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재기(在璣) 1759∼181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재기(在璣) [1759(영조 35)∼1818(순조 18)]
 초휘는 재심(在深), 자는 선시(善始). 대군의 13대손이며 한성부 우윤 명준(命俊)의 아들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였다.
 유고가 있다.
 묘소는 포촌 술좌에 있다.

재하(宰夏) 1831∼190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재하(宰夏) [1831(순조 31)∼1902(광무 6)]
 자는 도경(道卿), 대군의 16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6대손이고 참찬 인화(寅和)의 아들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음보로 지례현감 · 문경군수를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도처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종친으로 고매한 인품과 뛰어난 행정력으로 치적이 높아 종2품인 종정원(宗正院) 경(卿)으로 발탁 · 임명되어 왕실의 계보에 관한 사무를 일호의 차착(差錯)없이 명확히 처리하여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연(淵鼎) 1859∼192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정연(淵鼎) [1859(철종 10)∼1924]
 대군의 14대손이며 의평(義平)의 계자로 생부는 감역 의홍(義弘)이다.
 도사(都事)로서 1890년(고종 27) 별시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옥천 신촌에 있다.
정하(政夏) 1859∼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대군의 16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인항(寅恒)의 아들이다.
 나라가 일본에 침략을 당하자 3·1운동에 앞장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목천에서 순절하였다.
제(濟) 1654∼171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경인(景仁), 호는 성곡(星谷). 대군의 10대손이며 임천군수 영휘(永輝)의 아들이다. 녹천상공 유(濡)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 1629∼1703)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사가 뛰어나고 시의 격조가 높아 당대의 명성을 떨쳤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익위사 시직에 임명, 1699년(숙종 25) 공조좌랑으로서 식년문과에 급제, 1701년(숙종 27) 승지에 오르고, 1704년(숙종 30) 충청도 관찰사, 1706년(숙종 32) 황해도 관찰사,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대사성 재임 중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1710년(숙종 36) 승지에 복직되고 이어서 전라도 관찰사 ·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712년(숙종 38) 예조참판에 이어 대사간이 되어서 과거에 부정이 있어 이를 시정하고자 상소를 하였는데 언조가 너무 날카로워 상의(上意)로 파직되자 광주(廣州)로 나가 자연을 벗삼아 이연자적(怡然自適)하며 경사(經史) 연구를 하였다. 1722년(경종 2) 복직되었다가 1724년 영조대왕이 즉위하면서 소론이 실각당할 때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별세했다. 후에 신원 복작과 동시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공은 관직 생활 30년 동안 매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며 청렴결백하여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특히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친부모같이 받들고 따랐으며 평양감사로 부임하여서는 퇴락한 평양성을 수축하고 요새를 구축하여 국방경비를 강화하였다. 청나라의 오란총독(烏蘭總督) 목극등(穆克登)이 우리의 서북경의 국방태세를 살피고 뛰어난 지도자가 왔다고 칭찬하였으며 항상 공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선정을 베풀어 민중이 흠모하고 송덕을 받았으며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 용문산 해좌에 있다.
 묘지명은 영의정 서종태(徐宗泰 : 1652∼1719)가, 신도비명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 1673∼1744)가 찬했다. 유고로 <성곡집(星谷集)> 5권이 있다.

종준(宗俊) 1719∼176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종준(宗俊) [1719(숙종 45)∼1764(영조 40)]
 자는 이로(以魯), 대군의 12대손이며 세징(世徵)의 계자이며 생부는 증 참판(參判) 세충(世忠)이다. 학자로서 유고가 있다.
 묘소는 연풍 자사동 병좌에 있다.
중하(重夏) 1846∼191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중하(重夏) [1846(헌종 12)∼1917]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 또는 탄재(坦齋). 대군의 16대손이며 현감 인식(寅植)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 진사가 되고 1882년(고종 19) 증광 문과에 급제, 1885년(고종 22) 안변부사로서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가 되어 청나라 가원계(賈元桂)와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여 국경분쟁 해소에 노력했으나 양국의 견해차이로 실패했다. 그 후 덕원부사를 거쳐 1890년(고종 27) 참의교섭통상사무가 되고 1892년(고종 29)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1894년(고종 31) 협판교섭통상사무를 거쳐 공조참의에 전직, 이 해 갑오개혁으로 제1차 김홍집 내각에 입각하여 내부협판이 되었다. 이듬해 지방제도 개편 때 대구부 관찰사가 되고 이어 평안도 관찰사 · 궁내부 특진관 · 규장각 제학을 역임하였다. 한일병탄 후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산업 진흥을 위하여 리재극(李載克) · 리하영(李夏榮) · 리근상(李根湘)과 함께 작잠회사(칳蠶會社)를 세웠다.
 저서로는 <규당문집(圭堂文集)> · <감계전말(勘界顚末)> · <감계일기(勘界日記)> 등이 있다.

지연(止淵) 1777∼184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지연(止淵) [1777(정조 1)∼1841(헌종 7)]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곡(希谷), 시호는 문익(文翼). 대군의 14대손이며 참판 의열(義悅)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총오(聰悟)가 절륜(絶倫)하였다. 약관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업성취가 뛰어나 사우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805년(순조 5)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증광 문과에 급제, 이듬해 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여러 사람의 부러움과 칭송을 받았다. 승문원에 보직되었다가 이어서 주서에 임명되었는데 공의 학식과 덕망이 인정되어 경연관이 되었다. 그 후 청환직을 두루 거쳐 도승지 · 형조참판을 거쳐 형조 · 이조 ·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837년(헌종 3)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 영의정과 좌의정이 사직함으로써 홀로 상신자리에 있었는데 이 때 상감이 유충(幼沖)하여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고 있었으며 공은 3정승의 역할을 다하였다. 1840년(헌종 6)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과 동시에 우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우의정 재임기간(1837∼1840)의 일록(日錄)을 써서 남겨 당시의 정정(政情)과 사회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써 높이 평가되고 있다. 판중추부사가 되자 공을 시기하는 반대파에서 “희곡이 3정승의 자리를 혼자 맡아 정권을 전횡하였다.”고 누차 탄핵 상소하여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유배길에 올라 배소에 도착하여서도 집에서 하던 대로 종일 단좌하고 주역을 강독하며 문집 두권을 수사(手寫)하였다. 1841년(헌종 7) 배소에서 별세하니 춘추 65세였다. 공의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신원하고 예장을 명하고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뜻이 깊고 풍채가 응중(凝重)하며 성품이 정량강명(貞亮剛明)하였다. 선악의 분별과 의리의 판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엄연함이 있어 낭묘(廊廟 : 의정부)에 서면 연로한 정승이라도 그를 움직일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왕의 두터운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생사를 가리지 않고 시종일관 치국보민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시폐(時弊)를 말하면 반드시 구할 방침을 말하였으나 조경(躁競)한 무리들은 그의 형적(形跡)을 엿보고 방해함에 마침내 그는 모함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희곡일록(希谷日錄)> 외 <희곡유고(希谷遺稿)> 8권이 있다.
 묘소는 장단 동도면 고읍리 임좌에 있다.
 묘지명은 이조판서 김학성(金學性 : 1807∼?), 묘갈명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 1796∼1870), 신도명은 홍재철(洪在喆)이 찬하였다.

지연(志淵) 1766∼185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지연(志淵) [1766(영조 42)∼1852(철종 3)]
 자는 심일(心一), 대군의 14대손이며 동몽교관 의윤(義胤)의 계자로 생부는 현감 의술(義述)이다.
 1805년(순조 5) 증광 문과에 급제, 참판 · 판서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인천시 구월동 경좌에 있다.

지현(趾顯) 1753∼181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지현(趾顯) [1753(영조 29)∼1815(순조 15)]
 자는 군미(君美), 대군의 11대손이며 언각(彦珏)의 아들이다. 조부는 학자 노은처사(盧隱處士) 천구(天球)이고 부친도 학자 성균관 진사를 역임했으므로 3대째 이은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문집이 있으니 3대를 이어 문집을 갖고 있는 문한가계(文翰家系)이다.
 묘소는 진천 배봉 병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