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형(逈) 1603∼165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여근(汝近), 호는 성재(省齋). 대군의 8대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증 이조판서 후재(厚載)의 아들이다.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조카이다. 약관 20세에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훈종 1등공신에 책봉되어 정6품직을 받고 1630년(인조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헌부 감찰 · 의금부 도사를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동복현감이 되었다.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신의로써 군민을 격려하고 근왕병을 모아 여산까지 이르렀는데 다른 곳에서 근왕병이 패해 무너지자 군민이 겁이 나서 밤에 산으로 도망갔다.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으니 다음 날 도망갔던 군민이 모두 돌아와 힘을 모아 고을을 무사히 지켰다. 1650년(효종 1)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 · 정언 · 헌납 · 필선 ·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바른말로 직간하다가 모함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척출되었는데, 영의정 김육(金堉 : 1580∼1658)과 이조판서 김익희(金益熙 : 1610∼1656)가 번갈아 임금에게 무고함을 아뢰고, 독자로서 노부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측은히 여긴 임금은 장령에 복직케 하였고 그 후 2년 후 별세하니 공의 춘추 52세이고 아버님은 80세였으니 이를 듣는 사람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숭정대부 좌찬성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임좌이다.
(逈) [1603(선조 36)∼1655(효종 6)]
 자는 여근(汝近), 호는 성재(省齋). 대군의 8대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증 이조판서 후재(厚載)의 아들이다.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조카이다. 약관 20세에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훈종 1등공신에 책봉되어 정6품직을 받고 1630년(인조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헌부 감찰 · 의금부 도사를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동복현감이 되었다.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신의로써 군민을 격려하고 근왕병을 모아 여산까지 이르렀는데 다른 곳에서 근왕병이 패해 무너지자 군민이 겁이 나서 밤에 산으로 도망갔다.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으니 다음 날 도망갔던 군민이 모두 돌아와 힘을 모아 고을을 무사히 지켰다. 1650년(효종 1)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 · 정언 · 헌납 · 필선 ·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바른말로 직간하다가 모함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척출되었는데, 영의정 김육(金堉 : 1580∼1658)과 이조판서 김익희(金益熙 : 1610∼1656)가 번갈아 임금에게 무고함을 아뢰고, 독자로서 노부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측은히 여긴 임금은 장령에 복직케 하였고 그 후 2년 후 별세하니 공의 춘추 52세이고 아버님은 80세였으니 이를 듣는 사람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숭정대부 좌찬성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임좌이다.
혜조(惠祚) 1721∼178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혜조(惠祚) [1721(경종 1)∼1788(정조 12)]
 자는 중양(仲養), 대군의 11대손이며 중추부 동지사 필운(必運)의 아들이다.
 1756년(영조 32)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9년(영조 35) 식년시 문과에 급제, 양사의 요직을 두루 거쳐 좌승지에 이르렀다. 고종 때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통진 내대 우록 간좌에 있다.

호중(昊中) 1747∼182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호중(昊中) [1747(영조 23)∼1821(순조 21)]
 자는 백순(伯純), 호는 졸옹(拙翁). 대군의 12대손이며 응현(應顯)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열중하여 학식이 출중하였는데, 특히 경례학(經禮學)에 밝았다. 천품이 인자하고 예의가 바르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 약을 구하러 공주 외가까지 갔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너의 모친 병환이 중한데 잉어를 달여 잡숫도록 하면 효험이 있겠다.”고 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 잉어를 구하러 가는데 마침 길에서 잉어를 파는 사람이 있어 두 마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목천고개에 이르니 날이 저물어 사방이 칠흙같이 어두웠다. 그 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지라 공이 “내 사정이 급하니 길을 비켜달라.” 하니 호랑이가 길을 비켜주어 무사히 집에 돌아와 잉어를 달여드려 효험을 보았다. 그런데 그 후 섣달에 병환이 다시 났는데 의원이 뱀의 기름을 내어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뱀을 구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으나 구하지 못할까 초조하여 방황하고 있는데 집뒤 고목 썩은 나무 뿌리 위에 뱀 한 마리가 나타나서 기름을 내어 잡숫도록 하니 또한 효험을 보았다. 이 사실을 안 온 고을 사람들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하며 지극한 효행의 결과라고 칭송하였다. 그 후 모친이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부친이 상심하여 몸이 쇠약해 졌다. 공은 생선을 잡아 부친께 드리고자 앞내에서 낚시를 하는데 길 가던 사람이 상중에 낚시를 한다고 조소하는데도 태연히 낚시를 계속하였다. 길손이 멀리 가다가 어버이를 위하여 하는 것임을 알고 다시 돌아와서 사과를 하고 간 일도 있다. 공이 별세한 후에도 친기(親忌) 때에는 종부 꿈에 나타나 목욕재계하고 관복을 정제하고 친히 사당을 청소하고 제수를 정성껏 마련하도록 훈계하기를 10년 동안 똑같이 하였다 한다. 일찍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자제들에게 훈계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헛되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人於天地不虛生)
태어나 아무것도 이름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
(生且無成若未生)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서
(小學奚徒人歲巳己)
몸을 닦고 하는 일에 공을 이루어가며 한 평생을 바쳐라.
(修身功業宜平生)

 조정에서 공의 효행이 지극하고 학문이 탁월하다 하여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제수하였다. 유고로 <졸옹집(拙翁集)>이 있다.
 묘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구수리 대복동 을좌에 있다.

후연(厚淵) 1798∼186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후연(厚淵) [1798(정조 22)∼1863(철종 14)]
 자는 성재(聖載), 호는 만오(晩悟). 대군의 14대손이며 의수(義守)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학이 뛰어났고 효행이 지극하여 온 고을의 칭송을 받았다.
 유고로 <만오집(晩悟集)>이 있다.

후원(厚源) 1598∼166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또는 남항거사(南港居士), 시호는 충정(忠貞). 대군의 7대손이며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욱(郁)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 : 1548∼1631)의 문인(門人)이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에 임명되고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기보다는 온 국민이 힘껏 싸우다 힘이 모자라면 임금은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죽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1637년(인조 15) 승지가 되고 이어 강화유수를 거쳐 대사간을 역임, 1648년(인조 26)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649년 효종대왕이 즉위하자 공을 서울로 불러 북벌의 의논을 하고 그 주축이 되게 하였다. 이를 김자점(金自點 : ?∼1651)이 청나라에 밀고하여 갖은 곤욕을 겪기도 하였다. 대사성 · 호조참판 · 대사헌을 거쳐 1655년(효종 6)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推刷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推刷), 강화를 방비케 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고쳐 간행하여 사고에 나누어 소장케 하였다.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공의 성품과 재기가 뛰어남을 안 효종대왕은 주사(舟師 : 수군)의 총책을 겸임케 하였다. 이에따라 공은 북벌 때 쓰일 전함 200척을 만들어 어사(御史)를 초치, 대열함(大閱艦)을 갖게 하니 신임이 더욱 두터워져 북벌의 대임을 관장케 하였다. 매양 조회에 모의가 있으면 군신에 앞서 공의 자문을 받고 공의 주청을 모두 들어 주었다. 판의금부사 · 좌참찬을 거쳐 1657년(효종 8) 우의정에 올라 북벌의 준비를 위하여 더욱 군비를 확충하고 군량을 비축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당대의 명망이 높은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을 이조판서에,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을 병조판서에, 장재 이완(李浣 : 1602∼1674)을 훈련대장에 추천하여 임명케 하였다. 1659년(효종 10) 북벌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큰 가뭄이 들어 모든 곡식이 말라 죽고 모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은 “하느님도 어찌 이다지 무심한가. 이 나라를 버리고자 하는 것인가.”하고 친히 제단에 나가 고유문을 올리고 북벌의 차질이 올까 걱정을 하였다. 하늘도 감동되었는지 별안간 사방에서 먹구름이 모여 들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온 조정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정성의 덕분\'이라 하고 임금에게 비를 피하도록 청하였으나 “하늘이 주시는 은혜로운 비다.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시는 것이라.”고 기뻐 호곡하며 움직이지 않는지라 “비가 찹니다.” “옥체에 해가 되십니다.”하여도 움직이지 않고 세찬 비를 맞다가 몇 시간 후에 대내에 들었다. 효종대왕은 당시 북벌계획을 추진하느라 밤낮으로 과로한 데다 등창까지 난 상태에서 찬 비를 몇시간 맞고 나니 감기까지 겹치게 되어 병세가 악화되었다. 침전에 든 효종대왕은 공과 송시열을 한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이듬해 1660년(현종 1) 공이 별세하여 북벌계획은 일장춘몽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리고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배향케 하였다.
 저서로는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외조부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 1532∼1607)의 글을 편저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안산 밖 지곡(池谷) 자좌에 있다. 묘지명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이 찬하고, 신도비명은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찬하였다.
휘중(徽中) 1712∼178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중(徽中) [1712(숙종 38)∼1786(정조 10)]
 자는 여신(汝愼), 대군의 12대손이며 헌납 현량(顯良)의 아들이다.
 생원시를 거쳐 1750년(영조 26) 식년문과에 급제, 1767년(영조 43) 중시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직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묘소는 광주 가락동 간좌에 있다.
흡(?) 1684∼174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자동(子東), 대군의 10대손이며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증손이며 현감 완천군 산휘(山輝)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에 임명되고 이어서 대사성 · 이조참의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 이조판서 · 부제학 등 청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묘소는 시흥 호봉곡 삼석산 선영하 건좌에 있다.
 흡(?) [1684(숙종 10)∼1740(영조 16)]
 자는 자동(子東), 대군의 10대손이며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증손이며 현감 완천군 산휘(山輝)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에 임명되고 이어서 대사성 · 이조참의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 이조판서 · 부제학 등 청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묘소는 시흥 호봉곡 삼석산 선영하 건좌에 있다.
희하(熙夏) 1839∼190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희하(熙夏) [1839(헌종 5)∼1900(광무 4)]
 대군의 16대손이며 인문(寅文)의 계자로 생부는 증 참찬 인화(寅和)이다. 내부대신 건하(乾夏)의 아우이기도 하다.
 유일(遺逸)로 충북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숭정대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갑좌에 있다.