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의찬(義瓚) 1825∼190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찬(義瓚) [1825(순조 25)∼1901(광무 5)]
자는 경진(敬珍), 호는 양우당(養愚堂). 대군의 13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태중(泰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준수하고 성품이 너그러우며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나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며 의리를 존중하여 중망을 받았다. 명문의 후예로서 학식과 신망이 높아 음보로 1893년(고종 30)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고, 이어서 오위호군을 거쳐 돈녕부 도정에 승차하고 1894년(고종 31)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승임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가 일인에게 시해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왜적을 규탄하는 소를 지어 올리고자 하였으나 중간에서 저지당하여 상소치 못하게 되자 통곡을 하고 벼슬을 사직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있으며 일생을 마친 의사이다. 1900년(광무 4) 가의대부에 승임되었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문수산 손좌에 있다.
자는 경진(敬珍), 호는 양우당(養愚堂). 대군의 13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태중(泰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준수하고 성품이 너그러우며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나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며 의리를 존중하여 중망을 받았다. 명문의 후예로서 학식과 신망이 높아 음보로 1893년(고종 30)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고, 이어서 오위호군을 거쳐 돈녕부 도정에 승차하고 1894년(고종 31)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승임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가 일인에게 시해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왜적을 규탄하는 소를 지어 올리고자 하였으나 중간에서 저지당하여 상소치 못하게 되자 통곡을 하고 벼슬을 사직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있으며 일생을 마친 의사이다. 1900년(광무 4) 가의대부에 승임되었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문수산 손좌에 있다.
의필(義弼) 1738∼180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필(義弼) [1738(영조 14)∼1808(순조 8)]
초휘는 상악(商岳), 자는 양백(亮伯), 호는 창계(蒼溪).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며 대사간 존중(存中)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정하며 너그럽고 편안하였으며 학문이 깊어 중망이 높았다. 일찍이 감제(柑製)에 응하였는데, 시관이 공의 명성을 듣고 장원으로 뽑으려 한다며 은밀히 공의 의중을 타진하는지라 공이 불쾌하여 시권을 거두어 가지고 나왔다. 그 후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급제하자 영조대왕은 공을 인견하고 부친 존중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바른 말을 하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된 사건을 잊으라는 뜻으로 `망석척용(忘昔滌用)\'이라고 하교하자, 공이 “신의 아비는 임금을 섬기되 숨김이 없고, 충성을 다하되 은휘함이 없었는데, 상께서 하교하시니 신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하고 고향 묘려(墓廬)에 퇴거하여 있는데 10년간 누차 높은 벼슬을 내리며 나오라 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자, 임금은 일소(馹召)를 명하니 공이 알현하고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위국진충(爲國盡忠)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인데 지난날 `망석척용\' 넉자를 하교하시니 사람의 자식된 자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충신은 효자문에서 구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불초함으로써 어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하니 임금은 “네 말이 옳다. 희언(?言)을 어찌 이다지 고집하는가.” 하며 의주로 가도록 교지를 내리니 공이 드디어 출사하여 강유(講儒) · 수무(修武) · 집법평윤(執法平允)하니 임금은 “가상하다. 어진 아비의 그 자식이로다. 내 이제 서북쪽의 근심을 잊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양양 등 여섯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여러 청환직을 거쳐 부제학에 이어 우참찬에 이르렀다.
공은 벼슬길에 나와 정2품 참찬에 이르기까지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여 권력과 부귀에 아부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공명정대하게 봉사하였기에 명예로운 청백리에 선정되어 모든 관리의 모범이 되었다.
유고로 <창계집(蒼溪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유좌에 있다.
초휘는 상악(商岳), 자는 양백(亮伯), 호는 창계(蒼溪).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며 대사간 존중(存中)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정하며 너그럽고 편안하였으며 학문이 깊어 중망이 높았다. 일찍이 감제(柑製)에 응하였는데, 시관이 공의 명성을 듣고 장원으로 뽑으려 한다며 은밀히 공의 의중을 타진하는지라 공이 불쾌하여 시권을 거두어 가지고 나왔다. 그 후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급제하자 영조대왕은 공을 인견하고 부친 존중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바른 말을 하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된 사건을 잊으라는 뜻으로 `망석척용(忘昔滌用)\'이라고 하교하자, 공이 “신의 아비는 임금을 섬기되 숨김이 없고, 충성을 다하되 은휘함이 없었는데, 상께서 하교하시니 신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하고 고향 묘려(墓廬)에 퇴거하여 있는데 10년간 누차 높은 벼슬을 내리며 나오라 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자, 임금은 일소(馹召)를 명하니 공이 알현하고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위국진충(爲國盡忠)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인데 지난날 `망석척용\' 넉자를 하교하시니 사람의 자식된 자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충신은 효자문에서 구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불초함으로써 어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하니 임금은 “네 말이 옳다. 희언(?言)을 어찌 이다지 고집하는가.” 하며 의주로 가도록 교지를 내리니 공이 드디어 출사하여 강유(講儒) · 수무(修武) · 집법평윤(執法平允)하니 임금은 “가상하다. 어진 아비의 그 자식이로다. 내 이제 서북쪽의 근심을 잊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양양 등 여섯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여러 청환직을 거쳐 부제학에 이어 우참찬에 이르렀다.
공은 벼슬길에 나와 정2품 참찬에 이르기까지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여 권력과 부귀에 아부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공명정대하게 봉사하였기에 명예로운 청백리에 선정되어 모든 관리의 모범이 되었다.
유고로 <창계집(蒼溪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유좌에 있다.
의행(義行) 1724∼179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행(義行) [1724(경종 4)∼1793(정조 17)]
초휘는 상주(商舟), 자는 백통(伯通). 대군의 13대손이며 대사헌 완릉군 현록(顯祿)의 손자이고 부사 권중(權中)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 · 동래부사 · 참판 · 대사헌을 역임하고 완성군(完成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지곡동 선영 자좌에 있다.
초휘는 상주(商舟), 자는 백통(伯通). 대군의 13대손이며 대사헌 완릉군 현록(顯祿)의 손자이고 부사 권중(權中)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 · 동래부사 · 참판 · 대사헌을 역임하고 완성군(完成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지곡동 선영 자좌에 있다.
의호(義浩) 1777∼184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호(義浩) [1777(정조 1)∼1841(헌종 7)]
대군의 13대손이며 동몽교관 호중(昊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명이 높았다. 문집이 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에 있다.
대군의 13대손이며 동몽교관 호중(昊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명이 높았다. 문집이 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에 있다.
의호(義浩) 1721∼178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호(義浩) [1721(경종 1)∼1781(정조 5)]
대군의 13대손이며 현령 강중(剛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학행으로 참봉을 역임, 문집이 있다.
대군의 13대손이며 현령 강중(剛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학행으로 참봉을 역임, 문집이 있다.
인고(寅皐) 1802∼186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고(寅皐) [1802(순조 2)∼1864(고종 1)]
자는 순사(舜士), 시호는 효정(孝靖). 대군의 15대손이며 진사 순연(舜淵)의 계자로 생부는 희곡 지연(止淵)이다.
1827년(순조 27) 정시 문과에 급제, 청환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자좌에 있다.
자는 순사(舜士), 시호는 효정(孝靖). 대군의 15대손이며 진사 순연(舜淵)의 계자로 생부는 희곡 지연(止淵)이다.
1827년(순조 27) 정시 문과에 급제, 청환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자좌에 있다.
인교(寅敎) 1799∼184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교(寅敎) [1799(정조 23)∼1844(헌종 10)]
자는 경오(景五), 대군의 15대손이며 승지 기연(箕淵)의 아들이다. 1824년(순조 2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를 역임하고 대사간에 이르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동면 상화리 성리 선영 해좌에 있다.
자는 경오(景五), 대군의 15대손이며 승지 기연(箕淵)의 아들이다. 1824년(순조 24)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를 역임하고 대사간에 이르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동면 상화리 성리 선영 해좌에 있다.
인구(寅龜) 1809∼189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구(寅龜) [1809(순조 9)∼1896(고종 33)]
자는 장여(長汝), 호는 완이(莞爾). 대군의 15대손이며 증 이조판서 충연(忠淵)의 아들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 1792∼1868)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 1776∼1852)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학으로 성망이 높아 김조순(金祖淳 : ?∼1831) · 김상현(金尙鉉 : 1811∼1890)이 공의 문학을 박흡(博洽)하여 `화국지기(華國之器)\'라고 극찬하였다. 공은 `완이학설(莞爾學說)\'이라 할 수 있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이기지심성론(理氣之心性論)\'을 펴냈다.
학행으로 참판이 되어 경연관이 되고 이어서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다.
유고로는 <완이집(莞爾集)>을 비롯하여 10권이 있다.
묘소는 청천면 지천리 삼평촌 인좌에 있다.
자는 장여(長汝), 호는 완이(莞爾). 대군의 15대손이며 증 이조판서 충연(忠淵)의 아들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 1792∼1868)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 1776∼1852)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학으로 성망이 높아 김조순(金祖淳 : ?∼1831) · 김상현(金尙鉉 : 1811∼1890)이 공의 문학을 박흡(博洽)하여 `화국지기(華國之器)\'라고 극찬하였다. 공은 `완이학설(莞爾學說)\'이라 할 수 있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이기지심성론(理氣之心性論)\'을 펴냈다.
학행으로 참판이 되어 경연관이 되고 이어서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다.
유고로는 <완이집(莞爾集)>을 비롯하여 10권이 있다.
묘소는 청천면 지천리 삼평촌 인좌에 있다.
인규(寅奎) 1856∼193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규(寅奎) [1856(철종 7)∼1933]
대군의 15대손이며 재연(在淵)의 아들이다.
1892년(고종 29)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 시독관을 역임하였다. 정3품 비서감승에 올랐고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영월부사 · 신계군수 · 안악군수 · 장연군수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하 안산에 있다.
대군의 15대손이며 재연(在淵)의 아들이다.
1892년(고종 29)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 시독관을 역임하였다. 정3품 비서감승에 올랐고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영월부사 · 신계군수 · 안악군수 · 장연군수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하 안산에 있다.
인기(寅쨠) 1804∼188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기(寅쨠) [1804(순조 4)∼1882(고종 19)]
자는 요장(堯章), 대군의 15대손이며 봉조하 기연(紀淵)의 아들이다.
1822년(순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839년(헌종 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단 서곡 임좌에 있다.
자는 요장(堯章), 대군의 15대손이며 봉조하 기연(紀淵)의 아들이다.
1822년(순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839년(헌종 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단 서곡 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