 16세부터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문장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770년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잃었다. 이 때까지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시문과 금석(金石) · 육서(六書) 등을 읽다가, 21세 되던 1774년 가을에 정시(庭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고, 10월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첫 벼슬을 받았다.
22세 때인 1775년부터 5, 6년간은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는데 특히 사서를 탐독하였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 사서, 1786년에 홍문관 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 · 5도관찰사 · 형조판서 · 판중추부사 · 우의정 등의 벼슬을 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마침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는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 뛰어났다. 사가시인(四家詩人) 중에서는 제일 어리고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외로움이 일생 동안 영향을 미쳤고,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으며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과 벼슬을 한 일, 이 세 가지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는 한번도 연행(燕行) 길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리덕무(李德懋) · 류득공(柳得恭) · 박제가(朴齊家) 등 실학파 문사들과 사귀며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고 시국을 논하였으므로 자연히 독창과 개성, 현실 문제, 조선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22세 때에 리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시인\'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공의 시는 공의 개인적 성향으로 인하여 혁신적이거나 현실에 치우치기보다는 온유돈후하고 사색적이며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고묘(高妙)한 정신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많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 세계와 고귀한 내면의 깊이를 아울러 그려냄으로써 시의 격조를 높이는 데 힘썼다. 정조대왕의 명으로 <존주휘편(尊周彙編)>과 <장릉사보(莊陵史補)> ·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편찬했고, 문집으로 <척재집>과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해진다.
한편 공은 예언가이기도 했으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순조 때 다시 전라감사가 되어 묵은 폐단을 다스리니 도 전체가 평안했다. 하루는 천강성(天죃星)이 나주(羅州)지방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불러 말했다. “너는 급히 나주 아무개네 집으로 가서 그 부인이 아들을 낳거든 반드시 죽이고, 딸을 낳거든 살려주고 돌아오라.” 그래서 아전이 급히 가보고 와서 딸이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약에 아들을 낳았다면 나라의 운명을 어지럽힐 것인데, 여자라니 그리 근심될 것이 없다. 그러나 후일 반드시 귀한 사람의 첩이 되어 한때 세력이 막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과연 후에 하옥(荷屋) 김좌근(金左根)의 첩이 되어 요란했던 나합(羅閤)이었다 한다.
공은 아들이 없어 아우 경구(經九)의 아들을 양자해 왔다. 공이 임종시에 봉서(封書) 하나를 아들에게 주면서 “이 봉서는 우리 집에 가장 긴박한 화가 닥쳤을 때 열어보라.”고 하였다. 그 뒤 공의 증손자가 살인죄로 관가에 잡혀가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 때 가족들이 그 봉서를 뜯어보니 또 한 장의 봉서가 그 안에 들어있고 다른 종이쪽지에 “이 봉서를 부사(府使)에게 가져다 바쳐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급히 부사에게 그것을 바쳤는데 부사가 그것을 열어보니 “이 봉서를 개봉하는 즉시 부사 이하 모든 관원은 급히 뜰 아래로 내려가라.”고 씌여있었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곧 `우지직\'하고 대들보가 꺾어지며 집이 무너졌으나 부사 이하 모든 관속은 생명을 구했다. 따라서 공의 증손자도 사람을 살린 공로로 방면되었다고 한다.
배위는 정경부인 평산신씨로 경한(景翰)의 딸이다. 묘소는 춘천시 남면 박암리 부친 원(遠)의 묘하에 있다.
세응(世應) 1861∼1930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신백(愼百), 경구(經九)의 증손이며 인흥군의 9대손이다. 1892년(고종 29) 경과 을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양섭(亮燮)의 딸과 숙부인 여산송씨로 염호(濂浩)의 딸과 숙부인 남원독고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선영 안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양섭(亮燮)의 딸과 숙부인 여산송씨로 염호(濂浩)의 딸과 숙부인 남원독고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선영 안에 있다.
소(素) 1746∼1819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국화(國華), 호는 상위암(相違菴). 명환(明煥)의 장남으로 낭원군의 현손이며 인흥군의 5대손이다. 일찍이 성균관 생원시에 급제하여 참봉 · 목사 등을 거쳐 통정대부 ·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나중에 가선대부 종정경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연일정씨로 박(樸)의 딸과 창녕조씨 환명(煥明)의 딸, 제주고씨 흥규(興圭)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선영 내 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연일정씨로 박(樸)의 딸과 창녕조씨 환명(煥明)의 딸, 제주고씨 흥규(興圭)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선영 내 임좌이다.
언광(彦) 1722∼1798 파명:인흥군(仁興君)
  자는 사겸(士謙), 낙풍군(洛豊君) 무(楙)의 차남이며 낭원군의 증손이다. 1762년(영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의령현감을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숙인 나주임씨로 훤(萱)의 딸과 죽산안씨 사덕(思德)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적계리 방축촌 선영 안에 있다.
배위는 숙인 나주임씨로 훤(萱)의 딸과 죽산안씨 사덕(思德)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적계리 방축촌 선영 안에 있다.
언소(彦) 1706∼1758 파명:인흥군(仁興君)
  인흥군의 4대손이며 밀양군의 장남으로 자는 사빈(士彬)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목사를 지냈으며 좌찬성에 승계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토당동 사산 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풍양조씨로 군수 해수(海壽)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토당동 사산 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풍양조씨로 군수 해수(海壽)의 딸이며 묘는 합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