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현규(顯揆) 1697∼175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규(顯揆) [1697(숙종 23)∼1759(영조 35)]
 자는 군택(君宅), 호는 우와(宇窩) 또는 무가옹(無可翁)이다. 대군의 11대손이며 목사 수(洙)의 아들로 행의가 바르고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을 정성껏 모시었다. 아버지 목사공이 병환이 나자 그 분(糞)을 받아 쓰고 단 것을 맛 보아가며 시탕(侍湯)을 하여 올렸으며 어머니 연세가 90이 넘어 기력이 쇠퇴하자 마침 부인이 출산을 하였는지라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게 하고 어머에게 올려 봉양하였다. 양친이 천수를 다하고 별세하자 3년간 시묘하며 소식(素食)에 국과 장만을 먹으며 양친 생존시와 같이 예로써 모셨다. 온 고을에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효행정려를 내렸다.
 유고로 <무가옹집(無可翁集)>이 있다.
 묘소는 영동 예심동 손좌에 있다.

현기(顯箕) 1682∼175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기(顯箕) [1682(숙종 8)∼1750(영조 26)]
 대군의 11대손이며 정(渟)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장원 급제, 정랑을 역임하였다.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유고가 있다.



현도(顯道) 1675∼174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도(顯道) [1675(숙종 1)∼1743(영조 19)]
 자는 자유(子由), 호는 만오당(晩悟堂). 대군의 11대손이며 정(渟)의 아들이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사로 현감 · 군수를 역임하였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유고로 <예기참휘(禮記?彙)> 32권이 있으며 <수견첩록(隨見?錄)> 15책을 저술하였다

현량(顯良) 1679∼173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량(顯良) [1679(숙종 5)∼1737(영조 13)]
 자는 충보(忠甫), 대군의 11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택(澤)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직장에 이르러 1730년(영조 6) 정시문과에 급제,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 7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송현리 간좌에 있다.

현록(顯祿) 1684∼173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록(顯祿) [1684(숙종 10)∼1730(영조 6)]
 자는 영보(永甫), 대군의 11대손이며 완흥군(完興君) 섭(涉)의 아들이고 후원의 현손이다. 음보(蔭補)로 헌릉 참봉 · 장원서 봉사 · 금구현령 · 전주부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알성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이 되고 그 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추방되자 소론의 음모를 규탄하다가 순흥부에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대왕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검상 · 사간을 거쳐 1726년(영조 2) 집의에 승진하였으며 이어 응교 · 승지를 역임하고 대사간에 올랐다가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이해 정미환국(丁未煥局)으로 노론이 세력을 잃게 되자 파직, 후에 다시 기용되어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워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부총관 · 비변사 당상을 겸하고 이어 대사간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자좌에 있으며 묘지명은 문정공(文貞公) 최중(最中 : 1715∼1784)이, 신도비명은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 1691∼1762)가 찬했다.

현모(顯謨) 1685∼173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모(顯謨) [1685(숙종 11)∼1731(영조 7)]
 자는 문약(文若), 대군의 11대손이며 감사 제(?)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홍천현감이 되어 1727년(영조 3) 정시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 응교를 역임하였다. 문집이 있다.
 묘소는 지평 태을 엄곡 선영 건좌에 있다.
현상(顯相) 1680∼172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상(顯相) [1680(숙종 6)∼1725(영조 1)]
 대군의 11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택(澤)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여 좌랑을 역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정려가 세워졌다.
 묘소는 선영 유좌에 있다.

현익(顯益) 1678∼171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익(顯益) [1678(숙종 4)∼1717(숙종 43)]
 자는 중겸(仲謙), 호는 정암(正庵). 대군의 11대손이며 군수 홍(泓)의 아들이다.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김창협(金昌協 : 1651∼1708)의 문인이며 1708년(숙종 34)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경학에 이름이 높았다. 1710년(숙종 36) 학행으로 참봉이 되고 왕자 사부에 추천 임명되었으며 진안현감도 역임하였다. 저서로 <정암집(正庵集)> · <정암잡기(正庵雜記)> 등 12권이 있다.
 현장(顯章) [1674(현종 15)∼1728(영조 4)]
 자는 성보(誠甫), 대군의 11대손이며 임천군수 영휘(永輝)의 손자이고 증 이조참의 택(澤)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감역으로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청환직을 두루 거쳐 의주 부윤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양주 수락산 동막동 축좌에 있다.
현제(賢濟) 1614∼165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대군의 7대손이며 충신정려를 받은 유임(惟任)의 아들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강화를 지키기 위하여 출전하자 효성이 극진한 공은 아버지와 함께 종군하다가 강화함락과 함께 아버지가 순절하자 애통해 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고 여막을 짓고 3년을 지냈다. 조정에서 공의 충절과 효성을 가상히 여겨 아버지와 함께 1650년(효종 1) 충효정려(忠孝旌閭)가 내려졌다.
 묘소는 풍천군 동면 철동 선영 곤좌에 있다.
현행(顯行) 1685∼174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현행(顯行) [1685(숙종 11)∼1746(영조 22)]
 자는 신경(信卿), 대군의 11대손이며 군수 담(湛)의 아들이다. 품성이 온중 · 자상하고 효성이 극진하여 친환(親患)이 8년이나 계속되었는데 하루같이 모시어 그 지성에 온 고을이 감탄하였다. 1727년(영조 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2년(영조 8)에 참봉에 제수되고, 1743년(영조 19) 청도군수에 임명되어 1746년(영조 22) 임소에서 별세했다.
 묘소는 광주 성실면 오리 갑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