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인량(寅亮) 1790∼187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량(寅亮) [1790(정조 14)∼1872(고종 9)]
 자는 공필(公弼), 대군의 15대손이며 참봉 비연(泌淵)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목사 ·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영평 정항리 건좌에 있다.
 인명(寅命) [1819(순조 19)∼1887(고종 24)]
 자는 기영(祈永), 시호는 효헌(孝?). 대군의 15대손이며 용궁공(龍宮公) 일연(一淵)의 아들로서 문정공(文貞公) 목연(穆淵)에게 입후하였다. 1858년(철종 9) 생원으로서 정시 문과에 급제, 1862년(철종 13)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아갔고 1863년(철종 14) 지평에 올라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청환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승진, 1884년(고종 21) 예조판서로서 복제의 개혁으로 소매의 폭을 줄인 `좁은 소매옷 입으라\'는 영에 반대 상소를 했다가 만경에 유배, 배소에서 별세했다. 사후에 신원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인석(寅碩) 1821∼185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석(寅碩) [1821(순조 21)∼1858(철종 9)]
 자는 관지(寬之), 호는 간암(澗菴). 대군의 15대손이며 청계당(聽溪堂) 한성서윤공 우휘(愚輝)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용연(用淵)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문사가 탁이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역학에도 연구가 깊어 `시원괘방론(蓍圓卦方論)\'을 주창하였다.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당대의 명인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 1786∼1856)와는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 <간암유고(澗菴遺稿)>가 있다.

인석(寅奭) 1800∼187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석(寅奭) [1800(정조 24)∼1870(고종 7)]
 자는 양여(良汝), 대군의 15대손이며 효연(孝淵)의 아들이다.
 1838년(헌종 4)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수동 당현 선영 건좌에 있다.
인설(寅卨) 1813∼188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설(寅卨) [1813(순조 13)∼1882(고종 19)]
 자는 은철(殷哲), 진사시를 거쳐 목사로서 1866년(고종 3) 정시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단 도동면 지사곡 갑좌에 있다.
인섬(寅暹) 1820∼188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섬(寅暹) [1820(순조 20)∼1880(고종 17)]
 자는 진여(進汝), 호는 소강(小江). 대군의 15대손이며 효행정려를 받은 태연(泰淵)의 아들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돈녕부 도정를 역임하였고 유고로 문집 <소강집(小江集)>이 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자좌에 있다.

인성(寅性) 1900∼194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성(寅性) [1900(광무 4)∼1945]
 자는 사훈(士薰), 호는 경당(敬堂). 대군의 15대손이며 성균관 박사 승연(升淵)의 아들이다.
 경학과(經學科)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를 역임하였다.
 유고로 문집 <경당집(敬堂集)>이 있다.

인식(寅植) 1873∼191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대군의 15대손이며 긍연(兢淵)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나라가 일본에 침략을 당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투쟁을 하다가 아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인식(寅植) 1873∼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식(寅植) [1873(고종 10)∼ ? ]
 대군의 15대손이며 긍연(兢淵)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한말에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의 형세가 위급해지자 의병을 모집, 왜적에게 항거하여 싸우다가 아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인우(寅祐) 1836∼189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우(寅祐) [1836(헌종 2)∼1899(광무 3)]
 대군의 15대손이며 목사 철연(喆淵)의 아들이다. 음보로 농상공부 협판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유천면 화지에 있다.

인욱(寅昱) 1792∼184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인욱(寅昱) [1792(정조 16)∼1845(헌종 11)]
 자는 관지(寬之), 대군의 15대손이며 호조참판 양연(亮淵)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장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