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진연(晋淵) 1770∼183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진연(晋淵) [1770(영조 46)∼1838(헌종 4)]
 자는 용구(用九), 대군의 14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의로(義路)의 아들이다.
 1805년(순조 5) 증광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배천 용해면 오리 손좌에 있다.

천구(天球) 1695∼176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백옥(伯玉), 대군의 9대손이며 학자 노은처사(蘆隱處士) 경하(擎廈)의 아들이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성균관 생원으로서 지조가 굳고 행장이 바르고 학식이 뛰어난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문집이 있다.
 묘소는 진천 갈월리 서수원 음지촌 사좌에 있다.

최중(最中) 1715∼178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최중(最中) [1715(숙종 41)∼1784(정조 8)]
 자는 인부(仁夫), 소자(小字)는 계량(季良), 호는 위암(韋촍), 시호는 문정(文貞). 대군의 12대손이며 녹천 유(濡)의 손자이며 남천현감 현응(顯應)의 아들이다. 품성이 맑고 깨끗하며 총오(聰悟 : 사물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영리함)가 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문사가 뛰어났다. 아홉살 때 지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이 걷히니 밝은 달이 나오고 (雲捲明月出)
푸른 하늘은 나의 마음 같다.   (靑天如我心)
높은 뜻과 깊은 지식은     (志高識遠常)
천하의 일을 먼저 생각한다.   (有先天下憂)

 1744년(영조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1년(영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 1755년(영조 31) 홍문관 수찬으로 전임,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저술했다.
 1756년(영조 32) 강원도 암행어사가 되어 현지에 갔을 때 영동(嶺東) 11개읍이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여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고 있으며,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공은 장계를 올려 사창의 양곡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민정을 살펴 억울한 일을 도와주고 관기를 바로잡아 놓았다. 영동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난곡재(蘭谷齋)\'라 이름을 붙이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후 응교 · 삼척부사 · 대사간 · 이조참의 ·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공은 매사를 처리하는데 공정무사하며 권선징악하고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고 말이 사리에 맞는다고하며 임금은 특별히 호피를 하사하고 원보(元輔 : 정승)도 능히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칭찬하였다.
 1769년(영조 45) 예조참의에 임명되어 <문헌비고(文?備考)>를 편찬하는데 총책임자인 편집당상이 되었다. 그 후 형조판서에 올라서는 죄수를 국문하는 데 있어 주장(朱杖) · 당격(撞擊) · 흉협(胸脇)의 형을 없애도록 상청하여 제도를 없앴다. 1771년(영조 47)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모함을 받아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함흥(咸興) 성외에 큰 화재가 나 1,000여 호가 소실되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거리에서 방황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공은 특별 구휼계획을 세워 전곡을 나누어 주고 집까지 지어주어 안도시켜 주니 백성들이 감영안에 있는 낙민루(樂民樓) 아래에 와서 북을 치고 춤추며 이제 비로소 명실상부한 낙민루가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한다. 그 후 의정부 우참찬에 올랐다가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82년(정조 6) 리유백(李有白)이 대역부도죄로 사형되자 그 인척이라 하여 추자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별세했다. 그 후 신원되고 `문정(文貞)\'의 시호까지 내렸다. 공은 강직 · 청렴하고 위국진성하여 3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홍국영(洪國榮 : 1748∼1781)이 집권 전횡하였을 때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계림지간(鷄林之間) 임하정(林下亭)에서 유연자적하게 지냈다. 홍국영이 그 인격을 사모하여 높은 벼슬을 권하였으나 거절한 고결한 정치인이요 문한대가이요 또한 투철한 효자로서 공부에 바쁜 중에도 사친시탕(事親侍湯) 30년을 옷을 풀지 않고 하였다. 공의 아들 의병(義秉) 또한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이름이 높았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오좌에 있으며 유고로 <위암집(韋촍集)>이 있다.

치중(致中) 1726∼180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치중(致中) [1726(영조 2)∼1802(순조 2)]
 자는 치화(稚和), 호는 불용재(不用齋). 대군의 12대손이며 수찬 증 이조판서 현망(顯望)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급제, 1760년(영조 36) 감제시(柑製試)에 장원 급제,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임명되고 이어서 대교 설서를 거쳐 1766년(영조 42)에 홍문관 교리가 되어 매사를 처리하는데 공명정대하고 논조가 명확하고 행의가 바르니 임금은 “참으로 가상하다, 빙청 옥결(氷淸 玉潔)같도다. 큰 일을 맡길 만하다.”하고 암행어사에 임명하고 문제가 있는 함경도 지방과 영남지방의 민정을 살피고 관기를 숙정(肅正)하는 어명을 내렸다. 당시 함경도 지방에는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당지에 이르러 모든 사정을 살피고 우선 정부 양곡을 풀어주고 그 고장의 지주와 부호들을 효유(曉諭 : 깨닫도록 일러줌)하여 양곡을 모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주고 감영의 의옥(疑獄) 3건을 바르게 다스려 주니 고을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영남지방에 가서는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의 한을 풀어 주니 영남 유생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임금께 아뢰니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승지에 임명하였다. 1775년(영조 51)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소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청황제가 공의 인격 · 논리 · 능력에 감복하여 청나라 제일의 화가를 불러 공의 영정을 그리게 하여 선물을 하였다. (현재 종손이 보관하고 있음)
 1793년(정조 17)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춘추가 70이 되자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미좌에 있다.

탁하(度夏) 1830∼186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탁하(度夏) [1830(순조 30)∼1861(철종 12)]
 대군의 16대손이며 호조참판 양연(亮淵)의 손자로 인욱(寅昱)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으며 문집이 있다.

태연(泰淵) 1799∼186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태연(泰淵) [1799(정조 23)∼1867(고종 4)]
 자는 성장(聖長), 호는 강옹(江翁). 대군의 14대손이며 의호(義浩)의 아들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어 효자로 이름이 났고 학자로서 학덕이 높아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효자정려가 내려졌으며 유고로 문집 <강옹집(江翁集)>이 있다.
 효려(孝閭) 소재지와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다.

태중(泰中) 1795∼185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태중(泰中) [1795(정조 19)∼1856(철종 7)]
 자는 치영(致永), 호는 정안재(靜安齋). 대군의 12대손이며 증 이조참의 지현(趾顯)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학덕이 높아 학행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유고로 문집 <정안재집(靜安齋集)>이 있다.

한교(漢敎) 1753∼181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한교(漢敎) [1753(영조 29)∼1815(순조 15)]
 대군의 12대손이며 승지 혜조(惠祚)의 아들이다. 인품이 고상하고 학식이 높은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문집이 있다.
현(俔) 1573∼164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경보(磬甫), 호는 환성(喚醒). 대군의 5대손이며 군수 경춘(慶春)의 계자로 생부는 광춘(光春)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에 임명되고 이어서 여러 벼슬을 거쳐 우승지에 올라 선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정사를 공정히 처리하여 명성이 높았다.

현곤(顯坤) 1699∼174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곤(顯坤) [1699(숙종 25)∼1743(영조 19)]
 자는 중원(仲元), 호는 양오헌(養吾軒). 대군의 11대손이며 통정대부 엄(淹)의 계자로 생부는 점(漸)이다.
 서화가로서 서화에 독특한 경지에 이르렀다. 필법은 소식(蘇軾 : 1036∼1101), 시는 진여의(陳與義 : 송대 시인)를 본떴다. 유품은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는 선영 유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